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虎口)와 대마(大馬)

요한일서 5:1-6   

요즘은 비속어가 되어서 사람들로부터 쉽게 속임을 당하는 이를 일컫는 말 가운데 ‘호구’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본래 문자적 의미는 호랑이의 입 또는 아가리라는 뜻인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용례는 사실 바둑 용어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바둑은 쉽게 생각하면 상대편의 돌을 자신의 돌로 둘러쌓아 이기는 게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상대편을 돌 세개로 둘러싸서 포위하고 있는 형국인데, 상대방이 그 안에 돌을 넣는 실수를 범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호랑이의 입 안으로 들어가 잡아 먹히는 형국과 같다하여 바둑에서는 호구라고 부른다는 겁니다. 

흔히 상대방으로부터 손쉬운 이용감이 되는 사람을 ‘호구’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놀음판처럼 이미 다 짜놓은 판에 아무 것도 모르고 끼어드는 사람들이 있는데,바로 그들이 호구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그것이 의도되었건 아니면 자연스러운 현상이건 간에 마치 짜맞추어진 각본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눈치 없이 아무 대책도 없는 상태에서 발을 들여 놓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속칭 호구가 생각보다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처럼 경쟁이 심화된 사회에서 교육을 받고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결국은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한 대책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세상이라는 바둑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호구가 되거나, 아니면 직접적으로 호구 취급을 받을 때는 기분 나쁜 것은 물론이고 커다란 상실감을 갖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호구 취급 받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식들도 악착같이 교육시키는 것 아닌가요?심지어 호구를 면하기 위해 다른 이를 호구 만들어도 좋다는 그린라이트를 주는 것이 우리 시대의 모습은 아니었나요?

그 결과 세상은 마치 지뢰밭 같은 곳이 되어 버린지 오래입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를 호구 만들어 승리하기 위해 매설해 놓은 지뢰가 세상을 이미 병들게 해 버렸다는 겁니다. 이제는 세상을 순진하게 사는 것도 호구 취급받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순수,순진, 순결과 같은 말이 더 이상 그대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순전한 사랑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조차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세상의 가치와는 구별되는 교회를 찾아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낙망하고 비관적으로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호랑이 굴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어딘가에 늘 있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되듯이, 호구인 줄 알았던 돌이 대마처럼 결코 패배를 모르는 큰 힘을 얻게 될 줄 누가 알겠습니까?비록 세상의 경쟁방식과 여건으로 보면 무모해 보일지라도, 묵묵히 삶의 원칙을 가지고 가는 대마가 결국 진정한 승리를 거두리라는 믿음을 거두기에는 아직 일러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통쾌하기 짝이 없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한은 본문 4절을 통해 세상을 이기는 법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바로 그 앞절에서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이길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바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을 현실 속에 그대로 적용해 보면, 현실성이 좀 떨어진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늘 승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을 세상살이와 분리해서, 세상과는 상관없이 신앙생활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만 보고 살면 된다는 현실 도피적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요한이 살았던 당시의 영지주의의 입장이 그와 같았습니다. 영지주의는 근본적으로 악한 세상을 인정하지 않고,오직 영의 세계만 강조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땅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관심을 두지 않고 회피하거나 배격하며 사는 신앙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바로 앞장인 4장 20절에서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라는 말을 한 바 있습니다. 한마디로 신앙은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왜곡이 되어 있어도 끝까지 대면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세상은 도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끌어안아야 할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순수한 신앙을 갖고 사는 것이 정글과 같은 세상을 살기에는 마냥 어리숙해서 늘 당하고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늘 가난하고 쉽게 당하며 사는 호구로 살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요한의 가르침은 믿음과 세상살이가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잘 믿는다고 세상 잘 사는 것이 아니고, 안 믿는다고 해서 못사는 것도 아닌 것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는 이야기 아닌가요?  

요한은 세상을 이기는 자의 모습을 바로 다음 구절인 5절에서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고백의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에게는 매우 당연해 보이는 말씀이지만, 당시 요한이 활동하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몸을 가진 이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에 대해서 요한은 이렇게 바꾸어 대답합니다. 오늘 본문 뒤의 구절인 5장 11절에서 요한은 그 증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는데, 그 생명이 바로 그 아들인 예수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는데 반해,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이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겁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지요? 특히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는 동의하기 어려운 동어반복같은 말씀입니다. 믿음을 고백한 여러분들도 이 말씀이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갖지 못하는 이들에게 “너희는 그러니까 생명을 얻을 수 없어”라고 한다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아 보입니다. 거꾸로 그들의 눈에는 이렇게 비칠 수도 있습니다.마치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 내가 권력자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으면, 내가 너를 책임져 줄게 라고 설득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말을 믿지 않고, 스스로 뭔가를 하려고 한다면 그 때부터 말 그대로 호구가 된다고 하면 믿기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 먼저 반발심부터 들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믿는 자에게 생명이 있다고 한 말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생명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 주어진 선물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주어진 생명의 가치를 점차 잃어버리고,수많은 호구들을 양산하는 문제를 낳고 말았습니다. 죄와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 모순된 고리를 끊은 역사적 사건이라고 보았습니다.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은 생명에 반하는 모든 죄와 모순의 고리를 끊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생명의 진리를 다시 재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요한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다르게 표현해 볼까요? 2천년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자신의 마음 속에 깊이 새긴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들입니다.흔히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난다고 하지요. 그건 바로 십자가의 부활이 지금 그 누구의 문제도 아닌 나의 문제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의 고난을 통해 내 마음이 아프고, 그의 부활을 통해 나도 다시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순간을 뜻하는 말입니다. 자식이 다치면 부모가 아프고, 자식이 잘되면 부모가 기뻐합니다. 분명 다른 존재인데, 마치 한몸을 이룬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갖게 되는 상태도 이와 같습니다. 마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처럼 한몸을 이루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그 때 어떤 믿음이, 또 어떤 소망이 생기는지 아십니까? 비록 세상이 나를 호구 만들어도 주안에 살면서 대마로 사는 믿음이 생겨납니다. 순진한 것이 세상의 걸림돌이 되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고 끝까지 선한 싸움을 다하고 살아갈 용기가 생겨납니다. 그리고 끝끝내는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이 바로 믿음 안에 있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