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요한복음 3:1-8

성경말씀의 일부를 읽으면서 큰 은혜를 받는다거나, 혹은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만큼의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언급한 웨슬리의 경험도 그렇고, 종교개혁의 주역인 루터의 개인적 체험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각자 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의 영향을 받은 말씀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에게도 삶의 변곡점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데 커다란 영향을 준 말씀이 있습니다.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 3장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미 여러 번 설교를 통해 이야기를 나눈 바 있는데, 오늘은 본문에 등장하는 한 사람에 관한 개인적 이야기로부터 말씀의 의미를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바로 니고데모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출신으로 유대의 최고 법정 기구인 산헤드린의 의원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유대의 최고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호의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던데 반해, 오늘 본문에 기술된 니고데모의 태도는 그들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이름은 십자가의 처형 이후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하여 장사를 지낸 인물로 다시 언급이 된 바 있습니다(요19:39-40). 요한복음 7장에서는 성전에서의 논쟁 이후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유대인들을 향해 그를 적극적으로 변호한 사람도 바로 니고데모였습니다. 분명 당시로서는 오해를 받을 만한 위험천만한 일이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의 직계 제자들도 하지 못한 일을 기꺼이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사건과 예수님의 장사를 지냈던 그 사이에 어떠한 일이 니고데모에게 있었는지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다만 그가 처음 예수를 만난 것으로 기록된 오늘의 이야기가 적어도 그에게는 삶의 변화를 체험하게 된 결정적인 순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추측만 가능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러한 추론이 그럴듯한 가설인지를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시작부터 흥미로운 질문을 갖게 합니다. 바로 사건의 시점 때문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은 때가 바로 늦은 밤이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예수님의'성전청결' 사건에 대해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분개하고 예수님에 대해 매우 악감정이 생겼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간 이유는 그의 질문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1-2절의 말씀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이유는 바로 그가 행한 표징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서 유대인들은 표징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는다고 말한 바 있듯이, 유대인들에게 표징은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구약의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의 신앙이 기적과 표징을 통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의 민족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출애굽 사건을 보아도, 처음부터 끝까지 기적과 표징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홍해를 가르고 불과 구름 기둥으로 나타나거나, 만나를 제공하는 모든 일들이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던 겁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보여지는 표징을 가지고 그들의 신앙을 확인하고자 했는지는 마태복음 12장 38절에서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노골적으로 표징을 보여달라고 요구한 말씀에서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과 성전에 그토록 집착을 했던 것도 사실은 그것이 보여지거나 만질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그만큼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확인하고 싶어했던 것이지요.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 속에서도 나타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눈에 보이거나 몸으로 증거할 수 있는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지요. 삶의 여러가지 문제들이 기도를 통해 해결 되었다거나, 갑자기 자연환경의 변화 속에서 기적처럼 놀라운 체험을 함으로써 자기 신앙에 대한 확증을 갖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물론 이러한 신앙적 태도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그러한 표징이 신앙의 전제조건이 되거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이는 마치 상대방이 나에게 무언가 보여줄 수 있는 보답이 있거나 원하는 것을 제시해 줄 때만 나도 다가갈 것이라는 조건적인 태도와 비슷합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외교적 전략일 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로는 문제가 없지만, 신앙의 태도로서는 부적절한 것이지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확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하나님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은 표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시 사는 중생(born again)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니고데모와 같이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세계관을 완전히 뒤집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을 수 있는 길은 믿고자 하는 대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쉽게 말해 사랑하는 사람을 믿고 사랑할 수 있는 길은 상대방이 나에게 그 증거를 보여주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가 믿을만한 행동을 보여주거나, 먼저 말을 걸어오면 나도 그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던 겁니다. 

반면 예수님의 말씀은 상대방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하나님이 표징으로 무언가를 보여주어서 믿는 신앙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과는 다른 변화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진정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내가 변화되지 아니하면 실제로 보여주신다 해도 왜곡되어 바라볼 수밖에 없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교회가 성장하여 교인 수도 늘고 그 결과 큰 예배당도 건축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결과론적으로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주신 축복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목적으로 혹은 이것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평가하려 든다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 자체가 신앙의 목적이 되어서도 안되지만, 그것이 우리 신앙을 나타내는 척도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작은 규모의 교회에서 신앙의 내적 성숙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잣대로 볼품 없는 규모가 오히려 하나님이 더 기쁘게 받으시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도 있는 법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하신 다시 사는 법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니고데모도 그 방법이 궁금했던 것이고요. 오죽하면 다시 어머니의 뱃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라 묻겠습니까? 여전히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혹 우리 자신도 신앙의 내적 변화 조차 무언가 또 다른 가시적 효과를 통해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뜨겁게 찬양을 하고 성경을 적어도 몇 번은 통독을 해야 다시 난 사람이라는 확신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요?그래서 마치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일처럼 상대방으로부터 반응이 얼마만큼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행동을 보여주거나,아니면 기꺼이 비싼 선물을 사줄 수 있을 만큼 스스로 넉넉하다고 여겨져야 만족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다시 살 수 있는 방법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바로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물로 새로워진다는 말씀은 이해하기가 성령에 의한 방법 보다는 좀 수월한 것 편입니다. 왜냐하면 세례의 예식을 떠올리면 쉽게 수긍이 가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성령입니다.물로 씻어서, 혹은 세례의 의식을 통해 사람이 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손쉬운 방법입니까?하지만 성령은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결과도 쉽게 눈에 띠는 것이 아니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증만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곤란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본문 7절과 8절 말씀을 통해 부연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을 바람에 비유한 것이었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정말 알듯 모를듯한 말씀을 하신 겁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비유인지 모르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 성령은 바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실제로 성령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프뉴마’나 히브리어 ‘루아하’는 모두가 바람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예수님 말씀대로 영이나 바람이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공통점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사람의 판단으로는 방향 조차 잡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바람과 영이라 생각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바람과 같은 존재가 사람이 새로 나는 것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씀인 걸까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윤동주의 <서시>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지금도 2월이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일본인들조차 그가 옥사한 후쿠오카의 한 공원에서 이 시를 우리말로 낭송한다고 할만큼 유명한 시입니다.

시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기를 갈망한다고 표현한 부분은 영원하면서도 순결한 내세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똑같은 마음일 겁니다. 신앙인들이라면 더더욱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되기를 소망하는 것은 한결같은 모습일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부끄러움을 아는 자라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잎새는 세상을 대표하는 하나의 존재를 가리키는 시적인 표현인데, 거기에 부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것은 결국 자기에게 부는 바람처럼 똑같이 반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아니라 작은 잎새에 부는 바람인데도 마치 자신에게 부는 바람처럼 어떠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공감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공감이라는 것은 함께 느낀다는 말입니다. 비록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불어 닥친 문제는 아닐지라도 이를 함께 공감할 수 있을 때, 시인은 비로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노래한 것이지요. 아마도 일본 땅에서 유학생활을 하고는 있지만,식민지 조국에서 고통 당하고 있을 동포들을 생각하며 아파해야 하는 자신의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 보입니다.

저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한 말씀을 시인의 표현대로 바꾸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을 갖지 않을 사람이라 정의내리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바람에 빗대어 설명하신 영이 임하여 거듭난 사람은 타인과 공감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반응할 수도 있는 사람,그래서 모든 죽어가는 것조차 사랑하는 사람인 것이지요. 우리는 이 지점에서 예수님의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커다란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그를 변호하며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하려 했던 니고데모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잎새에 부는 바람에도 괴로워 할 줄 아는 진정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는 거듭난 사람의 모습으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