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같은이야기

요한복음20:1-18

 

세상에단하루만나타났다사라지는나라가있다고한다면여러분믿으시겠습니까? 만우절인4월1일하루만존재한다는그나라의이름은“우주피스(Uzupis) 공화국”입니다. 북유럽에위치한리투아니아의수도빌뉴스에있는작은마을에그나라가존재한다고합니다. 그런데딱하루만세상에모습을나타낸다고하니신기하지않습니까? 사실우주피스는작은마을의이름인데, 2차세계대전이후빈민가로전락한마을에예술가들이모여들면서, 정말거짓말같은나라를만들어보자는취지로시작한것이라고합니다. 

만우절을이용해스스로독립을선포하고, 하룻동안필요한장관들도선출하고헌법도만들었다고하니제법국가의형태를갖춘것이라볼수도있을겁니다. 그런데헌법의조항이하나같이흥미롭습니다. 누구나사랑할권리,누구나행복할권리,누구나실수할권리,누구나행복하지않을권리등등처럼무언가를금지하기보다모든생명체가소중한삶의의미를누릴수있는매력적인법을만든것이지요. 비록단하루만이라하더라도. 이로인해나머지364일을희망으로견딜수있는힘을줄테니말입니다. 이처럼가장암울한빈민촌이사람답게살아가는이상적인나라로변할수있는거짓말같은이야기가지금도우리의현실어디선가에존재하고있습니다.  저는오늘여러분과부활의의미를통해이것이더이상만우절의거짓말이아니라는사실을함께나누어보고자합니다.

오늘은부활주일이면서동시에만우절이기도합니다. 믿음이없는이들의시선으로보면둘의공통점이되는한가지단어가있습니다. 바로거짓말입니다.  거짓말같은이야기로들리거나아니면진짜거짓말이라는차이점만빼고말이지요. 예수님의부활사건을접한당시의많은사람들은아마도거짓말같은이야기로생각했을가능성이높습니다. 본문9절말씀을보면, 실제빈무덤에가서현장을목격한제자들조차부활에대해확신을갖지못했던것으로보일정도니말입니다.

안식일다음날막달라마리아가예수님을장사한무덤으로찾아갑니다. 그리고그곳에서무덤을막고있던돌이옮겨져있는것을보고는놀라서예수님의제자들에게달려와그사실을알립니다. 아마마리아는누군가예수님의시체를옮겼다고직감했던것으로보입니다. 이소식을들은제자들도한걸음에달려옵니다. 그중에베드로가무덤안에들어가보니예수님의몸을두르고있던  세마포와수건이가지런히개켜있었습니다. 그들은무덤이비어있었다는사실을눈으로확인한것입니다. 8절에서또다른제자인요한이보고믿었다고한말의의미를명확히알수없는것도바로이때문입니다.

왜냐하면무덤이비어있다는것을보고그들이믿었다고한것은도대체무엇을뜻하는것일까요? 한마디로그들은뭘믿은걸까요? 엄밀한의미에서무엇을믿었다는직접적인표현보다요한과베드로는예수님의시신을유대인들이감쪽같이빼돌리지는않았을것이란사실에안도를했던것으로보입니다. 마태복음27장64절에기록되어있듯이, 대제사장들과바리새인들이빌라도에게예수의제자들이예수의시신을도둑질한뒤에그가죽은자가운데서다시살아났다며거짓말을퍼뜨릴지모른다는말을하는대목이있습니다. 그러면서시체를몰래빼가지못하도록철저하게무덤을지키고있어야한다는주장을했습니다. 이를알고있던제자들도유대의종교지도자들이이모함을역이용하여예수님의시체를도둑질한뒤에악한짓을꾸미지는않을까노심초사하고있었습니다. 그러한이유인지는몰라도마태복음27장61절에기록된것처럼, 막달라마리아를비롯한여인들도무덤을지키고있을수밖에없었던것으로보입니다. 

