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할 때

누가복음4:22-30

 

지난 주 우리가 속한 연회, 곧 California-Nevada Conference의 감독님이 소집한 Gathering of Orders에 다녀왔습니다.매년 우리 연회에 속한 모든 목회자들을 소집하여 교회의 사역에 관한 전반적인 방향이나 선교 방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목회자들끼리 한 해를 준비하며 서로간에 격려하며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저는 소집 공고가 난 뒤 바로 등록을 하고 호텔을 예약했습니다. 연회에서 제공한 호텔보다 훨씬 저렴한 호텔을 찾을 수 있어서 재빠르게 예약을 서둘러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값이 싼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이유는 호텔이 도시의 외곽에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모임 장소에서 꽤 멀리 벗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곳에 묵었던 분들이 한결같이 멀어서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괜찮았습니다. 오히려 떨어져 있으니까 혼자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고, 또 멀다는 생각 때문인지 시간을 정확하게 지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큰 문제는 바로 둘째 이유와 연관이 있었습니다.바로 기차 소리입니다. 둘째 날 아침에 같은 호텔에 묵었던 분들이 어제 잠을 잘 잤느냐고 묻길래, 저는 아주 잘 잤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새로 지은 호텔이라 전 흡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들 잠을 전혀 잘 수 없었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었습니다.

 

밤새 기차가 지나다니느라, 잠을 도통 편안하게 잘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제 호텔 방에서 바로 길 건너가 기찻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사실 예전부터 주위 사람들로부터 가는 귀를 먹은 것 아니냐는 타박을 여러 번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본래 무언가에 집중하면 잘 못 듣는 편이어서 그 때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웃어 넘기곤 했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 가족들의 권유로 병원에서 검사를 해 보니 일반인에 비해 청력이 떨어지는 난청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 것입니다.그래서 남들은 기차 소리에 잠을 못 이루던 그 밤에 저는 아무 방해없이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걱정할 만큼 완전히 청력에 장애가 생긴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불필요한 것은 선별적으로 듣지 않으려고 하는 저 나름대로의 습관이 저를 단잠에 들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흘려보낸 것이지요. 한자어로 보면 듣는다는 말도 문(聞)과 청(聽)이라는 두가지 단어를 사용합니다. 문은 우리의 귀가 들어오는 문처럼 그대로 소리를 듣는 상태일 때를 뜻하는 말입니다. 반면 청은 똑바른 마음(덕)을 가지고 귀로 듣는 것을 형상화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듣는 셈인 것이지요.그래서 소문은 그냥 들리는 대로 듣는 것인 데 반해, 경청은 주의를 기울여 듣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주의를 기울여 경청하는 것은 결국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혼탁한 시대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혼탁하면 구별하고 판단하기가 어렵지요. 어두우면 보이는 것이 없는 것처럼, 혼란하여 시끄러운 상태에서는 소리도 분간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들리는 소리는 많은데, 분간하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이럴 때일수록 불필요한 소리는 버리고, 중요한 소리만 들을 수 있는 선택의 능력이 요구됩니다. 그 방법은 바로 경청하는 것입니다.똑바른 마음을 가지고 주의깊게 듣는 것이지요. 물론 그리스도인들에게 똑바른 마음의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이미 나누었던 말씀처럼 예수님은 이 땅에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복음이란 것은 결국 복된 소리입니다. 그런데 복되다고 말하려면 적어도 마음의 기준에 합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말씀을 온전히 들을 수 있는, 다시 말해 믿음으로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예수께서 몇 번이나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귀로 주의 깊게 경청하지 않으면 결코 그 소리는 복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그 소리를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오늘 본문의 사건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요. 회당에서 예수님은 이사야서의 말씀 가운데 61장을 골라 선포하셨습니다. 분명 쓰여진 그대로 읽은 것인데, 말씀과는 다른 현실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조차 껄끄럽게 들렸던 모양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선포하신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파격적인 내용들이었습니다. 물론 믿는 자들의 귀에는 복음으로 들리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말씀과는 전혀 다른 모순된 현실에 물들어 살아가거나,특히 현실에서 이득을 조금이라도 누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듣기 거북스러운 내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복음의 선포 이후 유대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사람들이 기껏 한다는 반응이 ‘네깟 녀석이 뭘 아냐’는 식의 비아냥입니다. 뭣 하나 내세울만한 것 없는 사람이 전하는 메시지가 달갑지 않았던 까닭입니다.차라리 비웃는 사람들의 반응은 나은 편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벼랑 끝까지 내몰아 죽게 만들려는 매우 폭력적이고 위압적인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토록 독한 생각을 갖게 된 데에는 예수님의 급진적인 사상과 주장도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자유 시장 경쟁 체제가 세상을 지배하는 삶의 방식이자 가치관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 속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내용을 읽은 것이긴 했지만, 예수님이 앞으로 행하실 사역의 방향이기도 했던 선포의 내용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만한 것이었습니다. 첫째와 꼴찌가 뒤바뀔 수도 있는 혁명적 주장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어떤 이들의 귀에는 예수님의 사상이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닌가 의심할만한 부분을 많이 담고 있지요. 무엇보다 이미 기득권을 가진 입장에서 현재 가진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하기 힘든 주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전통적인 사고를 통해 당시 사회의 지배적 위치를 점하던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가슴에 기름을 부은 격인 사례를 덧붙이시지요. 사렙다 마을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사렙다 과부나 나아만은 모두 유대인들에게 무시당하던 이방인이었습니다.사렙다 과부는 비록 이방인 과부였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러 온 엘리야를 알아보고 극진하게 대접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나아만은 이방인 장군으로 문둥병에 걸렸지만, 선지자 엘리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아듣고 순종하여 병고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신앙은 사람의 출신배경이나 신분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말씀을 향한 순전한 마음으로 경청하는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둘 다 은혜로운 간증일 수 있는 사례들인데, 당시 이 이야기를 듣던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이 말을 들은 회당 사람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고 그것도 모자라 낭떠러지로 밀어 떨어뜨릴 모의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귀가 막혀서 복된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급기야 감정이 폭발하여 폭력을 행사하기에 이르고 만 것이지요.

