빈틈이 준 선물

마가복음11:1-11

 

오늘은 고난주간의 시작이자 동시에 종려주일이기도 합니다. 종려주일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종려가지를 흔들었다는 요한복음의 기록에서 그 명칭이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다른 복음서에는 종려가지란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오늘 본문을 보더라도 나뭇가지로만 되어 있고, 그것도 흔든 게 아니라 길에 깔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소 서술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 부분을 복음서 전체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까닭은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이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는 그만큼 불가피한운명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반증해 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마가의 기록은 나귀 새끼와 관련된 내용에 상당부분 이야기를 할애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는 뜻입니다.다른 복음서에서도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하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역사적인 사실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하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이 장면은 다소 의아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나귀는 짐을 나르기 위해 사용합니다. 더군다나 나이 삼십이 지난 성인 남자가 자신 보다 작아 보이는 어린 나귀를 타고 길을 간다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귀 이야기를 강조한 것은 그것이 구약의 예언을 통해 이미 알려져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스가랴9장 9절의 말씀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나귀를 타고 오시어.”마가는 바로 이 스가랴의 예언을 간접적으로 인용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다시 말해 예언 그대로 실현되었다는 뜻입니다.

비슷한 내용이 창세기에도 등장합니다. 죽음을 앞둔 야곱이 아들들에게 남긴 유언에서 이와 관련된 구절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9장 11절에 보면, “포도나무에 나귀를 예사로 매어놓고 고급 포도나무에 새끼 나귀를 예사로 매어 두리라”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장차 왕으로 오실 메시야가 오실 때 포도나무에 나귀를 미리 매어 놓는다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나귀를 타고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을 하신다는 이야기는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라 이미 예언된 사항이 그대로 성취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거나, 나뭇가지를 길에 깔고 “호산나 복되시다!”라고 소리를 치며 예수님을 맞이할 때는 이러한 예언의 성취에 대한 확신도 한 몫 거들었다고 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해도 여전히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입성의 장면은 누구든 당시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자나 영웅적 카리스마를 지닌 장수의 개선 행진을 먼저 떠올리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복음서의 기록도 이를 증명해 줍니다. 사람들이 나뭇가지와 겉옷을 길에 깔았다는 것은 당시 왕의 행렬 앞에 행하는 일종의 의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왕의 행렬과 새끼 나귀의 부조화를 감수하면서까지 이렇게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아니 예수께서는 왜 이러한 방법을 택하신 것일까요? 단순히 구약의 예언을 따라야 사람들이 알 수 있을 것이란 이유 때문에 그렇게 행한 것일까요? 혹 그렇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또 다른 특별한 이유나 목적이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실 위에서 언급한 스가랴의 예언은 세상의 정복자와는 달리 장차 오실 메시아는 평화의 왕으로 오실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는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메시아의 모습을 전쟁의 무기를 없애고 참된 평화와 공의를 가져다 줄 분으로 기대했던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한다는 생각도 기존의 개선행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나타내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새로운 세상과 방식이 열리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세상은 힘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힘이 있으니 더 화려하고 위용을 드러낼 수 있는 모습으로 과시하는 것은 당연한 모습입니다. 우리도 은연 중에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지요.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는 세상의 시선으로는 그 편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새끼 나귀를 타고 향한 곳도 예루살렘이라는 도성이라는 사실입니다.예루살렘은 성전과 왕궁이 있는 곳으로 유대사회의 가장 상층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지역이었습니다. 성전과 왕궁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누리던 지배층이 모든 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도시였던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힘의 논리를 재생산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약자는 언제나 그들의 통제 하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생각이나 가치관 조차도 만들어진 세상의 방식에 길들여진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지난 주 한국에서는 전직 대통령이 뇌물수수를 비롯한 여러가지 죄목으로 구속되는 사건이 또 일어났습니다. 일년을 사이에 두고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가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이미 전두환, 노태우 두명의 전직 대통령은 중형을 선고 받고 지금은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지위를 모두 잃은 상태이니, 생존하는 전임 대통령 중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퇴임생활을 하는 이는 하나도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국가적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이번에 구속된 이명박 전 대통령은 IMF 이후로 민생의 어려움을 겪던 국민들에게 자수성가의 모델이자 무너진 경제를 다시 회복시킬 것이란 희망으로 선출된 대통령이었습니다. 모두가 다시 잘 살 수 있는 성공적인 경제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국민들의 기대를 받았던 겁니다. 하지만 결국 국민을 잘 살게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혼자 잘 사는 일에 나름대로 성공한 대통령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 대통령의 개인적인 배경을 생각해 보면, 과연 이것이 그 혼자만의 문제일까라는 의문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물론 제가 한 개인을 변호하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개인의 욕망과 성공이라는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들을 잃어 왔는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의 성공담은 많은 사람이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주경야독을 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온갖 일을 다하는 억척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아마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도 이와 똑같은 경험을 하며 삶에 최선을 다 기울였을 겁니다.그러나 그 가운데서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손에 꼽을 만한 소수의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계층의 사다리 끝까지 오를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입니다. 이후의 세대에게는 따라가야할 모범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산업화를 거치며 우리 사회 모두가 공감하는 삶의 목표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금번 이 전대통령의 뇌물수수 혐의와 관련해서 언급된 삼성이라는 대재벌에 대한 우리의 시선도 마찬가지에서 볼 수 있을 겁니다. 회사의 광고카피이기도 했던, “일등주의”는 어쩌면 말은 안해도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의 모습이었던 것이지요. 성공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무한경쟁과 성공주의가 우리의 가치관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만큼 말입니다.

