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나의 힘

누가복음15:25-32

 

바다의 최상위 포식자인 상어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그런데 그 강한 힘을 가진 상어도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외부로 향하는 강한 힘만큼, 정작 자기 자신의 아가미를 제대로 통제하는 능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외부의 적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강한 철문을 달아 놓았더니, 내부의 사람들이 평상시 그 문을 지나들 때도 큰 문제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지요. 여하튼 상어는 잘 통제되지 않는 아가미로 인해 잠 잘 때도 쉬지 않고 아가미를 계속 움직여야 호흡을 유지할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상어의 입장에서 보면, 참 번거롭고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일종의 역설적인 상황이라고 할만한 일들입니다. 소위 교회 일에 열심인 분들이 더 시험 받기 쉽고, 문제를 만들기도 쉬운 법인데, 그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심이 없거나 아예 거리를 둔 사람이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일하다가 어쩌다 보니, 관심을 갖다가 어쩌다 보니, 최선을 다해 섬기다가 어쩌다 보니 다 생기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인 것이지요. 에너지는 많은데 그 에너지를 통제할 능력이 부족하거나 간과될 때 생겨나는 결과입니다.

 

이러한 신앙 생활의 패턴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지요. 그것은 무엇을 하든 결국은 자기 중심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힘과 에너지도 선택적으로만 사용하게 되는 것이지요.물론 그 선택의 기준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하고 좋은 방향으로만 힘을 사용하기 때문에 자기와 맞지 않거나 원하는 방향이 아니면 언제든지 상처받고 시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기형도라는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에 참 흥미로운 구절이 있어 소개합니다.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목적이나 방향을 나름대로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신은 그런 것 없다고 하는 사람조차 사실은 개인이 인식을 못했을 뿐이거나 자신도 모르게 세상이 정해준 방식에 적응하며 살아갑니다.그런데 그 삶의 목표나 희망이라고 했던 것들이 사실은 세상에 대한 질투였는지도 모른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입니다.남들이 가진 것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 남처럼 잘나고 싶은 것에 대한 질투.남들이 올라선 것처럼 나도 오르고 싶은 질투. 그래서 미친듯이 살았는데,정작 자신은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허망함을 발견한 것이지요. 질투로 세상만 바라보다,정작 세상이 붙여준 이름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기자신은 사랑하지 못했던 현실을 깨달았던 겁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 교단의 한 후배 목사님이 올린 글을 읽으면서 이 시를 다시 한 번 읽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시인의 자기고백처럼 목사님의 툭 던지는 말한마디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자기성찰적인 글이었습니다.

 

“저녁 예배 찬양이 이런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참 자유가 있다네… 

차마 부를 수가 없다. 자유하지 못한 목사여서… 늘 어디나 계신 분이 주님이라고, 그러니 니들 마음만 열면 된다고 스무살 교인들에게 자주도 말해왔는데, 나는 차마 이 노래를 부를 수가 없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참 자유가 있다는데…

개척교회 몇 년째… 

애리조나에 콩 나듯 누가 칭찬할 일이 있어 기분 좋은 소리를 들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이 하셨다' 고… 거짓말이다.가끔 진짜 그렇게 고백할 때가 있지만,  마음 속 깊숙이 흐르는 강물 같은 교만은 나랑 하나님이랑 안다.

애리조나에 선인장 나듯 계획했던 대로 안된 일들이 많다. 하나님의 뜻에서 마음이 멀어진 목사에게 선택지는 둘 뿐이다. 환경과 남탓을 하던지 아니면 내 실패를 인정하던지… 

감독님과 큰 교회 은퇴목사님이 이러신다. 

목회의 결과로부터 자유하라. 큰 교회는 바쁘기만하고 좋은 것 없다. 나도 큰 교회 만들고 은퇴하면 저 말은 꼭 할꺼다… 

칭찬받고 인정받고 남들보다 잘 나가는 목사가 되고 싶은, 재미없는 마음이 가슴에 거머리이다. 젖꼭지 옆에 붙어서 심장을 빨아 먹는다. 웅크리고 누울 수 밖에 없다. 

아침밥을 굶고, 뭘 길게도 써보고, 처음 만난 선배님들의 피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어도 잠깐 따뜻해진 마음은 그 안에 쓰레기를 발견한다. 

누가 설교를 하러 올라오면‘얼마나 잘하나?’를 먼저 생각한다. 쓰레기다

이웃집 아저씨 같은 사람이 큰 교회 담임목사라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 말할 때 내 귀의 각도가 달라진다. 쓰레기다.

