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말씀만 하소서

누가복음13:1-5

 

한자어로 ‘참척(慘慽)’이란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참혹한 슬픔을 뜻하는 말로써, 오래 전부터 유교 문화권에서는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비극적인 상황’을 가리킬 때 사용해 왔습니다. 부모의 죽음에는 천붕(天崩)이라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참척은 자식을 잃고 가슴이 참혹할 만큼 내려앉아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성을 잃어버리고 비통함이 짐승처럼 치솟아 통곡하는, 말그대로 인간의 가장 처절한 순간을 묘사한 것이지요.

 

지금은 작고한 여류 작가 박완서씨가 남편을 폐암으로 잃은 지 석 달 만에 다시 외아들을 잃고 난 뒤, 참척의 슬픔 속에서 쓴 자신의 일기를 후에 책으로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가 책 제목이었습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 절규하며, 하나님께 외쳤던 소리였던 것이지요. 도대체 왜 이런 고통을 주신 것인지 한 말씀만 해달라고 몸부림치며 간구한 기도였습니다. 책 중에서 작가는 고통스러운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상을 당한 이에게 정중한 조문을 하는 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도덕입니다. 그러나 참척을 당한 에미에게 하는 조의는 그게 아무리 조심스럽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위로일지라도 모진 고문이요, 견디기 어려운 수모였습니다.’ 얼마나 힘들었기에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었을까요?

 

무엇보다 작가를 더욱 힘들게 만든 것은 자식을 잃고 모든 것이 멈추어 버릴 줄 알았는데, 여전히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작가 스스로 고백하듯,참척을 겪고 나서 기막힌 애통과 절망이 당연히 에미인 자신의 목숨도 단축시킬 줄 알았는데, 자신의 마음과는 별개로 남들처럼 끼니때마다 먹고 살려는 욕구가 생기는 것에 슬픔과 배신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그 때 처음 해보았다는 것이지요. 이와 함께 그는 하나님께 묻고 싶더라는 겁니다. 도대체 왜 아들을 이렇게 빨리 데려갔느냐고 말이지요.


작가는 행여 순간적인 실수로 거두어 간 것은 아닌지 분노가 치밀어 대들기도 하고 애걸복걸도 해보았다고 합니다. ‘주님, 당신은 과연 계신지, 계시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한 말씀만 하시라’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끝내 아무런 말씀을 주지 않으셔서, 작가는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전 우리 시골에선 자식을 앞세운 에미한테 자식을 잡아먹었다고 말했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 소리가 끔찍해 소름이 끼쳤는데 지금 생각하니 나한테 해당하는 소리가 아닌가. 나야말로 자식을 잡아먹은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줄창 먹지 않고도 배부를 수가 없고, 먹지 않았는데도 수족을 움직이는데 지장이 없을 수가 없지 않은가.’

 

박완서 작가처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무고한 죽음과 불행으로 인해 고통받고 사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언급된 두가지 비극적 사건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질문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첫번째 사건은 총독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이었습니다.당시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동물을 잡아 바치는 희생제를 드리는 중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하게 학살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당시 반로마적인 기질이 매우 강했던 갈릴리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투쟁이든 로마에 대해 강경하게 맞설 태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처벌의 한 형태가 아닌가 라는 추측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조금은 의아합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오해가 될 만한 소지가 많은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핏 들으면, ‘그들이 당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니 너희라고 그렇게 되지 말란 법 없으니 조심하라’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다른 한편으로는, 피식민지 백성에 대한 제국의 탄압을 문제 삼기 보다,오히려 피해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를 비난하는 듯한 오해도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 대한 부연 설명도 없이 바로 실로암 망루와 관련된 사건으로 대화의 화제를 돌리셨습니다. 이는 탑이 무너져 열여덟 명이나 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죽은 사건이었습니다.실로암은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한 저수지 이름인데, 예루살렘의 남쪽과 동쪽 성벽에 접해 있었다고 합니다. 무너졌다고 하는 탑은 바로 이 두 지역의 경비를 위해서 세워 놓은 것이었습니다.사고가 자연적으로 발생한 재해인지 아니면 부실 공사나 고의적 과실에 의한 인재의 성격인지 조차 알 수 없습니다.위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피해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우연적인 사고였다는 것이지요.

 

지난 주 남아프리카 모잠비크 지역에 사이클론으로 인해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되었다 할 지라도,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는 여전히 위협이 될 만한 수준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사건을 그저 언론보도를 통해 스쳐 지나가듯 듣고 잊어버리는 우리들에게 사고는 그저 죽은 사망자의 수와 피해의 정도만 관심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갖는 그 비통한 마음마저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자신의 문제로 내면화시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여전히 일부에서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말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하지만, 결국 달리 해석하면 당연한 결과라는 판단도 숨어 있는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된 당시 유대 사회의 상황도 모든 것을 인과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따라서 그에 대한 책임이나 처벌의 근거도 분명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사건이 다 원인을 명확하게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람의 의도적인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닌 자연적 재앙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 재앙일수록 그 원인을 죄의 문제와 연관을 시켜서 어떻게든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하려 했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에 대해 그것만큼 분명하고 쉬운 답도 없었을테니 말이지요. 그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9장 1절 이하에는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소경이 된 것은 당사자의 죄인가, 아니면 부모의 죄인가’라고 말이지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고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나타날 하나님의 일에 더 관심을 두었던 것이지요. 

 

쉽게 말해, 재난을 당하고 삶의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묻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그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하고 나눌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갈릴리의 학살 피해자들에 대해서 그들이 더 큰 죄인이라 그런 것인 줄 아느냐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죄인으로 따지자면 모두가 다 똑같은데, 그들이 특별히 큰 죄를 범해서 일어난 사건은 아니라는 뜻이지요. 한마디로 죄로 인해 당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판단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실로암 탑 사건의 희생자들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그들은 당연히 죽을 만한 이유가 있고, 너희는 당연히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구별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온 종일 곡기도 끊고 방구석에서 참척의 절망 속에 하나님을 원망하며, 그분을 죽이고 또 죽이며 울분을 토했던 박완서 작가의 마음이 조금씩 변화되었던 계기도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왜 우리를 위해 당신은 독생자까지 주셔야 했는가?”를 묻게 된 것이지요. 우리가 늘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늘 그래야만 할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이 더 이상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게 되더라는 겁니다.자신의 아들이 당연히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어야만 했던 이유는 한번도 묻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지난 몇 해전 세월호 사고가 발생한 뒤에, 희생자 가족 중의 한 분이 이런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자식을 잃고 생각해 보니, 이전에 대형사고로 인해 비슷한 고통을 경험한 이들의 마음이 먼저 떠오르더라는 겁니다. 그 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남의 일로만 여겨지던 사고였을 뿐이었는데, 막상 자식을 이렇게 허망하게 보내고 나니까 그들의 고통이 똑같이 전해오는 것만 같았다는 것이지요. 막연한 그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바로 자기 자신의 문제가 되었다는 겁니다.

 

누구의 잘못인가 온통 그 원인에만 골몰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이“회개하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회개는 돌아서는 것이지요. 시선이 바뀌고 삶의 방향도 전환되는 겁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방법도 달라지는 것이지요. 나와는 상관없는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라,이제 나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일 보듯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내가 해야 할 일을 지금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2000년 전 십자가의 사건이 이제 나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 되고, 참척의 고통을 지금도 어디선가 겪고 있을 그들의 문제가 나의 아픔이 되어 함께 공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 때 비로소 우리는 고통 속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며,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는 형제 자매의 위로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쩌면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울부짖었던 우리의 간구에 대한 응답이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