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판 오분 전

누가복음 6: 20-26

 

행복이란 무엇인가?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며 불현듯 떠오른 질문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문득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사춘기 딸 아이와 대화를 나눌 수도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가 아이에게 네가 생각하는 행복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사실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하다 보면, 나름대로 생각할 시간도 갖게 해서 자기 하는 일에도 좀 더 집중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심이 좀 있었던 것이지요.그런데 아이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자신을 통해 다른 사람이 기뻐하거나 만족해 하는 것을 보면 행복해 진다는 겁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자기의 꿈을 이루고, 또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꿈에 대한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져야 하고, 다시 그 목표에 대한 성취를 위해 결국 지금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틀에 박힌 강박관념으로 돌아가 버리는 대답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지요.

 

아이의 말을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긴 저에게 거꾸로 딸아이가 갑자기 아빠가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물을 땐 몰랐는데, 막상 대답하려 하니까 참 막연하고 말문이 막히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설교나 강의를 하면서 말하는 행복의 정의는 알고 있지요. 그런데 정작 내 자신에게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스스로 물어본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내게 행복은 무엇이었던가? 언제 나는 행복하다고 느끼고 확신을 갖는 것일까? 때론 의무감이나 책임감이 추상적인 행복감을 대신하지는 않았는가? 생각하는 행복의 정의와 실제 살면서 느끼는 만족이나 확신의 대상이 다르지는 않았는가?

 

자신이 지금 무엇을 통해 자기 만족감을 얻고 있으며,어디에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지를 보면 아마 자기가 가진 행복의 실체가 조금은 드러날 지도 모르겠습니다.그러고 보니까 목회도 자기만족으로 생각하고, 신앙의 본질과는 별개의 성공이라는 또 다른 목표를 세우며 살았던 이면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으로 세상에 소신 있는 자녀를 키우자고 하면서도, 정작 아이들에게는 세상의 경쟁에서 앞서가기를 바라는 쿨하지 못한 아빠였는지도 모릅니다.아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눈으로 아이의 시선도 바꾸어 버리려 했던 것이지요. 속내가 들어나니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 우연히 제주도의 해녀 할머니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여든이 넘도록 평생 물질로 살아온 한 할머니 해녀에게 리포터가 묻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스킨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더 많은 수확을 하실 것 같은데 왜 사용 안하세요?” 그러자 할머니도 그걸 사용하면 한 사람이100명 몫까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노라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그래서 리포터가 “그런데 왜 안 하세요?”라고 되묻자, 돌아 온 답은 바로 “그렇게 하면 나머지99명은 어떻게 살라고?”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사람에게 행복의 기준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 사례였던 것이지요.

 

황동규 시인의 시 가운데, “꿈, 견디기 힘든”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거기에 보면 꿈에 대해 이런 묘사를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꿈, 신분증에 채 안들어가는 삶의 전부”라고 말이지요. 아마도 해녀 할머니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의 눈에 요즘 많은 현대인들은 불행한 것처럼 보일 지도 모릅니다. 기껏 인생의 꿈을 신분증에 다 들어간다고 확신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신분증이 곧 자기 인생의 전부가 되어서, 그것이 행복의 기준이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최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오직 신분증을 얻기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투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고 심지어는 옳은 것이라 여겨서 다음 세대에게까지 강요하며 대물림하려는 오늘의 세상을 과연 행복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제가 이런 생각을 하며 오늘 본문 말씀인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읽으려니까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의 개념이 마치 폭탄선언처럼 짜릿하게 들려올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 이 땅의 세속적 가치를 행복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도전이 될 만큼 혁명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을 완전히 뒤바꾸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장 34절에 보면 시므온이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종이 아기 예수를 일컬어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는 비방 받는 표징으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예언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비방 받는 표징이란 세상의 가치와 전혀 다른 가르침으로 어떤 이들은 넘어지게 만들고, 반대로 믿음을 가지고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일으켜 세우신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현실에서는 그처럼 모순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뜻이지요.흔히 팔복이라 말하는 산상수훈의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행복한 이로 표현한 사람의 눈에 세상은 불행한 모습인 반면, 불행하다고 말한 사람의 눈에 세상처럼 행복한 곳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예를 들어 볼까요? 한 구절만 읽어 보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갖고 있는지 피부로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가난하고 주린 자가 행복합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한 발 물러서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하려 한다는 것이지요.

