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중도원(任重道遠)

누가복음 2:41-52

 

우리 옛말에 “될성부를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흔히 크게 될 인물은 어릴 때부터 다르다고 말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사람을 가리킬 때만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할 때도, 그 처음을 보면 나중의 결과를 알 수 있다는 식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물론 ‘역변’이라고 해서 처음과는 다르게 나쁜 결과로 나타나는 사례도 있겠지요. 그러니까 시작이 그 끝까지 완벽하게 보장해 준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다만 처음의 출발이 나중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2018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도 올 한해를 되돌아 보며 과연 처음의 결단이나 생각처럼 그 끝 마무리를 잘 매듭짓고 있는가 생각해 보는 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교회에 파송된 이후로 매년 마지막 주일 예배의 설교 제목은 한국의 교수신문이 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를 차용해 말씀을 전해 왔습니다. 매해마다 교수신문은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들에게 설문조사를 하여 사자성어를 선정하고 발표하는데, 올해는 ‘임중도원(任重道遠)’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고 합니다. ‘임중도원’은 중국고전인 『논어(論語)』의 태백편(泰伯篇)에 실린 고사성어로,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의 사자성어입니다.

 

그런데 그 뜻이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짐이 무거운 까닭은 바로 인(仁),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을 마음의 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처럼 무거운 짐이 또 있겠냐는 것이지요.그래서 그 무거운 짐을 평생 짊어지고 내려놓을 수 없기에 멀게 느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에게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있는 일종의 사명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제자가 되기 위해 져야 할 십자가의 소명에 견줄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룩한 책임감처럼 의의 면류관 쓰는 그날까지 선한 싸움을 다하는 모습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사실2018년 한해를 마무리하는 사자성어로 지성인들이 이 말을 꼽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바로 한반도의 평화가 성공적으로 완수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지난4월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을 시작으로 올해에만 세 차례 남북 정상이 만나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이는 지난 70여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전쟁과 폭력, 갈등과 분단으로 상처받은 한민족이 걸어온 무겁고도 기나긴 길에 종지부를 찍고 평화의 길로 나가기 위한 노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반도 평화의 길은 멀고도 험한 여정입니다. 넘어야 할 장벽과 숱한 어려움이 남아 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평화를 향한 굳은 의지를 지켜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평화를 향한 민족의 열망이 무겁고 기나긴 여정처럼 보이지만, 어떠한 장애에도 굽히지 않고 실현시켜 나가자는 뜻에서 한국의 지성인들은 임중도원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했다는 겁니다.


임중도원이 선택된 또 다른 이유는 오랫동안 한국사회를 짓눌러온 폐단들을 청산하고 불평등 없는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노력들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난해 시정연설에서 대통령은 성장의 열매가 국민 모두에게 공정하게 나뉘고 있는지 돌아보고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결하겠다고 천명한 바 있습니다. 물론 불평등한 경제 현실을 바로 잡고 사회적 약자를 보살피겠다던 다짐이 과연 이루어지고 있는가는 앞으로 더 지켜볼 일입니다. 하지만 얼마 전 산업재해로 숨진 청년노동자의 죽음을 통해 여전히 열악한 노동환경과 팍팍한 삶의 현실을 마주한 바 있습니다. 정부의 안정정책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출렁이는 부동산시장이나, 경제불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속적인 호황을 맞이하고 있는 고급 수입제품 시장의 현실은 여전한 우리사회의 빈부격차를 체감하게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많은 지성인들은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품은 평등과 나눔의 짐이 실현될 수 있는 그날까지 함께 걸어갈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임중도원’ 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요? 지난 주 북가주 한인 코커스 목회자 가족수양회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 폐회예배의 성찬식을 앞두고 집례목사님이 선물을 하나씩 준비했다며, 성찬을 받을 때 하나씩 들고 가라는 광고를 하셨습니다.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선물로 돈이나 물건이 아니라 십자가를 드려 죄송합니다’라고 해서 모두가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목사들에게 십자가는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짐이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소명은 목회를 직업으로 삼고 사는 목사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 각각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십자가의 짐은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 모두가 짊어진 소명이라는 뜻이지요.

