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곡과 쭉정이

누가복음3:7-17

 

탈무드를보면, 선과악에관련하여흥미로운이야기하나가나옵니다. 노아가하나님의명령에따라방주를다만들고모든동물의한쌍씩을태우려합니다. 그때“선”이라고하는녀석이혼자타려고들어오자노아가다른한쌍을마저데려오라고일러줍니다. 그래서자기의짝을찾아다니던‘선’은결국자기와전혀다른‘악’을데리고방주에들어가게됩니다. 이것이바로세상에‘선’과‘악’이공존하게된이유라고이야기는전합니다.

 

물론궁극적인선과악은외적으로는정반대의성향을가진다른무언가처럼보입니다. 그래서우리는좋은사람이있는것처럼나쁜사람도있을것이라생각을합니다. 그런데날때부터좋은사람이정해져있는것이아니듯이나쁜사람도처음부터그렇다고말하기는어렵습니다. 오히려탈무드의이야기처럼선과악은언제나공존하고있다고해도과언이아닙니다. 누구나선한면과악한면을동시에가질수있고, 과거에악했다고해서지금이나앞으로도그럴것이라는보장이없는법입니다.

 

로버트루이스스티븐슨의단편소설인“지킬박사와하이드”처럼, 사실한인간안에선과악의이중성이모두나타나고있다해도틀리지않습니다. 다만어떤성향이더강하게드러나는가의차이만있을뿐이라는것이지요. 그래서어쩌면인간은끊임없이내적갈등과싸움을해야만하는지도모릅니다. 우리가신앙을가지고산다는것도그런면에서늘그리스도의능력과복음안에서선으로승리하기위한투쟁의결과라고할수있습니다. 의의면류관을쓰기위해벌이는선한싸움을말이지요.

 

요한이장차오실그리스도를소개하는대목에서, 그리스도는알곡을곳간에모아들이지만쭉정이는불에태우실것이라고하는부분도마찬가지의맥락에서이해할필요가있습니다. 개인의문제로만놓고본다면, 알곡과쭉정이가따로있는것이아닐수도있다는뜻입니다. 물론세상이라는전체의관점에서보면, 좋은사람과나쁜사람을구별하여심판하는이야기로설명할수있습니다. 그러나다른한편으로한사람의내면에적용시켜보면, 우리모두가가진이중적본성중에서악한것은버리시고선한것을취하신다는말에가깝다는것이지요.  

 

단지쭉정이같은악한사람만을골라서불에태우는이야기라면, 지옥불에던져질심판만을떠올리면그만입니다. 무서운이야기이지요. 그래서주님이오시는날이기다려지기보다는두렵고떨리는것이사실입니다. 자신이쭉정이인지알곡인지도대체알수가없어서말이지요. 그런데하나님은청천병력과같은말을이미우리에게하신바있습니다. 우리모두는다죄인이라고말입니다. 쉽게말해선과악으로만놓고본다면, 그누구도자신을완전히선하다고자신할사람이없다는뜻입니다. 그래서기독교를성악설로분류하기도하지요. 그렇다면결국우리는모두가쭉정이라는이야기아닌가요?

 

그래서하나님은쭉정이같은우리를구원하시려고자신의독생자그리스도예수를보내어주셨습니다.  알곡으로삼기위해서말입니다. 그러니까이말은쭉정이같던이도알곡이될수있는길이열렸다는뜻으로이해할수있는대목입니다. 운명적으로쭉정이와알곡이결정된것이아니라언제나변화될수있다는의미라는것이지요. 물론그것은쉬운일이아닙니다. 요한도자신의한계를분명하게알고있었습니다. 자기가행할수있는것은물로세례를주는의식일뿐이라는것을확실히지적합니다. 물로깨끗하게할수는있겠지만, 적어도쭉정이를알곡으로변화시키는일은행할수없다는것이지요. 그것은장차오실그리스도를통해행해질성령과불의세례로써만가능해질것이라고이야기합니다. 

 

그런맥락에서요한이강조하려고한것은심판에대한경고이전에, 누구나그리스도의능력안에서쭉정이가알곡으로변화될수있는길을알려주고자한것으로이해해볼수있습니다. 쭉정이같은삶을살던자가그리스도로말미암아완전히변화된새생명으로다시사는길이열린것이지요. 그리스도안에서쭉정이같던옛사람은죽고새로운피조물로거듭나는역사가이루어진다는것입니다(고후5:17).

 

누가는이를‘회개의세례’라는말로표현하고있습니다. 실제로본문8절에서요한은회개에합당한열매를맺으라고말합니다. 이는삶에서의실제적인변화, 곧쭉정이가알곡이되는변화를권면하는말씀입니다. 특히당시아브라함의자손이라는사실만으로안주하며살던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강력한메시지가아닐수없었습니다. 하나님은돌들로도아브라함의자손이되게하실수있으니, 착각하지말라는것이지요. 유대인의피를물려받아서타고나면서부터알곡이라생각했다면오해라는뜻입니다. 쭉정이인지알곡인지는복음의능력안에서변화되는것을통해알수있기때문이라는겁니다. 그러니까둘을가르는키질은본래부터쭉정이었던자와알곡이었던자를구별해내기위한것이아니라, 실제적인삶의변화를통해새로운피조물이되었는지를구별하기위한것이라고할수있습니다.

