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

사도행전2:1-4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영어로는 펜테코스트(Pentecost)라고하는데, 그어원은50일을의미하는헬라어에서유래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부활하신후50일이되는것을기념하는주일이라는뜻입니다. 이날을‘오순절’이라고도부르는데, 시기상으로만따지면성령강림절과오순절이일치하게된것은매우우연적이라할수있습니다. 오순절은 본래 처음 익은 곡식단을 하나님께 바치는 초실절 후 50일이 지난 날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를 표하는 유대의 축제 절기입니다. 

그런데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놀라운 일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유월절은 출애굽의 사건에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을 기념하는 날 아닙니까? 유대인들에게는 민족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날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교회에도 그 날은 유대의 민족사를 뛰어넘는 전 인류의 구원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어린양처럼 대신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것도 그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겁니다. 처음 익은 곡식단을 바치던 초실절도 유월절이 시작하고 셋째 날이니까 그 의미가 놀랍게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날로부터 50일이 지난 뒤 오순절, 곧 성령강림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50일이 지난 바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함으로써 이 땅에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해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고 따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교회를 통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거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기록한 성령 강림의 사건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이 주님을 체험하고,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갈 제자로서의 소명을 재확인하는 극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을 본문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을 맞이하여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바람이 불어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고 말이지요. 여기서 표현한 바람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단순한 바람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원어의 의미도 숨결이나 호흡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늘로부터 온 숨결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라는 것이지요.집안을 가득 채웠다고 하는데, 집안도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사람이 거주하는 집이라는 뜻만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 부분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호흡이 사람을 가득 채운 상황이라고 바꾸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이는 하나님의 생기로 가득 찬 생명력 있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위에 사람을 만드실 때도 그랬던 것처럼,이 땅에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세우시고 행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신 일이었습니다. 마른 뼈처럼 죽어가는 이 땅에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다시 일으켜 세우신 것이지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이제 이 땅에 그의 손발이 되어 일할 교회를 그렇게 세우신 겁니다.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생기로 가득찬 것처럼, 주님의 교회도 하나님의 생기로 충만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모습입니다. 4절에서는 이를 성령으로 충만한 모습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 땅의 교회와 성도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와 성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바로 뒤에 나오는 구절을 통해 어떤 이들은 불과 같이 뜨거운 모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령의 불을 받아서 막 타오르는 듯이 뜨거운 신앙의 상태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와 같은 놀라운 체험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 뒤에 언급된 방언의 사건은 서로 알 수 없는 지방의 말을 여하튼 알아 들었다는 것이 더 중요한 부분입니다.바벨탑의 사건이 서로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면, 성령강림절의 방언은 비록 다른 언어를 하지만 알아들었다는 것에 특징이 있습니다. 불통에서 소통의 장이 열린 것이지요.한마디로 성령강림의 역사는 모두를 하나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것이나,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엑스타시(ecstasy, 무아지경)를 체험하는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우리 감리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웨슬리의 회심 사건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은 웨슬리 회심주일이기도 합니다. 웨슬리가 진정으로 성령의 체험을 갖고 변화된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성령이 갈라지는 혀처럼 불길이 내려왔다는 본문 말씀을 형상화시켜 연합감리교회의 로고가 만들어졌지만, 정작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의 회심 사건은 그렇게 뜨거운 성령체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존 웨슬리는 18세기 영국 성공회의 매우 경건주의적인 신앙 전통 하에서 자라났습니다. 그의 어머니 수산나는 자녀들을 아주 엄격한 방식으로 양육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자녀들이 매를 두려워하고 부드럽게 울도록”하는 것이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갑니다. 그만큼 엄격하게 신앙교육을 시키고 생활규칙을 따르게 했다고 합니다. 웨슬리는 성장해서도 이와 같은 경건훈련에 열심을 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매주 이틀 금식을 하고, 하루 세시간을 기도와 성경말씀 묵상에 시간을 할애할 만큼 열정을 다했습니다. 오죽하면 사람들로부터 규칙주의자들(Methodist)이라는 비아냥을 들었겠습니까?

그런데 그의 신앙에 절대적인 도전이 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선교를 위해 미국 땅 조지아로 배를 타고 가던 중 만난 큰 풍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라 합니다. 마치 마가복음 4장에 나오는 풍랑을 만난 제자들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함께 모여서 찬양을 부르며 기도하는 모라비안들을 보자 그는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그 순간 웨슬리는 자신의 신앙에 뭔가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는 모라비안의 지도자로부터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성령의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 그리스도가 당신을 구원하신 것을 믿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심각한 좌절감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훌륭한 신학교육과 열정적인 신앙훈련을 받았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 속에서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인 1738년5월24일 저녁 존 웨슬리는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기도모임에서 누군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 그의 마음이 움직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순간을 웨슬리는 후에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갑자기 가슴이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경험(strangely warmed)이라고 말이지요.

이미 다 아는 내용이었지만, 자신의 내면이 진정으로 감동하는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자기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마음 가운데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회심의 체험을 한 것이지요. 이를 웨슬리는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체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회심의 뜻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말뜻 그대로 하면, 회심(回心, conversion)은 마음이 돌아서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앙적으로 적용하자면,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흔히 회개(悔改, repentance)가 의미하는 것처럼 삶의 방향을 바꾼 일회적인 상태와는 달리, 회심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첫눈에 반해 버리듯 전기가 짜릿하게 오는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여전히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모습에 견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그렇게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겁니다.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감동을 내면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말이지요. 그래서 어떤 조건 속에서도 항상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성령을 체험하고, 이를 삶 속에서 찬찬히 적용하며 사는 것입니다.너무 안달복달하는 것도 아니고, 주체하지 못해 타인을 힘들게 하지도 않는.무엇보다 주님이 나를 통해, 그리고 교회를 통해 일하신다는 믿음으로 오늘도 주어진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는 그런 신앙으로 말입니다. 

오늘날처럼 모든 것이 쉽게 달아올랐다가 쉽게 꺼져버리는 인스턴트식 신앙과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웨슬리의 회심처럼 우리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며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자리에서 스스로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상하리만큼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그런 회심의 감동이 여전히 여러분에게 일어나고 있는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