 

100여년 전 미국의 교계에서 “사회복음(Social Gospel)”이라는 말이 생겨나기 시작한 때가 있었습니다. 개인의 영적 구원의 문제에 매달리던 교회가 세상에서의 소명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라는 도전으로부터 시작된 개혁 운동이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가난이라는 것은 개인의 의지나 태도 그리고 능력의 문제로 간주되던 시절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가난도 대물림이 될 수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취업조차 안되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간과한 결과이지요. 그래서 사회복음을 주창하던 이들 가운데는 교회가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며 개탄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본래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교회였다는 것이지요. 하늘의 복을 구하며 모여든 가난한 이들 말입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가난하여 불행을 맛보며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주님의 말씀 안에서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던 사람들이 모여든 곳. 그곳이 바로 교회였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빈자들의 교회가 빈자들을 위한 교회로 둔갑해 버렸다는 겁니다. 가난한 이들의 모임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경제적인 발전으로 번영을 누리는 사회에서 굳이 교회가 가난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교회가 사회와 다름없이 계층화 되어 가는 현상을 지적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교회가 가난한 이들의 보금자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지요. 마치 남의 이야기 하듯 가난한 이들을 대하는 교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면서 그저 도움을 주는 것만으로 일종의 만족감을 얻는 곳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교회가 이와 비슷한 현상을 맞이하고 있습니다.그것은 홈리스가 교회에 들어와 함께 예배하지 못하고 있다는 식의 매우 극단적인 사례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예수님의 가르침인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가난한 이가 행복하다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교회가 되었다는 뜻이지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하늘의 복이 아닌 세상에서의 행복 추구가 신앙의 대전제가 되어버린 세상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현실에서의 성공과 안락이 믿음의 목표가 되어버린 지금,어쩌면 우리도 그것을 기준으로 믿음을 평가하는 날이 멀지 않았다는 염려가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닌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본문 24절은 이런 우려를 갖고 살아가는 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요한 사람들은 이미 너희가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는 적어도 영원한 생명을 통해 구원의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흔히 인생을 불꽃처럼 한순간에 비유하는데, 잠시의 쾌락과 편리를 위해 영원한 소망을 포기하며 살 것인지를 되묻는 말씀입니다.물론 이것이 현실에서는 어떠한 행복도 찾을 수 없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어떤 행복을 구하며 살 것인가의 선택에 관한 질문인 것이지요. 저 역시 설교를 써 내려가면서 제 딸 아이의 행복에 대한 정의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가 제게 질문했던 행복에 대한 정의를 나름대로 하나 찾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딸의 행복입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는 우리 아이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정말 행복해 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아마 많은 분들이 오늘의 설교 제목을 보고 적잖이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개판 오분 전”이라는 속어를 써서 불경스럽게 여기는 분들도 계시겠지요.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개판'의'개'는 개(犬)가 아니라 한자로 열릴 개(開)자를 뜻하는 말입니다.한국 전쟁 당시, 전쟁의 위협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떠난 일이 있었습니다.그 때 피난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먹을 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밥을 배식했다고 하지요. 배식을 담당한 사람은 밥이 다 지어지기5분 전이 되면 “개판 오분전”이라는 말을 외쳐서 식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 즉 개판 오분전은 밥을 짓고 있는 솥의 나무판을 열기5분 전이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는 겁니다.전쟁의 한 가운데,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기쁨의 소식이었던 셈이지요.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쓰는 말의 의미 보다 민족의 아픔과 슬픈 사연이 담겨 있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가끔씩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북새통 같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행복을 찾아서 벌이는 또다른 전쟁터 같은 모습입니다. 개판 오분 전에 남보다 먼저 앞서서 기회를 놓치 않으려 벌이는 나만의 긴박한 싸움터인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우리는 결국 무엇을 얻은 것인가요? 정말 행복하신가요? 어쩌면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여러분의 삶에 다 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일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이 보다 더 허무한 일이 또 있을까요? 

 

우리가 기다려 왔던 개판의 목적이 변화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지금 먹고 돌아서면 또 허기져서 갈급해 하는 세상의 행복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생명의 양식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새로운 세상이 열려서 모두가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복된 그날이 오기를 기도합시다. 지금이 바로 그 판이 열리기 5분전인 것처럼,오늘도 행복을 꿈꾸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