때문에빈무덤에놀란것은제자들이나유대의종교지도자들이나똑같았을겁니다. 다만요한이보고믿은것은가지런히개켜있는수의를보고,적어도그들이시신을마구잡이로도적질하지는않았을것이란안심을했던부분이었을가능성이큽니다. 게다가9절의말씀에서도지적하고있지만, 제자들도아직부활에대한믿음을갖지는못했던상황이었습니다. 사실빈무덤과부활을직접적으로연결지어생각하는것이쉬운일은아니지요. 적어도부활에대한믿음이없거나믿어도잘못된이해를갖고있는이에게는말입니다. 무덤이비어있었기때문에부활을믿는다고하기에는어딘가논리적비약이라는생각을하지않을수가없습니다. 왜냐하면그것은주님의부활을마치죽은나사로가되살아나는장면을연상하듯무덤을열고나오는모습으로생각할때만가능한이야기이기때문입니다. 

아마이것이제자들을그냥자기집으로돌아가게만든이유인지도모릅니다. 이때까지도그들은예수께서이미예고하신부활을직접적으로떠올리지는못했던것이지요. 그런데이러한상황을표현한본문10절의말씀이흥미롭습니다. 말씀에의하면제자들이그냥자기집으로돌아갔다고기록되어있는데, 여기서사용된자기집이라는단어의원어“ἑαυτοῦ (heatou)”가“자기자신”이라는뜻으로도사용되고있기때문입니다. 한마디로제자들은자기자신에게로되돌아가버렸다는뜻입니다. 본래제자의길이란자기를부인하는것입니다. 그런데이들은지금다시원래자기에게로돌아가버렸다는것이니, 제자로서의본분을잃어버린것이나마찬가지의상태가된것이지요. 그리스도를자기안에모시지않은상태가되어버린겁니다. 정작빈무덤이된것은바로제자들의마음상태였던겁니다.

이러한영적인공백상태가가져올한가지질문은매우분명합니다. 그것은바로“주님어디에계십니까?”라는질문입니다. 빈무덤에찾아간막달라마리아나제자들의질문도똑같은것이었습니다. 어디계신지모른다는것이었죠. 그리고그질문은여전히우리삶속에서부활하신그리스도를자기안에모시지못하고살아가는모든사람들의똑같은질문이기도합니다. “도대체주님지금어디에계십니까?”

정말거짓말같은이야기는예수님이부활하셨다는그말이아니라, 오히려믿는다고하는사람들조차사실은주님이어디에계신지모른다고하는모습이아닐까요? 자기안에계셔야할그분을모시지못한것, 아니더정확하게말하자면자기안에이미함께계신그분이어디있는지모른다고잡아떼는것이야말로거짓말같은이야기가아닐까요? 그런의미에서오늘날우리시대의비극도“예수없는시대”를살고있다는사실아닐까요? 도대체어디서예수님의흔적을찾아야될지도모르는현실, 그래서교회에서조차예수를찾지못하는거짓말같은이야기가실재처럼벌어지고있는것은아닐까요?

결국예수님을찾아야할제자들이떠나간것처럼교회도오히려제갈길로만가고있었던것은아니었는가되돌아보지않을수없는현실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놀랍게도예수님의부활을깨닫게된순간역시제자들의노력이나자각에의한것이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직접그들을찾아와불러주시기전까지그들은전혀알아보지못했습니다. 울고있던마리아가예수님을알아보게된것도주님이직접찾아와그를불러주었을때였습니다. 두려움에떨고다락방에몸을숨기고있던제자들이예수님을알아보고부활을믿게된것도주님이그들을먼저찾아주신이후였습니다. 한마디로자기중심적삶으로돌아간제자들스스로주님을다시모신것이아니라예수님이직접그들의마음에찾아와주셨다는뜻입니다. 

이것이야말로정말거짓말같은이야기가아닌가요? 믿으려하지않을뿐만아니라, 오히려배신까지서슴지않았던자들을위해다시찾아와구원의길로인도해주셨다는말이세상의시각에서보면이해가가지않기때문입니다. 살아서도세상의눈에는정말이해하기어려운모순된말씀만전하시더니, 죽기까지우리를향한한없는사랑을끝까지보여주신것이지요. 열가지잘해도하나만못하면뒤틀려버리는인간관계를살고있는현실의우리에게는정말거짓말같은이야기처럼들립니다. 하나잘해주고그것을이자부쳐서돌려받지못하면억울해하는우리에게한없이불합리해보이는거짓말같은이야기가아닐수없는것이지요. 

