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양

요한복음 10:22-30

 

<어린 왕자>로 잘 알려진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저서 <인간의 대지>에서 인간성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야. 그것은 자신과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비참함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이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는 인간성의 본질을 책임이라는 말로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의무라는 뜻으로 자주 사용되기도 하는 말이지만, 그가 말한 책임을 ‘공감’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사용해도 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그가 누구이든 그가 가진 감정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소통의 상태, 그것이 바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일이라고 본 것이지요.

 

저는 이 부분에서 성경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됩니다.로마서 12장 15절의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공감’에 관한 권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생텍쥐페리의 표현대로 바꾸면, 책임지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예수님은 이 책임을 계명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공감을, 그리고 사랑하라는 명령을 통해서는 책임을 이야기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께서 몸소 실천해 보여 주셨지요.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죄 가운데 고통받는 우리의 간구에 대한 주님의 반응이었습니다. 공감의 증거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를 향한 대속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책임의 완수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죽기까지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의 고난은 한마디로 대속의 사랑을 완수하기 위한 주님의 거룩한 책임이었던 셈이지요.나아가 주님이 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공감과 책임의 완수를 통해 사랑을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힘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성도의 사명이라고 보신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데 있어 한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그것은 우리의 공감 능력이 늘 한계에 부딪치기 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기 보다, 부단한 노력을 요구하는 일입니다.그래서 생텍쥐페리도 책임을 이야기한 것인지 모릅니다. 책임이 없이는 공감도 어렵고,따라서 사랑도 쉽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의 몸처럼 여기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 아닐까요?그나마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유효기간이 긴 책임과 사랑, 곧 공감은 한 몸을 이룰 때나 가능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17장 21절 말씀을 보면,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도 이 방법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포도나무의 비유처럼,하나님 안에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이야말로 믿음이 성취되는 모습이라고 보셨던 것이지요. 서로 하나가 되어 공감할 수 있는 상태가 될 때, 비로소 마음이 굳은 이들조차 이를 믿게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신 것 아닐까요? 

 

오늘 말씀은 이를 보여주는 한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많은 유대인들이 예수께 진정 그리스도가 맞는지를 묻는 이야기입니다. 오래 전부터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메시아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끝내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구원자였습니다. 힘으로 그들을 짓밟고 있던 제국의 힘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일어날 시온의 왕국을 기대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라고 주장하는 예수님의 정체가 미덥지 못합니다. 아니, 믿음이 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불경한 언행을 일삼는 거짓예언자처럼 보이기 까지 했습니다.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를 처벌하기 위해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를 묻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희가 말한 그리스도가 맞다는 자기 시인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겁니다. 어차피 신뢰하지 않는 이들에게 그들을 만족시킬만한 정답은 애초에 없을 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미국의 인구센서스 조사에 관한 기록을 읽다 보니까, 반세기 전만 해도 사람들에게 묻는 질문 중에 “당신 미친 것 아니냐?”는 문항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이 질문에 대해 얼마나 객관적이고 납득할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미친 사람이 그렇다고 이야기 할지도 의문이지만, 미친 상태에 대한 정의도 불분명해서 대답하는 사람의 주관적 판단만 가지고 그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 이미 객관성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결과를 믿는 사람도 많지 않게 되겠지요. 

 

