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스건

사무엘하11:1-15

그리스 신화에 보면 테티스라는 바다의 여신이 등장합니다. 테티스는 인간과 결혼해 아들을 낳습니다. 반신반인의 아들을 낳은 것이지요. 하지만 아들에 대해 한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인간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이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테티스는 신의 제왕인 제우스를 찾아가 자신의 아들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제우스는 아이를 스틱스라는 강물에 담그라고 말해줍니다. 테티스는 아이를 강으로 데리고 가서, 아이의 발목을 잡고 거꾸로 들어서 강물에 몸을 담급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는 그 어떠한 무기로도 죽일 수 없는 불사의 몸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엄마가 강물에 자신을 담글 때 잡았던 발목만큼은 여느 인간과 다름 없는 약점으로 남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급소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쯤 되면 이 아이의 이름이 무엇인지 눈치채신 분이 많으실 겁니다. 바로 아킬레스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의 급소가 된 발목 부분을 일컬어 아킬레스건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특정한 몸의 한 부분을 가리키는 말보다 이 말은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상처받는 아킬레스건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 강점이 되는 것이 자신에게는 감추고 싶은 가장 아픈 아킬레스건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지난 주 한국의 대표적 진보 정치인으로 알려진 한 국회의원이 불법 자금 수수 의혹을 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늘 약자의 편에서 정의로운 이야기를 하고, 정치인으로 깨끗하고 청렴한 이미지를 갖고 있던 스타 정치인의 죽음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사실 한국의 정치 시스템은 미국처럼 합법적으로 정치인이 후원금을 걷을 수 있는 길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법이냐 아니냐를 가리기가 매우 힘든 구조라고 합니다.그러다 보니 크지 않은 불법 정치후원금을 수수하는 것은 정치권에서 하나의 관행처럼 이루어진 부분이었다고 합니다.평소 정치권에서 행해지는 부정부패와 불투명한 검은 돈에 대해 엄격한 입장이었던 사람이었기에, 그가 느끼게 된 양심의 가책은 다른 어떤 정치인들보다 강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는 가릴 수 없는 아킬레스건이 되어서 결국 안타까운 죽음의 길에 이르게 만든 것이지요.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부분이 결국은 아킬레스건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 겁니다.

