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의 기적

요한복음6:53-58

요한이전하는예수님의말씀은바로생명의빵인자신의육신과피를먹을때, 영원한생명을얻을수  있다는메시지로요약할수있습니다. 성서일과에의해말씀을전하다보니, 오늘까지연속해서3주동안똑같은내용을전하는것같은느낌이듭니다. 두주전에는생명의빵과썩어없어질빵을구별하면서성만찬의의미를함께나누었습니다. 지난주에는생명의빵이가진특징을전하면서, 그빵을먹기위한방법이무엇인가하는것을믿음이라는관점에서살펴보았습니다. 오늘도생명의빵에대한강조는지난두주와크게달라진것은없습니다. 다만56절에서언급된것처럼생명의빵이신그리스도예수의‘살을먹고그피를마시는사람은내안에있고, 나도그안에있다’는말씀에집중하여그의미를여러분과함께나누어보고자합니다.

먼저53절의말씀에대한질문으로부터시작하려고합니다. 예수님의말씀은‘인자의살을먹지아니하고그피를마시지아니하면너희속에생명이없다’고하셨습니다. 왜예수께서는인자의살과피를먹어야만생명이있다고말씀하신걸까요? 우리가배우기로는하나님의말씀으로세상을창조하셨고, 사람은흙으로빚으신뒤에코에생기를불어넣어주셔서살아있는영적인존재가된것이아니었던가요? 그런데하나님의아들, 곧인자인예수님은왜자신의살과피를통해서만생명이있다고말씀하신걸까요?

사실53절을보면, 이말씀을통해예수님은생명에대한새로운정의를내리고있다는것을알수있습니다. 곧, 생명은인자의살과피를먹었는가, 그여부에달린문제라는것이지요. 예수님의생명에대한정의를그대로따르면, 지금우리가살고있는것은우리가이미그리스도의살을먹고피를마셨기때문이라고볼수있습니다. 생명의빵이신그리스도를취했기때문에살고있다는것이지요. 물론이것은이미두주동안이야기한대로영적인생명에대한이야기입니다. 지구라는이땅덩어리위에는지금도그리스도를받아들이지않고서살아가는수많은사람들이존재하고있습니다. 육의존재로는분명히생명의빵이없이도살아갈수있다는말입니다. 그러니까예수께서생명의빵을취해서살수있다고정의내리신생명은말그대로영적인생명을뜻하는말씀이었다는사실을알수있습니다.

여기서우리는생명에대한예수님의정의와관련해서흥미로운사실을하나발견하게됩니다. 하나님은인간을만드시면서자신의생기를불어넣어주셨습니다. 그것은바로하나님의숨이었습니다. 흙으로빚은육체가있어도, 그숨이없으면인간은살수가없습니다. 숨이들고나는반복적인과정이멈추어버리는순간, 인간은육체가있어도생명을잃어버린존재가되어버리는것이지요. 결국우리몸은하나님의‘숨’을먹고마시며산다는뜻입니다. 예수께서자신의살과피를먹고마시라하신것을그대로하나님의말씀에대입해보면, 결국인자의살과피가하나님의숨과같은뜻으로하신말씀이라는결론을얻게됩니다. 생명의빵이바로하나님의숨이었다는말씀입니다. 요한은이미예수를하나님의말씀이육신이되어온분이라고소개한바있습니다(요1:14). 또생명을빛이라하면서, 예수님을참빛으로표현하기도했습니다. 55절에서예수님의살과피를참양식과참음료로선포한것처럼말입니다. 그러니생명의빵을하나님의숨이보이고만질수있는형태로주어진것이라한들큰문제는없을지도모르겠습니다. 하나의비유적표현으로보면말이지요.

하지만예수께서자신의살과피를통해살수있다고하신말씀은단순히비유적표현에그치는말씀이아니었습니다. 실제로삶의궁극적인목적이무엇이되어야하는지를분명하게제시하고자했다는뜻입니다. 밥을먹으면밥으로말미암아살아가듯이, 예수님의살과피를먹고마시면예수님으로말미암아살아갈수있어야합니다. 57절에서예수님은“내가아버지때문에사는것과같이너희도나로인해살것”이라고하셨는데, 같은뜻으로이해할수있는말씀입니다. 예수께서육신의몸을입고이땅가운데사신것은오직하나님의뜻이었습니다. 그래서아버지의말씀으로세상을사신것이라하신겁니다. 그러니그리스도의자녀들도이제예수님이가르쳐주신하늘의말씀을따라살아가라고명령하신것이지요. 우리의몸이밥을먹고생명을유지하지만, 궁극적으로숨이끊어지면아무소용이없는것처럼, 예수님으로말미암아사는것이얼마나중요한가를강조하신말씀이었던겁니다.