  

물론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명에 대한 중요성은 귀에 닳도록 들은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평생 안고 살아야 할 무거운 짐처럼 느끼는 것도 당연한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소명을 어떻게 짊어지고 사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 의미에서,오늘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의 유년시절 이야기는 떡잎부터 달랐던 그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소명이 무엇인지 그에 대한 하나의 예시를 제시해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유년기에 있었던 예수는 유대인들의 오랜 전통에 따라 매년 유월절마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의 율법은 남자아이들이 태어나면8일째 할례를 받고(창17:12), 다섯 살 때 두루마리에 기록한 율법(쉐마:Shema, 할렐:Hallel)을 어머니로부터 배우도록 가르쳤습니다(신6:1-3).그리고10살이 되면 미쉬나(탈무드)를 공부하고, 13세가 되면 소위"언약의 아들"이 되는데 이 때부터 공회(Synagogue)의 회원이 되는 자격이 허락되어 성인으로 인정받는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러한 과정을 어린 예수도 똑같이 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예수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결국 요셉과 마리아가 백방으로 수소문 한 끝에 사흘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러 있던 소년 예수를 찾게 되지요. 그곳에서 율법 교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아들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이 때 걱정스러운 심정으로 아들을 찾은 부모에게 행한 예수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왜 찾으시냐는 다소 의아한 대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짊어지고 가야 할 소명에 관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는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바로, 우리의 영적인 상태와 관련된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애타게 자신을 찾은 부모에게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 단서입니다. 성전이 곧 우리 영의 집이라는 뜻이지요. 한마디로 영의 본향이라는 말입니다. 비록 육신은 땅에 머물러 살아가지만, 결국 우리의 영이 머물러야 할 최종 목적지는 바로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이지요. 이를 사도 바울은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바꾸어 설명해 준 바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을 통해 우리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결국 자기 몸이 하나님의 영이 살아계신 거룩한 성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소명의 출발점인 셈입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그러니까 우리의 몸이 예배당에 앉아서 찬양을 부르고 있다해도, 내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하나님의 영이 주인으로 역사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성전과 같이 성결한 삶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무겁게 느낄 만큼 짊어지고 살아야 할 십자가의 소명이라는 것이지요. 

 

그 일이 얼마나 개인이 감당하기 무겁고 힘든 것인지는  웨슬리가 속회(Class)라고 하는 작은 모임을 만들어 교인들에게 참여를 독려한 이유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속회를 통해 구성원들이 서로 경건한 삶을 살아 가도록 격려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신앙의 중심을 잃지 않게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이지요.그런 의미에서 속회는 단순히 모여 친교를 나누는 교제의 장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소명이라 할 수 있는 성결한 삶을 서로가 지켜나갈 수 있도록 돕고 권면하는 신앙의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공동체가 제공하는 강력한 장점이 바로 이것이지요.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누며 신앙의 여정을 끝까지 동행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개인적 영성의 문제로만 그치지 않는 이유가 이것입니다.세상을 혼자 살 수 없듯이, 신앙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아직 다 성장하지 않은 소년 예수가 자신이 머물러야 할 집이 성전이라고 밝히면서도, 결국은 부모를 따라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 순종하며 지낸 까닭이기도 합니다. 신앙은 결코 자기만 홀로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실천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마음 속으로 믿음을 고백하고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 믿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웨슬리가 속회에서 점검해야 할 일을 크게 세가지로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웨슬리는 구원에 대한 개인의 열망이 다음과 같은 속회 활동을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는 남에게 해가 되는 모든 종류의 악한 행위를 금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을 행하여 남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예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새해인 2019년에 우리 교회가 목표로 삼은 구체적인 신앙의 실천과제 가운데 하나도 바로 속회를 통한 신앙의 경건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우리 교회의 여건상 모든 행사가 주일에 집중되어 어려움이 많았는데, 매월 넷째 주일은 전 교인 속회주일로 정하여 모든 성도들이 속회별로 모임을 갖고자 합니다. 물론 교제를 위한 가정모임은 별개로 가져도 좋습니다. 하지만 속회주일에는 모임을 통해 말씀을 중심으로 교제하며, 서로의 신앙이 자라날 수 있도록 격려하고 함께 무거운 짐을 끝까지 내려놓지 않고 실천할 수 있는 길을 다짐하는 시간으로 삼고자 합니다.개인적인 영성을 위해 매월 첫째 주 토요일 새벽예배를 통해 첫열매의 소망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매월 마지막 주일에 있는 속회모임을 통해서는 신앙의 다짐들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결실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가 될 수 있도록 성도님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임중도원.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의미있는 사자성어입니다. 십자가의 무거운 소명을 짊어지고 끝까지 선한 싸움을 다 싸워 나가기를 결단하는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2018년의 마지막 주일에 이 말씀을 마음 속에 새기며, 새로운 한 해에도 더욱 더 신앙의 중심을 굳게 세워나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