유대 왕조의 가장 으뜸가는 왕이요, 신앙적으로도 큰 모범이 되는 인물로 알려진 다윗에게도 그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안긴 아킬레스건과 같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것처럼, 그의 충성스런 부하 장수인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몰고 그의 아내인 밧세바를 탐한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미 다윗은 국가의 통수권자로서 필요한 많은 것을 얻은 상태였습니다.통일 왕국의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토록 바라던 하나님의 법궤까지 무사히 가지고 와 종교적인 정당성도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절대권력을 가진 왕으로 궁중에 수많은 여성들을 거느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의 유혹과 탐욕으로 인해 자신에게는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비록 보여지는 외적인 상황은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만큼 완벽하고 철저해 보였지만, 가려진 그의 탐욕은 아킬레스건이 되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나단을 보내 그를 강하게 질책하셨습니다.그리고 다윗은 밧세바로부터 얻은 아이를 잃는 아픔을 당하게 됩니다. 사무엘하12장16절 이하에는 아이를 잃기 전 아이를 살리기 위해 그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음식도 먹지 않고 씻지도 않은 채 통곡으로 기도하면서 구하였던 것이지요. 얼마나 그 모습이 애절했는지,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고자 찾아온 신하들조차 감히 말을 꺼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자신의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보인 다윗의 행동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들의 죽음에 관한 비보를 듣고 나서, 바로 일어나 몸을 정결히 한 뒤에 주님을 경배하고, 마치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것처럼 아무 동요 없이 일상의 모습으로 되돌아 왔던 겁니다. 놀랍게도 빠르게 다윗은 평상심을 되찾았습니다.그 이유를 묻는 신하들에게 다윗은 이제 모든 것이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그것은 자신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실망감 때문도 아니고, 냉철함을 보이려 했던 그의 인격적 성향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다윗은 이 모든 사건의 출발이 자신의 씻을 수 없는 과오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만 그것이 자신의 아들에게 전가되지 않기만을 간절하게 구했던 다윗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판단과 결과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을 치신 것에 대해서 곡해를 해서는 곤란합니다. 아버지가 범한 죄의 결과로 아들이 그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것은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누구의 죄 때문에 그런 어려움을 당해야 하는가 라는 제자들의 질문이 나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시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와는 반대로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또 다른 예로 들 수도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잘못은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한 것인데, 왜 애꿎은 아들 이스마엘이 모든 피해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결국 성서의 중요한 핵심은 누구의 죄인가를 보는 인과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우리의 신앙적 시선과 변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의 평상심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회피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찾게 된 자기 부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이상 자기 자신이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신앙의 회복이 이루어진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탐욕의 원인이었던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의 일을 행하고자 결단한 상황이었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는 이후 그가 걸었던 삶의 여정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아킬레스건과 같은 약점을 노출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이를 잘 보여주는 일례가 열왕기상1장4절에 나옵니다. 노회한 다윗에게 신하들은 젊은 처녀를 데려다가 잠자리를 함께 하도록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더이상 탐욕으로 인한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기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도 않을 만큼, 아킬레스건과 같던 죄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믿음으로 굳건한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뛰어난 왕으로 다윗의 이름을 칭송하는 데에는 단지 그가 정치적으로 공적을 많이 쌓아서 만이 아니라, 이처럼 주님과 늘 함께 하며 신실하고 의로운 삶을 살고자 변화했던 그의 과감한 선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과신하여 변화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극단적 자존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도 그를 믿고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도자에 대한 신뢰는 일에 대한 능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을 통해 드러나는 신앙의 모범이 지도자에 대한 신뢰를 갖게 만들어 줍니다.만일 그의 삶이 여전히 아킬레스건을 지닌 불안하고 흔들리는 모습으로 계속해서 보여졌다면, 아마도 오늘날 알고 있는 다윗에 대한 신뢰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의 신뢰는 다윗 자체가 아니라 그가 날마다 함께 하기를 소망하며 따르고자 했던 주님이 그와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셈입니다.

말씀을 시작하면서 이야기한 아킬레스에 관한 신화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아킬레스가 몸을 담갔다는 ‘스틱스’ 강에 관한 전설입니다. 왜 그 강에 들어가면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을 얻는다고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을까요? 물론 허구적인 신화의 내용이기는 하지만,그 강이 바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되는 강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자주 비유되는 요단강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 고대 헬라 문명의 사람들은 인간을 가장 강하게 할 수 있는 공간은 바로 생과 사의 경계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죽음 앞에 이를 때 강한 생명의 힘이 나타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말에도 “죽을 힘을 다해 살라”는 역설적 표현이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만큼 인간을 강하게 만드는 것도 없습니다. 반면 무작정 죽음을 거부하고 회피하는 순간, 인간은 끊임없이 공포와 두려움에 빠져서 연약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어디에 마음을 두느냐에 따라 인간은 가장 강해질 수도 있고, 반면에 아킬레스건처럼 가장 연약한 모습을 가질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점은 테티스가 아들을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을 갖게 하려고 강에 담그면서도,혹 빠지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으로 꼭 잡았던 그 부분만이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의 가장 연약한 약점으로 남았다는 사실입니다.완전히 믿고 맡기지 못한 결과인 것이지요.

요단강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단강은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장소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세례의 행위는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통해 옛사람은 죽고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체험하는 의식입니다.곧 강물에 몸을 맡기며 나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면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이 바로 주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마음으로 온전히 주님께 맡기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무언가를 하려하면, 그때 우리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아킬레스건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선의조차 하나님 앞에 맡기지 않으면 결국 뼈아픈 아킬레스건처럼 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청렴한 정치인조차 무너지게 만들만큼 말이지요.

반면 다윗이 우리에게 보여준 삶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무엇이 우리의 선택이 되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자기 자신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의 선택을 행하는 현명한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를 연약하게 만드는 삶의 아킬레스건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기쁨과 축복이 여러분에게 주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