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보다 강한 증거는 없다

요한복음20: 19-31

 

지난 주 우린 부활의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죄와 탐욕으로 죽어가던 이 땅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시어 십자가의 대속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활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가게 될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에게 부활은 그저 일어났을지도 모를 하나의 표징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역사적 사건이자 생명의 구원을 허락하신 사랑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몸을 숨기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19절에 ‘문을 모두 닫아 걸어 놓고 있었다’는 표현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만큼 외부와는 철저하게 단절된 상태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비단 폐쇄적인 공간에 움츠리고 있었다는 의미만은 아니었습니다. 분명 그들의 마음도 완전히 소외된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더이상 그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 만으로도 제자들은 커다란 상실감과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들을 혼돈과 좌절의 상태에서 점점 외부와는 철저하게 단절된 상황으로 몰아갔던 것이지요.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대면도 자신들이 직접 찾아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숨어 있던 제자들을 먼저 찾아와 만나주신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비록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듯 문은 닫혀있었지만,예수님은 그 가운데를 지나쳐 제자들을 직접 찾아 만나주셨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이 상황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사람이 닫힌 문을 그대로 통과하는 것은 마술쇼에서나 볼 수 있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부활을 신비한 현상으로 바라보려는 생각과 일치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만을 가지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했던 것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왜냐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된 결정적 증거는, 결국 육신에 난 상처 자국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의 육신을 그대로 가지고 마치 환생하듯 다시 사는 것인가를 가지고 논쟁을 하는 것도 이러한 모순적 상황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부활에 관하여 우리가 더 세심하게 관심두어야 할 부분이 따로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닫힌 문도 통과하는 신비로운 영의 세계나 육신의 환생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부활의 의미,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보고 믿었다는 사실이 결코 핵심이 아니라는 뜻을 암시해 주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도 보고 믿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몇번이나 반복해서 말씀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통해 우리가 더 깊이 깨달아야 할 핵심부분은 무엇일까요? 이를 알 수 있는 단서를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찾아와 하신 말씀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부활의 증거는 표징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듣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 22절을 보면,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시며,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어주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며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는 구절을 연상시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먼지처럼 덧없는 육신에 주님께서 진짜 생명을 불어 넣어주신 것이지요.비록 살아는 있어도 주님과 동떨어져 영적으로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당시 제자들의 상황을 그대로 묘사해 주는 말씀입니다.더이상 주님이 함께 하지 않으실 것이라며 부활의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공통된 모습도 결국은 생기를 잃어버린 마른 뼈와 같은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기쁜 소식은 바로 이들에게 전하는 생명의 호흡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해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말씀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사후를 한세기 가량 지난 시점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처럼 직접 예수님을 따르던 직계 제자나 동시대의 신앙인들과는 달리 이후의 세대는 신앙적으로 불신과 의문과 같은 도전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신앙의 열정을 지속시킬 만큼 부활에 대한 소망을 확실하게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눈으로 보던 때와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지요. 적어도 예수님을 보며 신앙생활했던 사람들처럼, 자신들도 눈에 보이는 확증을 얻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항상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부활 이후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어떻게 확신하며 신앙을 지속시켜 나갈 것인가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들에게 부활은 곧 주님의 임재 혹은 주님과의 동행하는 삶을 의미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비록 육신의 몸으로 함께 하지는 못해도 우리 안에 살아계시다는 확증만으로도 신앙의 중심을 지속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결국 주님이 내 안에 다시 사셔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얻는 것과 그 의미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활의 소망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신비한 현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해서 그 능력으로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부활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듣고 믿어지는 것이라 말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신비로운 현상 때문에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이 의미하는 바, 곧 주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그 믿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활에 대한 소망 보다는 불신과 의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인 도마는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다른 제자들에게 주님이 찾아가셔서 부활의 증거를 보이실때도, 도마는 그 현장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부활의 소식을 다른 동료들로부터 들은 셈입니다. 그러나 도대체 믿을 수 없었던 겁니다. 사람이 전하는 말가지고 판단을 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차라리 자신의 두 눈으로 손바닥에 난 예수님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난 창자국을 보고 만져 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제자들을 찾으신 뒤 8일이 지난 후에 다시 예수님이 그들에게로 가셨습니다. 이때는 도마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하지만 여전히 제자들의 상태는 예수께서 처음 방문 하셨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부활의 소망을 이야기하시며 그들을 세상으로 내보내신다고 했지만, 이들에게 아직까지 확신이 생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26절에서 문이 잠겨져 있었다는 부분은 단절되어 살아가는 그들의 고립된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정적으로도 그들은 여전히 철저하게 폐쇄된 모습이었던 겁니다. 아직도 부활에 대한 소망을 믿음으로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던 겁니다. 

이처럼 불안과 단절, 그리고 불확실의 상황 속에서 제자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자기방어 전략이 바로 의심입니다. 도마가 두 눈으로 확인한 뒤에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닫힌 문을 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두렵고 불안하니까 돌다리도 두드리는 심정으로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를 아셨던 예수님은 처음 방문하셨을 때처럼 도마에게- 사실은 의심을 가진 모든이에게- 자신의 상처난 몸을 직접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도마는 주님의 부활을 믿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는 조건적 믿음”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 복된 신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표징을 보고 나서 믿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본 것을 확인한 것이지, 진정한 신앙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주님의 상처가 그 자체로 믿음의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그 상처를 통해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를 향해 부어주시는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과 구속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이를 깨닫지 못하면 그저 육신의 흔적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지요. 부활의 소망은 눈에 보이고 또 만져보아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보여주는 사랑이 더이상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되기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를 복되게 하는 믿음은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내 안에 부활의 주님이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 우리를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켜주시리라는 지극한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을 받으라 하신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부활의 영으로 우리 가운데 늘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그래서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것이지요. 아무리 많은 표징을 보여주어도,이보다 더 큰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성령을 통해 얻는 믿음 만큼 강한 증거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결국 그 믿음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위대한 힘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