 

그러자이를듣고있던사람들이요한에게묻지요. “그러면무엇을해야하느냐? (10)”고말입니다. 알곡, 곧그리스도안에서새로운피조물이되기위해어떻게해야하는가를질문한것입니다. 이에대해요한은사람들마다제각각처한상황에따라맞춤형답변을제공합니다. 다만한가지공통점이있다면, 메시지가당시유대사회의기득권을가진이들을향한것이었다는점입니다. 첫째는남보다더소유한이들에게자신이가진여유분을그렇지못한사람들과나누라는가르침입니다. 둘째는당시식민지유대사회에서원성을가장많이들었던세리들에게던지는메시지입니다. 세금을정당하게징수하여부정한이익을취득하거나힘없는이들을착취하지말라는겁니다. 셋째는군인에게무력으로남을억압하거나재산을강탈하지말라는메시지를전합니다. 한마디로공권력을남용하지말라는뜻입니다.

 

흥미로운사실은요한이대답한변화의핵심이다한결같이개인의내적변화라기보다는사회적변화를이야기하고있다는점입니다. 알곡이되는과정을단순히개인의변화로만보지않았다는것이지요. 물론개인의변화가없는세상의변화를상상하기어렵습니다. 그래서복음의말씀도각사람이회개하며영적인변화를위해항상깨어있으라고권면한것아닙니까? 하지만예수님의말씀처럼복음은개인의변화만을이야기하지않습니다. 그리스도의몸된교회로세상을비유해본다면, 개인은전체와뗄수없는유기적인관계속에있습니다. 따라서나만의변화가아니라우리모두가변화되지않고서는진정한알곡을맺기어렵다는것이지요. 손가락하나만아파도내가아픈것처럼, 전체가하나의알곡을맺기위해서는개인과전체가더불어함께갈수밖에없다는겁니다. 

 

웨슬리도사회적종교가아닌종교가없고, 성결은오직사회적성결만이있을뿐이라고주장한바있습니다. 모든문제의근원을개인의문제로돌리지않은것이지요. 예컨대, 근대이전사회에서는가난으로인한삶의불행을개인의문제로돌렸습니다. 나태하고게을러서, 혹은천성이글러먹어서그렇다는식의생각이지배적이었습니다. 물론개인의문제도짚고넘어가야할부분인것은분명합니다. 그러나과연개인만이모든문제의근원이라말할수있을까요? 웨슬리뿐만아니라오늘날많은철학자나사회학자들은그렇지않다고말합니다. 왜냐하면인간은사회안에살면서대부분의의식과행동을사회로부터영향받고있기때문입니다. 우리가행동하고생각하는대부분이자기것같지만사실은사회적으로만들어진것이라는이야기입니다.   

 

비록사람들마다개인적차이는있겠지만, 어떤한사회에소속된구성원들은그사회의구조적성향에영향을받기마련입니다. 그래서개인의변화만으로는온전한변화를이루기어렵습니다. 예컨대, 학교교육이문제라고해서자기혼자만벗어나려고한다면그것은변화가아닌일탈로간주될가능성이높습니다. 만일잘못된것이있다면, 그구조적문제를고치지않고는진정한변화를맞이하기어려운것이지요.

 

요한이살던당시유대사회의상황도크게다르지않았던것으로보입니다. 하나님의말씀인율법의그늘아래살고있었지만, 기득권을가진이들의생각이나행태는크게달라지지않았던것이지요. 율법은존중하면서도, 자기들에게유리한방식으로만이해하고적용하려한결과, 사회의여러가지부조리한문제들이나타날수밖에없었던겁니다.

 

쭉정이에서알곡으로변화되기위해무엇을해야하느냐고묻는사람들에게요한이사회적성결에가까운대답을한까닭이바로여기에있습니다. 세상이변화되어야한다는것이지요. 그리고세상을바꾸기위해서는바로여러분각자가변화의시작이되어야한다는것입니다. 사람이변화된것을어떻게알수있나요? 혼자속으로다짐하고결단하는것으로증명될수는없는법입니다. 세상을통해증거되어야하는것이지요. 그래서알곡은저절로맺어지는것이아니라알곡을맺기위한수고의결실이라는겁니다. 그리스도안에서새로운피조물이되어하나님나라의알곡을함께만들어가는것이지요.

 

이를위해서는성령의불세례를받아야합니다. 뜨겁게소리지르며기도하라는뜻이아닙니다. 불로타버리면질적으로완전히다른변화가일어나듯이, 새로운피조물로거듭나는것입니다. 신학자인폴틸리히의말을빌자면, “새로운존재(new being)”가되는것이지요. 알곡은바로이런상태를두고하는말입니다. 그것은물로세례를받아서될일이아닙니다. 여러분이진짜알곡이되었다는것은세례교인이라는사실로증명될수없습니다. 교회의제적부가여러분이알곡인지를구별해주는키질이결코될수없습니다. 오늘요한의가르침대로세상을변화시키기위해자기의유익과편리만을추구했던쭉정이와같은껍데기를그리스도의말씀안에서벗어버릴때, 비로소진정한알곡이될수있습니다. 

 

이제우리는세상이라는타작마당을정리하기위해키를들고오실그리스도를기다리고있습니다. 여러분은어떤모습으로그분을맞이하고싶으신가요? 알곡? 아니면쭉정이? 지금우리앞에쭉정이처럼놓여진세상을함께조금씩변화시켜나가지않으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