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부담

요한복음20:1-10

 

부활은 온 인류에 전한 소망과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소망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부활을 일시적인 육체의 소생이나 윤회처럼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환생과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모두가 현실에 기반한 생각일 뿐입니다. 현재의 삶을 지속시키거나, 지금 보다 나은 형태의 삶을 바라는 욕망의 또 다른 모습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현재의 자신은 죽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부활의 아침 마리아와 제자들이 목격한 빈무덤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부활의 시작은 바로 죽음이고, 그 죽음은 자신을 완전히 비워내는 것이라는 뜻이지요.그래서 무덤이라는 죽음의 공간이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부활의 장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어서 새롭게 피어나는 꽃과 같습니다.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완전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의 변화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영혼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함께 동참하여,자기는 죽고 철저히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육신의 소유나 욕망에 대한 집착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버리고 죽어야 새롭게 다시 사는 것이 부활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날마다 부활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만찬을 통해 천국잔치를 미리 체험하는 것처럼,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날마다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중생의 삶을 통해 부활의 능력을 미리 경험하는 겁니다. 그러면 매일 아침 새로운 하루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생겨나는 것이지요. 호흡하는 매 순간마다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조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사회만 하더라도, 부활절이 그 본래적 의미와 상관없이 성탄절이나 발레타인데이처럼 상술의 대상으로 변화된 징후를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활절 전후로 증가하는 카드나 엽서 회사의 매출은 그래도 수긍이 갈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토끼 모양의 장난감과 디자인으로 도배되고 울긋불긋한 계란으로 다양한 상품이 판매되면서 언젠가부터 부활의 상징이 토끼와 계란으로 바뀐 것 같은 착각이 생길 정도입니다. 물론 이렇게 이미지화해서 함께 즐기고 나눌 수 있는 것은 좋습니다. 다만 이를 통해 기억되어야 할 본래적 의미가 변색되거나 지워져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무덤을 찾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진 것만 확인하고 다시 되돌아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그 이유를 그들이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깨닫지 못한 것에서 찾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만 가지고 판단했던 것이지요.그래서 빈무덤을 보고도 예수님이 이미 그들에게 예고하신 부활을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의존했습니다.이는 당시 그들의 처지를 잘 보여주지요. 아마도 그들에게 십자가의 사건은 절망과 두려움 그 자체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부활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이해할 리 만무합니다.죽어야 다시 살 수 있는 부활의 의미처럼, 부활 생명에 대한 소망이 없이 십자가 사건은 말그대로 절망적인 죽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부활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신앙은 싸구려 신앙으로 둔갑할 가능성이 크지요. 눈에 보이는 영광은 갈망하면서도 고난은 피하려는 신앙 말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기 좋고 귀로 듣기 좋은 것만 취하는, 자기 중심적인 신앙을 갖기 쉽다는 겁니다. 높은 곳에 앉기를 좋아하고 관심 받으며 사람들의 이목에 집중했던 예수님 당시의 율법학자들이나 다를 바 없는 얄팍한 신앙에 빠지기 십상이라는 것이지요(눅11:43). 오히려 예수님은 자기를 내려놓을 줄 아는 이가 진정한 신앙을 가진 제자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마16:24). 한마디로 진정한 부활의 의미는 빈무덤을 바라보며,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깨닫는 믿음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그 죽음의 무덤에서 새롭게 부활의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 말입니다.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가장 큰 차이를 메시아에 대한 시각에서 찾은 바 있습니다. 유대교는 여전히 메시아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지만,기독교는 이미 기다리던 메시아의 강림을 믿고 있다는 것이지요. 십자가의 죽음이 이를 확증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그저 넋놓고 기다리는 신앙이 아니라,이제 구원을 받은 자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소명 의식이라는 겁니다. 이를 그는 “참을 수 없는 부담”을 지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이것이야말로 “깨어있으라(눅21:36)”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유언을 지키며 사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를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 사건입니다.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구원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약속 사이에는 하나의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바로 “참을 수 없는 부담”을 짊어지고 사는 우리의 새로운 소명입니다. 거룩한 책임감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지요.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역사하시도록 의지하는 철저한 자기버림의 신앙입니다.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얻은 부활의 선물을 받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세입니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이 부르신 종들을 교회의 직분자로 임명하고 함께 축복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교회의 봉사자로 부름을 받는다고 세상의 직분처럼 위신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무 값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곤란합니다. 아무리 땅에 떨어진 교회의 권위라 해도, 직분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의 지체로 특별히 부름을 받는 일입니다. 그만큼 영적인 위신이 주어진다는 뜻이지요. 다만 교회의 직분은 관심을 더 많이 받고, 영향력을 그만큼 크게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부담을 지고 더욱 더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며 헌신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임직하는 모든 분들이 “참을 수 없는 부담”을 안고 주님의 섬김에 헌신하며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더불어 부활의 기쁜 소식을 함께 전하며, 증거할 수 있도록 쓰임 받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도 함께 격려하며, 오늘 이 고백과 결단의 순간을 증거하여 그리스도의 핏 값으로 세운 교회가 더욱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도록 동참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와 함께 부활의 열매가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삶 가운데 풍성하게 맺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