지난 주 한국에서는 소위 로또 청약이라고 불리는 아파트 분양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개장을 앞두고 줄을 늘어 선 사람들의 길이가 1Km를 넘었다고 하니, 여전히 인생 대박을 꿈꾸는 한국 사회의 성공주의는 대통령 한사람의 구속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사람들도 이제 다 아는 것이지요. 열심히 일만 해서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히려 성공신화는 이 대통령과 같은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성공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미련하리만큼 열심히 살면 될 수 있을 것이란 사람들의 이야기 아닐까요? 이제는 신화처럼 이루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오래 전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평범하게 자신의 삶에 충실히 사는 것이 인정 받지 못하는 세상. 성공을 위해서는 편법과 일탈을 눈감아 주는 세상. 오히려 잘못된 불의에 대해 지적을 하는 이가 더 욕을 먹고 “정말 팍팍한 인간”이라며 구석으로 내몰리는 세상.어쩌면 나귀 새끼를 타고 향했던 당시의 예루살렘과도 같은 모습인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자, 한 번 보라고. 성공이 최상의 목표인 너희 눈에 이처럼 보잘 것없는 모습이 또 어디 있느냐고. 그런데 하나님은 이 보잘것없는 모습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실 것이라고. 그것은 소수의 몇명만 잘먹고 잘사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기뻐하며 평화를 누리는 새로운 세상이라고. 힘이 조금 없어도, 가진 것이 조금 부족해도, 생긴 것이 조금 못나도 열심히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삶의 행복을 누리는 그런 세상을 주실 것이라고. 적어도 내 가족을 위해 지금 비록 가난해서 많은 것을 줄 수 없지만, 열심히 땀흘리며 일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또 그런 부모님을 보며 자식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세상.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오히려 사람들 보기에 미안하고 부끄러워지는 그런 세상. 바로 그런 세상을 위해 내가 왔노라고 말입니다.”

제주도에 가면 여러 곳에서 돌담을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제주를 흔히 삼다도라고 해서 돌, 바람, 여자가 많다고 하니 놀랄 일도 아닙니다. 요즘에는 남자의 수가 급증해서 이제 여자가 유난스럽게 많다는 말은 옛이야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바람과 돌은 자연적인 현상이라 그런지 지금도 제주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돌담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돌담의 모습이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빈틈이 너무 많기 때문이지요. 그냥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것처럼 가지런한 모습이 아닙니다.보통 담벼락을 만들때는 시멘트를 사용하면서까지 한치의 틈도 없이 메꾸어 쌓아 올리는데, 제주도의 돌담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멍이 숭숭 난 것처럼 빈틈이 많다는 특징이 있습니다.그 이유는 바로 바람 때문입니다. 바람이 강하게 그것도 자주 불기 때문에 일부러 빈틈을 두어 담벼락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빈틈으로 지나가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던 이들에게 그가 타고 온 새끼 나귀는 빈틈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성공이라는 신화 속에서 경쟁력이 없어 보이는 자신의 배경, 능력, 외적인 모습이 마치 빈틈처럼 느껴지듯 말입니다.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만들어가실 새로운 세상의 모습은 그 빈틈도 의미 있는 곳입니다. 오히려 그 빈틈을 통해 사람 사는 진정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빈틈 없이 보이듯 빡빡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인정없는 세상이 한번의 풍파에 무너질지 모르지만, 주님이 만드실 나라는 결코 쉽게 무너지는 법이 없습니다. 조금은 바보 같아 보일만큼 순진한 빈틈이, 자신을 채우고 내세우는 것 보다 다른 사람을 돕고 나누며 내 자신을 내어주는 그 이타적 빈틈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공고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을 환영합니다.우리 삶의 작은 빈틈 조차도 소중한 의미로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