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꺼기를 버리고

마가복음 8: 27-30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라는 지역을 지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매우 난감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당시 그의 행적과 말씀에 대해 들어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물론 그것은 자신의 명성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질문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목적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그들에게 한가지 도전이 되는 질문을 던지고자 하셨던 것이지요.

 보이는 대로 보는 것과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보는가?’ 하는 질문은 결국 보이는 모습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제자들에게 직접 질문하신 부분은 그들이 보는 시선에 대해 묻는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시선의 기준이 다른 것이지요.내가 보는 것인지 아니면 타인의 눈을 빌어서 보는 것인지의 차이라는 겁니다.

 첫번째 질문에 대해 제자들은“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혹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 이라고 대답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그대로 전한 것이지요. 당시의 유대 사회를 배경으로 생각해 보면, 그다지 나쁜 평판은 아닙니다. 오히려 최고의 영적 지도자라는 칭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여전히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평가하는 시선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으로까지 이어지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한마디로 예수님을 바라보던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뛰어난 영적 스승의 지위로만 보였을 뿐이었습니다.

 반면 제자 중의 하나인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리스도”라고 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라고 고백한 겁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비친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보았던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자기가 본 주님의 모습을 이야기한 것이지요.비슷한 고백을 사도 바울도 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 새 삶을 얻은 뒤 그는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5:17).”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존재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무엇이 변화되었다는 것일까요?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살기를 띠고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향해 가던 바울이 주님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 환한 빛에 잠시 눈을 잃었다가,하나님이 보내신 아나니아라고 하는 제자의 안수를 받고 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며 시력을 회복했다고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주님을 만난 뒤, 그에게 나타난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를 바로 시선의 변화에서 찾은 것이지요.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된 새로운 시선의 변화. 그것을 바울은 스스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에 비유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물으시는 질문, 곧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대답하시려고 합니까?지금은 그 때와는 세상이 사뭇 달라졌으니, 다른 유명한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을 비교하려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오랫동안 교회 생활 하면서 여러 이야기들을 들었으니, 근사한 다른 표현들을 찾으려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바로 여러분의 시선입니다.여러분이 보는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 결국은 자신의 신앙고백이자, 여러분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기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해 의외로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대부분의 한국 장년층들은 이런 주관식 질문에 익숙하지 않아서,자기 생각을 명확히 표현하기를 꺼려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기준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얼마 전 한 책을 읽다가 거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오래 전 우리나라의 의학박사 한 분이 세계 최초로 B형 간염 백신을 개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상용화시키는 데에는 미국과 프랑스 다음으로 밀렸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백신을 다 만들어놓고도 우리나라 주무부서인 보건사회부의 허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허가를 줄 인증 기준이 우리나라에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정말 한국 관료사회는 못말린다고 늦은 대처에 실망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늘 외부에서 기준을 가지고 와서 우리의 실정에 맞게 적용하는 것에만 익숙했던 상황에서, 우리만의 기준을 만든다는 것이 간단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사회의 많은 부분들에서 그런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학문의 영역에서도 외국에 나가 훌륭한 이론이나 연구들을 배우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걸 우리의 것으로 새롭게 만드는 것에는 익숙해 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종종 제기되곤 합니다. 적용은 하는데, 우리의 고유한 이론적 기준을 만드는 것은 왠지 주저한다는 것이지요.

 미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광경 가운데 하나가 똑같은 옷 차림새입니다. 저는 지금 20년 가까이 이 지역에서만 살고 있는데, 여태 저와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멋있어 보이지 않아서도 그렇겠지만, 누구를 따라할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의 패션에 대한 기준이 다 있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한국을 보면 특정한 브랜드의 제품이 하나 유행했다 하면 온 국민의 유니폼이 될 정도로 빠르게 보급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만큼 단결도 잘한다고 이런 성향들이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남들과 비교하여 자기 자신을 비하하거나 자기만의 길을 가지 못한다면 그만큼 큰 사회적 손실도 없을 겁니다. 이런 풍토에서 자기만의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고전인 <장자> “천도편”에 보면 윤편이라고 하는 수레바퀴를 만드는 사람과 제나라 왕인 환공의 이야기가 나옵니다.어느날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던 윤편이 환공에게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며 질문합니다. 그러자 환공이 성인의 책을 읽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다시 윤편이 묻습니다. “그 성인이 지금도 살아있습니까?” 환공이 이미 돌아가신 분이라고 대답을 하자, 바로 윤편이 대답하지요. “그렇다면 왕께서 지금 읽고 계신 책은 성인들이 남긴 찌꺼기일 뿐입니다”라고 말합니다.찌꺼기라고 말한 이유에 대해 윤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규격이나 치수가 정확하지 않던 시기라 수레바퀴를 만들 때 축에 깎아서 끼우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느슨해도 안되고 너무 빡빡해도 안되니, 더도 덜도 말고 적당히 깍아서 맞추어야만 했습니다.그러니 믿을 것은 자신의 손 감각 말고는 없어서 누구에게도 말로는 전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여러가지를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왕이 읽고 있던 성인의 말이라는 것. 그건 분명 인생에 참 중요한 기준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지금 내게도 반드시 그러해야 하는 기준이라고 한다면 그건 아니라는 것이지요.그래서 찌꺼기라고 불렀던 겁니다. 사실 찌꺼기는 한자어로 “조백(糟魄)”이라고 해서 술 찌꺼기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그러니까 먹으면 술맛이 나긴 해도 진짜 술은 아닌 것을 일컫는 말인 셈입니다. 결국 윤편이 왕에게 성인의 글이 찌꺼기라고 한 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읽으며 마치 자기가 성인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에 대한 일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것을 마치 자기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현대 사회에 커다란 반향이 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나가서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던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에 도전을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혹여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또 신앙생활하면서 여러가지 듣고 한 것을 통해 마치 진짜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보라는 겁니다. 어쩌면 시선의 변화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찌꺼기를 진짜처럼 착각하고 따르던 신앙은 아니었는지요?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면서 진짜 제자라도 된 것 같아서, 자신은 고고하고 거룩한 성도가 되어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비난의 잣대를 들이대던 모습은 아니었던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물어 보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 기준은 세상이 가르쳐 준 기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말한 그대로 따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시선을 통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찌꺼기를 진짜로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해 검증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물으시는 진짜 질문의 의도는 바로 우리 자신의 삶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따라서 내 삶의 기준이 진정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고백을 행할 수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시선의 변화를 통해 날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