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짓기

요한복음 14:27-29

 

테네시주의 멤피스 고등학교에 다니는Tupac Mosley라는 학생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홈리스 생활을 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약 300만불의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했다는 소식이 방송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우연히 공항에서 그 이야기를 보게 된 저는 같이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던 동료 흑인 목사님에게 이에 대해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공부는 안하고 불규칙한 생활로 빈둥거리는 아들이 못마땅하던 차에 그 목사님은 해당 뉴스를 캡처해서 텍스트 메시지를 아들에게 보냈습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2009년도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 사진과 함께, 그때 오바마 대통령의 나이가 아빠와 같은 48세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버릇 좀 고쳐 보려다가 오히려 아들에게 되레 한방 먹은 격이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남과 비교하여 자신이나 누군가를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집안 일을 잘 돕지 않는 남편이 불만스러울 때마다 가정적인 옆집 남편의 예를 드는 아내가 있습니다. 그 순간 그 말을 듣고 있는 남편은 속으로 늘 고분고분해 보이는 옆집 부인과 비교하지요. 성적이 늘 떨어져 걱정인 자식에게 공부 잘하는 친구 아들을 이야기하는 순간, 자식은 언제나 말없이 따뜻하게 품어주는 친구 부모님을 떠올리곤 하지요.물론 비교를 통해 도움이 될만한 목표나 동기를 얻는 것처럼, 비교는 우리 삶에 긍정적인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비교를 통해 끊임없이 욕망을 채우려고 할 때 나타납니다. 사실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잡히지 않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가서면 멀어지고, 손에 쥐면 더 이상 욕망의 대상이 아닌 경우가 많지요. 그러다 보니 한도 끝도 없이 커져만 가고, 그만큼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허무함이라는 상처를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그렇다고 욕망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인간에게 적당한 욕망은 삶의 활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욕망도 일종의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망이나 바램 혹은 기대가 그렇지요. 이것 없이 사는 사람은 생기를 잃어버린 모습이라 할 만큼 삶의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욕망은 있으나 없으나 문제가 되니 말입니다. 그저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적당하게’라는 말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적당히’라는 말 자체가 애매한 개념입니다. 마치 손맛의 비법을 묻는 며느리에게 적당히 양념을 넣으라고 가르치는 시어머니의 말 같다고나 해야할까요? 결과적으로 보면, 남이나 다른 대상과 끊임없이 비교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래서 생기는 것이지요. 절대적인 기준이 없으니까,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것 말고는 뚜렷한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삶의 방식이나 목적이 어느 한 방향으로 일정하게 정의되는 직선적인 사고와 달리, 불명확하고 환원되는 듯한 상태를 동양사회에서는 흔히 원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Circle of Life’라는 말처럼 돌고 도는 환원적인 상태라는 것이지요. 성서에도 이러한 질문을 야기하는 내용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1장 8절의 말씀에 나오는 “땅 끝까지”라는 표현이 그 중 하나입니다.당시에는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때니까 그렇다 쳐도, 지금 성경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그 “땅 끝”이라고 하는 곳은 도대체 어디를 뜻하는 것일까요?원을 그려놓고 생각해 보면, 그 대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금새 알 수 있습니다.단 한가지 방법 이외에는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없지요.

 