 

금번 Gathering of Orders에서 다룬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는 역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2월 말에 Saint Louis에서 열릴 교단의 특별총회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저 역시 한인총회의 임원으로 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총회의 결과로 인해 교단은 물론 한인교회에 어떠한 결과를 미치게 될 것인가 그 추이를 지켜보며 대책을 몰두해왔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미 미국 연방 대법원은 지난 2015년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와 함께 복음주의 진영(Evangelical Protestant)에 속하는 교단을 제외하고, 미국 장로교와 성공회,그리고 루터교 등 미국의 주류 개신교회(Mainline Protestant)들도 이를 인정하는 결정을 내려왔습니다.

 

우리교회가 속한 연합감리교회는 미국의 주류 개신교회 가운데 최대 규모의 교단입니다.지난 50여년간 미국 사회의 논쟁처럼 교단에서도 동성애와 관련된 찬반 논란을 지속해 왔습니다. 그러다 지난 2016년 교단의 최고 의결기구인 총회에서 끝없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다양한 집단의 의사를 대표하는 이들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대안을 제시하고 이 사안만을 다룰 특별총회를 금년 2월에 갖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2년여 넘는 토론 끝에 특별위원회는 세가지 모델을 총회에 대안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는 현재의 동성 결혼과 동성애자 안수에 반대하는 장정을 고수하고, 이에 더하여 처벌 조항을 강화시킨 전통모델(Traditional Plan)입니다.둘째는 교회일치를 강조하기 위해 특별위원회와 감독총회가 동의한 하나의 교회 모델(One Church Plan)입니다. 이는 기존의 동성 결혼이나 안수에 관한 조항을 교단 헌법에서 삭제하는 대신, 개별 교회와 목사들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결정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허락한 방안입니다.마지막으로 셋째는 연대적 총회 모델(Connectional Conference Plan)입니다. 현재 다섯개의 지역총회를 동성애에 대한 입장에 따라 진보, 중도, 보수의 세개 총회로 재편성하여, 각자의 신념에 따라 교단헌법을 적용하자는 방안입니다.

 

연합감리교회가 이러한 대안을 제시한 까닭은 동성애에 관한 진보와 보수의 논쟁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확실하게 들어주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양 극단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상대방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묘수를 낸 것이지요. 이 세가지 제안에 대한 논의는 매우 복잡한 법적인 해석을 요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세밀하게 읽고 공부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저도 장정의 교리와 사회원칙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지만, 매우 신중하게 읽고 나서야 수긍이 갈만큼 복잡합니다. 무엇보다 법리적 해석이 미국 사회를 합리적으로도 이끈 공로도 있지만,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삶을 매우 단정적이고 비인간화시킨 부분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교회가 법적인 용어를 가지고 벌이는 이 지루한 논쟁 그 자체로 교회의 상처가 오히려 깊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시간을 가지고 이 복잡한 논쟁에 대한 설명과 함께 여러분과 대화의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열린 토론과 대화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함께 점검하는 시간을 갖게 되리라 생각합니다.이를 위해 오늘은 한가지 점만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교단이 내리게 될 결정은 물론이고,그에 대한 여러분의 입장을 정리할 때, 먼저 귀를 세밀하게 기울이는 신앙의 훈련을 해보시라는 권면입니다. 

 

당시로서는 다소 파격적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예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나아가 결국에는 그를 십자가의 죽음으로까지 몰고간 폭력적인 집단 감성을 기억해 보십시오. 들리는 대로 듣는 것은 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혼란한 시대일수록 마음으로 분별하며 들어야 옳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차분하게 경청하지 못하면 감정이 먼저 앞서는 법입니다. 자기의 입장에 빠져서 다른 이들의 은혜 조차 거부했던 유대인들의 전철을 오늘 우리가 밟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경청할 때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이 우리에게 임하여 주님의 교회가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