예수께서 직접적인 대답을 주시지 않은 이유를 또 다른 각도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노자 도덕경의 가장 첫 장에 나오는 말은 그 의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요.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라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풀이하면 우리가 말로 부르는 도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한 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말이라는 것이 갖는 한계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말로 그 의미를 다 담아낼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맞는가 정체성을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빗겨 대답하신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의 메시아 상을 갖고 있으니, 대답을 준다 해도 자기방식대로 이해하여 오히려 오해만 더 커질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가의 여부를 직접적으로 대답하시기 보다, 그가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통해 알려 주시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어떻게 불리는가 보다, 그리스도가 행할 본질적 역할이 더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미 그 일,곧 하나님의 일을 증거해 보여주셨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몰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복음을 선포하고, 표적을 행해 보여주셔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똑같은 일을 경험하면서도, 주님의 양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을 갖는 반면 주님의 양이 아닌 이들은 의심으로 인해 결코 믿지 못한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신 내 양은 이미 정해진 특정한 양을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누구는 날 때부터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구별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사실 모든 양은 다 주님의 양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양은 모두가 다 그분의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내 양이라고 구별하여 지칭하신 것은, 목자의 소리를 구별하여 듣고 따르는지 그 여부를 밝힌 것이지요. 말하자면 주님의 양이 되는 것은 모든 이에게 주어진 동일한 은혜입니다.그런데 그 은혜를 알고 따르는 믿음에 의해서 주님의 양으로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성도라 불리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세상과 구별된 자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애초부터 주님이 말씀하신 내 양의 범주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하나님의 은총에서 벗어난 이들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성도로서 세상의 풍조를 따르는 사람들과 구별이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 구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예수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 비유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목자의 소리를 듣고 구분하여 따르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지요.양은 자기 목자의 소리를 분간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숨은 보화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다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도 그런지는 의문이 가는게 사실입니다.도대체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스스로 당혹스러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마치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며, 나는 타고난 능력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어디서 주어 온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목자의 소리를 분간할 수 있다는 것은 후천적인 경험과 훈련이 병행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갖는 것에는 개인의 실천적인 의지와 노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믿음을 인간의 의지로만 보아서도 곤란합니다.그것은 율법주의의 폐해처럼 믿음도 개인의 행위로 보아서, 결국 구원을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하여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을 수 있는 것도 받은 은혜인 셈이지요. 그러니까 목소리를 분간할 수 있는 능력도 주님이 주신 은혜라는 이야기입니다. 바꾸어 말하면,목자를 구별하는 것도 사랑의 열매로 나타난 것이란 뜻입니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울지 모르겠습니다.지난 주에도 우리 교회 송보름 집사님이 첫 아이를 출산하여 병원 심방을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늘 신생아를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갓난 아이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아는 것들이 있습니다. 반응한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습니다.여하튼 아기는 엄마의 심장박동 소리와 체취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의 가슴에 가까이 다가가면, 본능적으로 반응을 한다는 것이지요. 엄마의 배 속에서 9개월 동안 한 몸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게 가능하다는 겁니다.그 결과 엄마와 아기 간에 공감의 정도 역시 매우 크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편으로 이것은 점차 엄마에게 모성으로 나타나고, 아기에게는 엄마와의 애착을 강화시키는 일종의 기제로 작용한다고 합니다.

 

아빠와 달리 본능적으로 아기의 상태를 공감하는 능력이 엄마에게 특별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요. 그만큼 아기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다는 증거입니다.달리 말하자면, 아기를 향한 사랑이 그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주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라고 우리의 관계를 비유하신 까닭도 이와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본래 포도나무의 관계처럼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라는 겁니다.다만 죄로 인해 떨어져 나간 가지들, 곧 목자의 소리를 듣지 않고 제 갈 길로 떠나버린 양들이 발생해 그렇게 보이지 않는 현실이 생긴 것 뿐이지요. 그래서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면서 동시에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할 우리의 책임이라는 말씀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주님은 한 순간도 자신의 양같은 우리를 그의 시야에서 버려두지 않으시는 신실한 목자라는 점입니다. 그 사랑과 돌봄은 우리 인간과 달리 유효기간이 없다는 것이지요. 마치 갓난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진 자리 마른 자리 가리지 않고 아기를 위해 애틋한 사랑을 보여주는 엄마의 지극한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금새 사라져 버리는 유효기간이 정해진 모습이 아닙니다. 자신의 양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도 유효기간이 없는 한량없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있기에 우리의 공감 가능성도 유효기간이 없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 남은 것은 그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 우리의 책임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받은 은혜에 걸맞게 책임 있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이유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내 양이라 부르시는 주님의 그 애틋한 마음을 공감하면서, 교회다운 교회, 성도다운 성도, 무엇보다 값없이 주신 생명의 소중함을 지켜 나가는 진정한 참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