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조건

 

마가복음6:52-56

기독교를 흔히 사랑의 종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로 사랑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실제로 우리에게 명하신 주님의 계명도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사랑 이외에는 빚지지 말라고 가르칠 정도이니 말입니다(롬13:8). 

그런데 오늘날 그 사랑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만 쏙 빼어 놓고,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을 자기 편한 대로 사용하려는 경향이 많아진 게 사실입니다. 저는 결혼식 주례 설교를 할 때마다, 이를 명확하게 지적해 주곤 합니다. 한마디로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혼돈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다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감정이나 선호를 뜻하는 말입니다. 자기 마음에 든다거나 감정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사람들은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사랑은 자신의 감정 보다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배려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둘 간의 차이를 이렇게 표현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좋아한다는 건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행복해졌으면 하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로 인해 행복해 졌으면 하는 것입니다.”그리고 “좋아하면 욕심이 생기지만, 사랑하면 그 욕심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5장 46절에서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받는 대로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 할 때 십리도 갈 수 있고, 오른 뺨을 맞고도 왼 뺨을 대 줄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을 말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신 겁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을 떠올려 보면,쉽게 수긍이 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무 대가 없이 줄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을 말입니다. 

제가 오늘 이토록 사랑에 대해 강조하는 이유는 이 사랑이야말로 기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한마디로 기적을 가능하게 만드는 제일의 조건이라는 것이지요. 제가 언젠가 51대 49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일이 있습니다. 세상은 받는 대로 주는50대 50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덜 받고 하나 더 주거나, 받지 않아도 줄 수 있는 사랑으로 움직이는 곳이라고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바로 앞 구절에 기록된 오병이어의 기적은 적은 양으로 많은 사람을 먹인 것이 핵심이 아니라, 51대 49의 세상을 실현한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씀을 전한 일이 있습니다. 정말 사랑하면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인 정도가 아니라 먹지 않아도 배부른 기적을 낳을 수 있다고 한 말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바로 사랑에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이 사랑의 기적을 가능케 하는 또 다른 원동력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적의 또 다른 조건에 관한 이야기인 셈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랑을 통해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이 부분이 함께 충족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바꾸어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동양의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기 까지는 밖에서 쪼아주는 어미의 노력과 함께 안에서 껍데기를 벗고 나오려는 새끼의 노력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생명은 쌍방적인 소통의 결과라는 것이지요. 

또 다른 동양의 고사성어 중에, 음성상화(音聲相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음(音)은 내는 소리이고 성(聲)은 듣는 소리인데,서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우리가 제대로 들을 수 있지요. 하나님이 아무리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어도 듣는 귀, 다시 말해 열린 믿음이 없으면 떠도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는 사랑을 깨닫는 믿음이 없으면 그 어떠한 기적의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선물을 기쁜 마음으로 받을 수 있는 믿음이 함께 조화를 이룰 때 기적도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에는 아주 대조적인 두 부류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게네사렛이라고 하는 갈릴리 호숫가 지역에 사는 이름 모를 사람들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기적을 체험한 쪽은 제자들이 아니라 바로 개네사렛의 이름 모를 사람들이었다는 성서의 기록입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먼저 52절에 기록된 제자들의 상태는 이를 잘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바로 전 날 주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두 눈으로 똑바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마음이 무뎌져 있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 호수를 건너며 풍랑 속에서 예수님의 놀라운 모습을 보기까지 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은 무뎌져 있었던 것이지요. 한마디로 마음이 굳어져 닫힌 상태였다는 겁니다.

마음이 무뎌져 닫힌 상태라는 것은 음성이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 없는 조건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귀가 꼭 막혀서 어떠한 소리나 말씀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누가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주려 하는데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 받지 않거나 받아도 전혀 그 성의를 깨닫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그들은 전 날 예수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시며 목자 잃은 양 같아서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사건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불쌍히 여겼다는 말의 헬라어 어원이 장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뜻하는 단어에서 온 것이니,예수님의 애통한 마음을 곁에 있던 제자들도 모를 리 없었을 겁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에게 다가 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놀라서 마치 그 모습이 유령처럼 보였다고 하였습니다.오래 전 여름철 가족 휴가를 위해 동해의 해수욕장으로 놀러간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나 파도가 높던지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변가에서 파도 치는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건장한 십대 소년 하나가 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었습니다.수영하는 것을 봐서는 아마 웬만한 바다에서의 물놀이는 자신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파도 하나가 치더니 수영하는 그 소년을 덮쳐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수영에 아무리 자신있던 소년이라 할지라도 물 속에 잠겨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이를 지켜 보던 해변가는 이내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누가 좀 도와주라고 소리치며 발만 동동 구를 뿐, 누구도 감히 파도치는 바다에 뛰어 들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 누군가 옷을 그대로 걸친 채로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달려들어서 누구도 말릴 틈조차 없었습니다. 바로 그 소년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적처럼 큰 파도를 헤치고 들어가, 누구도 엄두도 못 낼 상황 속에서 결국 자신의 아들을 끌어안고 나왔습니다.이를 지켜 보던 모든 사람들이 기쁨과 안도의 함성을 지르던 그 순간이 여전히 또렷이 기억납니다. 그런데 제 기억 속에 더 분명하게 남은 모습은 바로 자식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급박한 순간에 달려 오던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말 그대로 혼비백산하여, 마치 유령처럼 보이던 그 모습을 말입니다. 

혹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바다 위를 건너오시던 예수님을 바라보고 유령인 줄 알았다고 한 그 말씀도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한 스승의 간절한 모습을 그리 묘사한 것은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제자들은 그런 주님의 진정한 사랑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잊어버린 것일까요?어쩌면 매순간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은혜를 경험하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그런 제자들의 무뎌진 마음과 같은 것은 아닐까요?

마가는 이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게네사렛의 이름 모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배에서 내리신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그가 어디에 계시든지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옷술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청합니다. 그 결과는 놀랍게도 손을 댄 모든 이의 병이 낳는 기적이었습니다. 혈루병에 걸린 여인에게 내가 너를 고친 것이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낳게 했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그들의 믿음이 결국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애타는 사랑을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를 향한 값없는 사랑이 믿음을 통해 기적을 만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를 일컬어 기적을 잃어버린 세대라고 말합니다. 기적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잊고 지낸 것은 아닌가요?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그 선물을 값없는 것으로 폄훼시켜 버린 것은 아닌가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무뎌져 하늘만 원망하며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기적의 조건은 위에서만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도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을 다시 바로 세워서, 기적을 만드는 이 시대의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