그렇게될때비로소‘너희가내안에, 너가너희안에있는” 상태가될수있다는것입니다. 사실자주듣는말이기는한데어쩐지어색하기도하고참오묘한느낌을갖게만드는말씀이아닐수없습니다. 물론주님과하나가되는상태라고이론적으로정의내릴수있습니다. 그러나주님과하나가된다는것은오해를낳을수있을뿐만아니라(자기가하나님이되었다는착각), 구체적으로하나가되는상태를어떻게실현할수있을지에대해서는말하기가쉽지않기때문입니다. 그래서이구절을보다현실적으로이해하는데도움이될만한철학개념하나를소개하려고합니다. 프랑스철학자인가브리엘마르셀의‘상호주관적매듭’이라는개념입니다. 그에따르면세상은나와나아닌그무엇으로이루어져있습니다. 그무엇은나와상관없이도그냥있는모든것들을통칭하는말입니다. 내가알든모르든간에원래거기있던모든것들말입니다. 적어도그무엇이나에게의미있는2인칭의“너”가되기까지는말이지요. 

만일세상에‘너’라는존재가없다고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궁전같은곳에아름다운장식과고급의가구들이즐비하더라도, 사람은아마얼마의시간이지나면무료해지고, 또다시흥미를잃어버리고고독감을느끼게될가능성이높습니다. 사람들사이에있더라도마찬가지이지요. 아무리주변에사람이많아도, 내게의미있는“너”가없으면섬에갇혀사는것과다를바없는생활을하게됩니다. 말그대로혼자사는삶인것이지요. 이것은반대로나도누군가에게거기그냥존재하는그무엇과같은3자일수있다는사실을말해줍니다. 그래서마르셀은사랑이가능해지는순간은제3자로존재하는그무엇이바로‘너’가될수있을때라고말합니다. 그것도어느한쪽만이아니라양쪽모두서로에게‘너’가되는순간을말이지요.

이를잘보여주는징표로포옹을예로들수있습니다. 포옹을하면내가다른사람을안는것같지만, 동시에나역시다른사람에게안기는행위입니다. 악수할때도그렇지요. 악수는내가다른사람의손을잡는것이지만동시에내손이다른사람의손에잡히는행위이기도합니다. 그래서김남조라는시인은아예“그대가있음에내가있네”라고시를쓰기도했습니다. 포옹을내가먼저다가가했어도, 결국내가안을수있는그사람이있기에나도안길수있게되었다는의미인것이지요. 이것을예수님이하신말씀에적용해서생각해보겠습니다. 생명의빵을먹음으로주님이우리안에, 우리가주님안에거하게되었다는말씀은이제서로에게나와너의관계가되었다는것을의미합니다. 아무의미도없는것이아니라내게소중한존재가되었다는뜻이지요.

그런데예수님과의관계가특별한이유가있습니다. 그것은주님과“나와너”라고하는상호주관적매듭으로엮인사랑의관계가어떻게해서가능할수있었는가하는점입니다. 바로54절에하신말씀처럼아무연관도없던“그”를살리셔서“너”로만들어주신다는것이그핵심입니다. 예수님께의미있는“너”라는존재가될수있었던것은그를살리기위해서였다는것이지요. 반대로사람들도그리스도의살을먹고피를마심으로써, 이제그리스도를그무엇이아닌나를살리신구주로받아들이게된관계를만든겁니다. 

흥미로운사실은살린다는말의우리말명사형인‘살림’이이관계를잘나타내준다는것이지요. 살림은말그대로죽어있는것들에생명을부여하는일체의행위입니다. 예전에는가정주부들이집에서살림한다고말을한적이있습니다. 집안에있는모든것들을살려내는기적을주부들이했던겁니다. 죽은가구를닦아서보기좋은장식품으로살려내기도하고, 생명력을잃어버린채소며과일을먹을수있도록조리해서살려내고, 말안듣는아이들잘타일러서사람답게클수있도록양육해서살려내며, 세상살이에지쳐서죽어가는남편들다독여서밖에서사람구실잘할수있도록살리는일. 그살림을엄마들이해낸것이지요. 그런데엄마들이그렇게살려놓은것들을우리말로‘살림살이’라고했습니다. 

예컨대, 가재도구같은것을우리는살림살이라고하고결혼할때살림살이장만한다고말하기도했습니다. 그런데살림살이는생명이없는것이죠. 다만엄마의손길이닿을때생명을얻는것입니다. 다르게표현하면엄마의숨이거기에머무를때살아나는것이라할수있습니다. 살림을통해생명을주는것이지요. 예수님이우리에게행하신일이바로이와같습니다. 죽은살림살이같던세상의그무엇에불과한우리를, 생명의숨을불어넣어주셔서살리신것입니다. 그래서우리를안아주심으로내가너희안에, 그리고너희가내안에함께하는듯한생명의기쁨을주신것이지요. 이것이바로생명의빵을통해주시는놀라운살림의기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