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인도하소서

고린도후서 4:1-6

 

지난 주간 세인트루이스에서 연합감리교회 교단특별총회(Special General Conference)가 열렸습니다. 총회는 교단의 최고입법기구라 할 수 있는데, 지난 40여년간 동성애와 관련된 논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감독회의(Council of Bishops)의 제안에 따라 이 문제와 관련된 쟁점 법안만 다루는 특별총회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진대로, 총회의 결과 연합감리교회는 현 장정(Book of Discipline)의 입장을 고수하여 동성애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미 미국사회는 동성결혼에 대해 지난 2015년 연방대법원의 합헌 판결 이후 사회문화적인 인식이 이미 옹호하는 추세로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특히 대도시 지역과 젊은층 사이에서는 더이상 LGBTQI라 불리는 성적소수자에 대한 태도가 매우 개방적인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East-Bay 지역만 하더라도, 만일 이들에 대해 배타적인 언행을 취한다면 곤란한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아마 여러분의 자녀세대들은 이에 대한 논쟁 자체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지 모릅니다.그만큼 인식의 기준과 폭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회에서의 인식이 전면 개방으로 변화되어가고 있는 것과 달리,교회는 여전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원칙 때문입니다. 특히 구약의 율법은 동성간의 성적 행위에 대해 엄하게 규제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 1장 27절의 말씀을 통해 응당한 처벌을 받을 부끄러운 죄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을 정당하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질문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성경의 문자적 이해만을 가지고 실제 문제에 그대로 말씀의 적용을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입니다.만일 구약의 유대 율법 규정을 지금 우리 사회에 있는 그대로 적용시키다 보면 우리는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둘째는 ‘성경이 말하는 죄 가운데 유독 동성애와 관련된 부분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실제로 동성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로마서 1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동성간의 관계 뿐만 아니라 모든 불의와 추악한 탐욕 그리고 악을 도모하는 모든 행위가 응당 다 처벌을 받아야 할 죄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러한 질문들이 나름대로 충분히 의문을 가질만한 근거가 있는 셈이지요.

 

그럴 때 우리가 찾게 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기독교의 가르침이란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구두로 직접 전해 주신 것 뿐만 아니라 보여주신 행동 그리고 그 이면에 담긴 숨은 메시지까지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두가지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이 될 수도 있을만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기록된 간음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묻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한 속셈이지요.이 부분을 읽다 보면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두가지 속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시험하듯 묻는 바로 그 속셈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사실은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이를 넘어뜨리려는 것이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남’을 철저하게 구별짓는 것인데, 이것은 언제나 소외된 이들을 두렵게 만듭니다. 논쟁 자체 보다 구별이 목적이 되면 대개 남는 것은 갈등과 상처 뿐이 될 가능성이 높지요. 

 

사람을 두려움에 빠지게 만드는 또 다른 속성은 율법이라는 기준에 의해서 사람을 돌로 쳐 죽일 수도 있는 폭력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타인으로부터 받는 폭력은 반드시 물리적 가해 행위 뿐만 아니라 시선이나 말로도 두려움을 가져다 주는 법입니다. 다른 이로부터 받게 될 상처에 대한 공포감은 인간을 언제나 궁지로 몰고가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폭력적인 위협에 결코 굴하지 않으셨지요.

 

그들의 속셈을 간파한 예수님의 대답은 죄에서 자유로운 이는 아무도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밝히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이지요.그러니 똑같은 죄인인 우리가 서로를 정죄하는 것은 합당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자칫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끌만 문제 삼는 상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간음이 물론 율법에 어긋난 죄이기는 하지만, 또 다른 크고 작은 죄에 대해서 그들도 죄를 범하고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 것이지요. 그럼 모든 죄를 묵인하라는 것이냐며 항의하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그래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은 잊지 않으신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떤 메시지를 얻을 수 있을까요?빛의 비유를 통해 전하고자 한 바울의 이야기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빛은 어둠을 밝히는 힘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은 빛이 있기 때문이지요.눈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사람은 볼 수 없습니다. 바울은 진리를 아는 능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어도, 지식의 빛이 없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빛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바로 만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빛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도 나의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인식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사도바울은 이를 지혜의 빛이라고 하여 이 빛이 우리 마음과 이성 가운데 나타나지 않으면, 결코 우리는 인식할 수 없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예컨대, 캄캄한 동굴에 빛이 들어오는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빛으로 인해 우리는 비로소 사물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데, 그건 빛에 의해 반사된 것을 우리의 눈이 감지한 결과일 뿐입니다. 세상의 여러 현상을 인식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어떤 사회 현상을 인식할 때도 우린 어떠한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그대로만 가지고 판단을 해서는 올바른 평가를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 때 신앙인은 어떤 인식을 하는가 하면, 주어진 지혜의 빛,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현상을 바라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곧 지혜의 빛을 보지 못하게 막는 세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마음의 양심을 부끄럽게 만드는 방해공작이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 방해는 세상의 탐욕적인 가치와 세력으로부터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정작 무섭게 만드는 두려운 적은 늘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의 빛을  선포하셨지만, 이를 가장 심하게 거부한 이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이야말로 지혜의 빛을 막는 가장 큰 방해세력이었던 셈입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의 빛은 유대의 복잡한 율법에 비해 매우 단순했습니다.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았으니 그저 회개하고 돌아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새 계명을 주시며 이를 실천하는 길을 가르쳐 주셨지요. 바로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반면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죄인들과 세리와는 구별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고 생각했습니다.스스로를 빛으로 착각했던 겁니다. 진리가 자기로부터 나온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결과는 사랑이 아닌 폭력이었고, 평화가 아닌 갈등과 분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류의 역사, 아니 우리 기독교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평화와 화해의 시대 보다 갈등과 분열로 고통받았던 기억이 더 크게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어쩌면 스스로를 빛으로 착각하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정죄하려 했던 잘못된 인식이 만든 분쟁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지난 특별총회의 현장에서 모든 진행과정을 지켜 보며,매우 가슴 아픈 오늘 교회의 현실을 다시 한 번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진보와 보수로 나뉜 것은 단지 투표수 만이 아니었습니다. 현상을 보는 인식만큼 서로의 마음도 갈라져 있었습니다.같은 공간에서 두 쪽으로 쪼개져 똑같은 하나님을 향해 서로 다른 찬양을 부른 상황을 바라보며, 과연 오늘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마음이 아팠습니다. 마치 이념으로 분단된 우리 조국을 보는 것 같아 더욱 가슴이 메어왔습니다. 

 

특별히 금번 총회에서 전 세계에서 모인 교단의 대표자들은 소위 전통주의 모델을 교회의 공식적 인식과 입장으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총회에서 선택된 전통주의 모델은 단순히 동성애와 관련된 인식이나 입장을 정하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징벌적 조항까지 덧붙인 수정 법안이었습니다.이제 앞으로 교단 사법위원회의 합헌 결정만 나오면, 여러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처벌이 시작됩니다. 어쩌면 이것은 또 다른 분쟁과 갈등의 씨앗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교회의 새로운 변화를 위한 최선의 길인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언제나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지혜의 빛이라도 된 것처럼 자기의 입장만 주장하는 이 세대에, 주님의 말씀이 빛이 되어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