개척교회 잘 키워 놓으면 어디서 나를 찾아줄까… 교회를 키운 팔할은 이 생각이다 

지금도 이 글을 사람들 앞에서 읽을 생각을 하니까… 좀 솔직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으로 보이겠지? 하고 기대한다. 쓰레기다.재활용도 안 된다. 

내일은 아내 생일인데 여기서 이런 거 쓰고 있다 쓰레기다.

하나님의 법은 없고, 인정받고 잘나가고 싶어 하는 그 쓰레기만 가득하다.죽어도 안 없어진다. 죽으면 없어질까?”

 

이 글의 제목이 “나는 니느웨로 가고 있다”입니다. 분명 하나님이 요나에게 가라고 명하신 곳은 니느웨인데,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향해 가기 위해 배밑창에 숨어 있던 요나처럼 자신의 현재 상황을 비유한 것이지요. 너무나 솔직한 자기 고백과 성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글을 읽으며 이 목사님은 다시스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정을 토로하였지만, 이미 니느웨로 향해 가고 있는 주님의 종을 보는 듯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비록 맥락과 처한 상황은 아주 상이하지만,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오늘 본문 말씀의 구절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한 인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돌아온 동생을 질투심에서 바라보았던 그의 형 이야기 입니다.

 

 

비유의 이야기는 그 제목처럼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집을 떠나 탕진하고 다시 돌아온 동생에게 주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아무 조건 없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돌아온 탕자를 안아 준 아버지의 모습은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나타내는 비유로 언급되기도 하지요. 그와는 달리 형은 실제 이야기 속에서나 이 비유를 이해하는 사람들로부터도 소외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극 안에서도 주인공이 되지 못한 설움이, 이 이야기를 바라보는 극 밖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도 멀어지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일까요? 비유에 나타나는 형의 심리적 상태는 질투에 가득 찬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돌아 온 동생을 위해 아버지는 성대한 잔치를 엽니다. 아마 이를 바라보는 형의 감정은 정말 복잡했을 겁니다. 어느 때처럼 자신에게 맡겨진 밭일에 충실했던 형. 맏아들로서 아버지를 봉양하고 집안을 세우는 책임을 묵묵히 지켜온 믿음직한 형.그런데 하루종일 뙤약볕에서 일하고 돌아온 사이에 말썽쟁이 동생이 돌아왔다고 동네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인 것이지요. 동생도 얄밉지만, 이를 알고도 받아준 아버지 때문에 더 서운했습니다. 순종하며 일하느라 마음 편히 놀아 보지도 못한 자신의 처지와 대조되는 동생을 바라보며 질투심이 폭발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극중의 인물인 형의 입장에 서 있다면 어떤 감정이 들까요? 형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인간적인 심리상태로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그런데 이 비유는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을 이야기하려는 것에 초점을 둔 말씀이 아닙니다. 사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형은 죄인들과 세리, 창녀와 같은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예수님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유대 종교지도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눈에 벌받아 마땅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을 얻는다는 사실이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어떻게 그들을 위한 천국잔치가 가능하다는 것인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질투심이지만, 그들이 놓치고 있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와 구원이 그들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집에 남아 묵묵히 일을 한 맏아들처럼 집을 나갔다 돌아온 작은아들 역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자녀가 된 것은 자식들이 행한 행위의 결과가 아닙니다. 못난 자식도 부모의 자식입니다.결과적으로 형으로 묘사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신앙생활의 결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들이 그토록 강조한 율법적인 신앙생활도 결국은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 조건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그러다 보니 자신들처럼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하지 않고 게으르거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인정하기 어려웠던 겁니다. 비유에서처럼 동생을 자기의 기준으로 정죄하고 만 것이지요.깨끗하고 의로우며 성실한 자기와는 달리 동생은 언제나 기준에 미달하는 문제아 혹은 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자식으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을 내려버린 것이지요.

 

질투는 언제나 오해를 양산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자기가 해 온 일들에 대해서도 회의감을 가질지 모릅니다. “나도 차라리 돈이나 원없이 쓰고 실컷 놀다가 들어올 걸”하고 말이지요. 그러다 보니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 다하지 못하고 산 자기가 바보같이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스스로를 종처럼 여기고 산 것이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그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정말 신실한 맏아들의 모습 아닙니까? 다만 시기하고 질투하는 닫힌 마음에 대해 지적하신 것이지요. 그것 역시 자신의 욕심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은 맏아들, 곧 종교 지도자들이야 말로 상어처럼 힘있는 사람들 아닌가요? 그런데 그들이 가진 약점이 바로 그 힘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힘은 언제나처럼 질투로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남들 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오르려는 질투의 힘. 하지만 정작 그것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힘은 갖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쉬지 않고 호흡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을 끊임없이 행해야 하는 것이지요.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면서도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허무함을 벗어나는 길이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