바로 시작점을 정하는 것입니다. 원이 시작하는 지점을 어디든 정하면 끝도 알 수 있는 법이니까요.그런데 흥미롭게도 원은 시작점이 곧 끝점이라는 특징을 갖습니다. 시작이 곧 끝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셈이지요. 그러니까 땅끝은 바로 내가 선 자리, 곧 출발선이기도 한 셈입니다. 자기 변화 없이는 세상의 어떤 변화도 생각하기 어려운 까닭이 이것입니다. 이미 이 말 안에는 끊임없는 스스로의 신앙적 결단과 노력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매듭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매듭을 짓는다는 것이 결국은 그 시작과 끝을 결정짓는 중요한 결단이자 모멘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은 매듭을 짓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활이라는 새 생명의 시작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매듭을 통해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회개와 세례는 옛 사람이 죽는 매듭 짓기를 통해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매듭을 짓는 것은 우리 삶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는 신앙의 중요한 여정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인간이 욕망을 적당한 수준에서 통제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 매듭짓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욕망에 대한 매듭을 짓지 않았기 때문에, 끝이 없이 반복이 된다는 겁니다. 끝이 없으니 변화가 어렵고, 그러다 보니 결핍과 불만족은 쌓여만 가는 것이지요.밑 빠진 항아리처럼 끝이 없는, 다시 말해 매듭이 없는 욕망은 결코 만족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의 평화와 다른 평화를 주실 것이라 약속하시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평화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이레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로부터의 자유함’혹은 ‘그 자유함으로 인해 얻는 평안함’ 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쓰시면서 예수님은 세상의 평안과 자신이 줄 평안은 다른 성격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평안은 여전히 걱정과 두려움을 남겨두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완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불완전하여 진정한 자유를 갖지 못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서의 평화나 평안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평화의 개념을 둘로 나누어 설명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구별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은 말그대로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개별 인간들이 주체가 되어 사는 공간을 뜻합니다. 개인들이 욕망의 주체가 되는 곳이지요. 그래서 개인들이 스스로 만족스럽거나 편하면 평안을 느끼지만,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그 때부터 걱정과 근심이 시작됩니다. 완전하지 않으니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안감을 주기 때문이다.

 

개인이 주체라고 하더라도 세상은 혼자만 사는 공간이 아닙니다. 그러니 자기 맘대로 모든 것을 누리거나 행할 수 없지요. 평화라는 말의 한자어를 풀이하면, 벼를 함께 골고루 나누어 먹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욕망을 가진 개인들이 서로 함께 골고루 나누며 산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지요. 게다가 서로를 늘 비교하면서 평가하려는 욕망의 특성때문에,스스로 만족하며 평안한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비교를 통해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싶은 욕망은 말처럼 잘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으로 커져 버리는 속성이 있지요. 그러니 걱정과 근심이 지속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늘 불만족스러우니 말입니다. 무엇을 마실까 먹을까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는 것이지요. 세상이 주는 평안은 늘 한계를 갖기 마련이니 거기에 목적을 두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진정한 평안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있으니,그래서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되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근본 방식이자 유일한 목적인 것이지요. 그래서 세상의 방식과는 다르게 작동합니다. 세상에서 처음 된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나중이 될 수도 있고, 세상에서 가난한 자가 오히려 더 부요할 수 있는 나라, 곧 세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더 분명하게 가르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이라는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있는 중심이 분명하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12절에서 바울이 한 표현대로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보는 듯 같이 희미하지만,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세상과 달리 확실하고 완전한 판단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만큼 매듭을 확실히 질 수 있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지요. 우물쭈물하는 신앙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말입니다. 

 

세상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소유하거나 아니면 남과 비교하며 얼마큼을 가지고 있는가를 가지고 삶의 만족도를 따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욕망의 대상이 되는 먹어야 할 무엇,입어야 할 무엇, 마셔야 할 무엇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나 더 소유하는지의 문제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마치 무인도에서 신용카드가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임재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지요. 예수께서 자신을 일컬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신 까닭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은 완전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평화요 평안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완전함 속에 있으니 우리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평온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몫도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의 자유함을 갖는 것이지요.달리 표현하자면 세상과 구별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 매듭을 지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기 위해 매듭을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기 위해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서 불필요한 껍데기는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삶을 사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세상의 온갖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평화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신학자인 라인홀트 니버의 유명한 기도문에도 이를 잘 드러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저는 매주 예배에 들어오기 전에 이 기도를 읽고 묵상의 시간을 갖곤 하는데, 그 일부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주여, 제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평온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와

마땅히 바뀌어야 하는 것들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을 구분할 줄 아는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니버는 세상의 영역에서는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하나님께 온전히 맡김으로써 평온함을 얻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분별력을 가지고 분명하게 선을 긋고 행하는 용기를 가지라고 말하지요. 그는 이 둘을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을 지혜라고 합니다.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의 평화와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지혜가 매듭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논리를 구별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의 훈련이라고 보았던 것이지요.

 

흔히 성공하는 사람들의 방식이라 알려진 말 중에 “연습은 실전처럼,실전은 연습처럼”이라는 구호가 있습니다. 성공적인 신앙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를 살듯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 안에서 매듭 짓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며 사는 복된 삶입니다. 이번 한 주도 하나님 나라를 살면서 참된 평안을 누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