그런의미에서부활은이거짓말같은이야기가현실로실현된사건이라할수있습니다. 우리를향한끝없는사랑의완성입니다. 결코우리를 포기하지않으시겠다는, 정말믿기힘든사랑을한없이베풀어주신은혜의사건입니다. 그리고이를통해주님은그의자녀들이다시주님께로되돌아오기를요청하셨습니다. 그것이바로희망을잃어버린시대에죄악과어둠을이기고생명을살리는희망의길임을가르쳐주셨습니다. 더이상희망이보이지않는다고생각하는그순간에도사람답게살아갈희망을발견할수있다는정말거짓말같은이야기를우리에게가르쳐주신것입니다. 오늘부활의소망을품은우리교회와성도들에게도똑같은요청을하고계십니다. 예수님이우리와함께하는공동체를만들어나가야합니다. 이를증거하며살아야합니다. 부활을통해우리를찾으시고불러주신것처럼, 우리도그리스도의발자취를따라서로를찾아불러주는사랑의공동체가되어야합니다. 그래서거짓말같던이야기가이땅에서더이상거짓말처럼들리지않는참하나님의나라를이루어가는우리모두가될수있기를소망합니다. 

 

 

빈틈이 준 선물

마가복음11:1-11

 

오늘은 고난주간의 시작이자 동시에 종려주일이기도 합니다. 종려주일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종려가지를 흔들었다는 요한복음의 기록에서 그 명칭이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다른 복음서에는 종려가지란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오늘 본문을 보더라도 나뭇가지로만 되어 있고, 그것도 흔든 게 아니라 길에 깔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소 서술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 부분을 복음서 전체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까닭은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이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는 그만큼 불가피한운명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반증해 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마가의 기록은 나귀 새끼와 관련된 내용에 상당부분 이야기를 할애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는 뜻입니다.다른 복음서에서도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하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역사적인 사실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하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이 장면은 다소 의아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나귀는 짐을 나르기 위해 사용합니다. 더군다나 나이 삼십이 지난 성인 남자가 자신 보다 작아 보이는 어린 나귀를 타고 길을 간다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귀 이야기를 강조한 것은 그것이 구약의 예언을 통해 이미 알려져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스가랴9장 9절의 말씀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나귀를 타고 오시어.”마가는 바로 이 스가랴의 예언을 간접적으로 인용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다시 말해 예언 그대로 실현되었다는 뜻입니다.

비슷한 내용이 창세기에도 등장합니다. 죽음을 앞둔 야곱이 아들들에게 남긴 유언에서 이와 관련된 구절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9장 11절에 보면, “포도나무에 나귀를 예사로 매어놓고 고급 포도나무에 새끼 나귀를 예사로 매어 두리라”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장차 왕으로 오실 메시야가 오실 때 포도나무에 나귀를 미리 매어 놓는다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나귀를 타고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을 하신다는 이야기는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라 이미 예언된 사항이 그대로 성취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거나, 나뭇가지를 길에 깔고 “호산나 복되시다!”라고 소리를 치며 예수님을 맞이할 때는 이러한 예언의 성취에 대한 확신도 한 몫 거들었다고 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해도 여전히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입성의 장면은 누구든 당시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자나 영웅적 카리스마를 지닌 장수의 개선 행진을 먼저 떠올리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복음서의 기록도 이를 증명해 줍니다. 사람들이 나뭇가지와 겉옷을 길에 깔았다는 것은 당시 왕의 행렬 앞에 행하는 일종의 의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왕의 행렬과 새끼 나귀의 부조화를 감수하면서까지 이렇게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아니 예수께서는 왜 이러한 방법을 택하신 것일까요? 단순히 구약의 예언을 따라야 사람들이 알 수 있을 것이란 이유 때문에 그렇게 행한 것일까요? 혹 그렇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또 다른 특별한 이유나 목적이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실 위에서 언급한 스가랴의 예언은 세상의 정복자와는 달리 장차 오실 메시아는 평화의 왕으로 오실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는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메시아의 모습을 전쟁의 무기를 없애고 참된 평화와 공의를 가져다 줄 분으로 기대했던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한다는 생각도 기존의 개선행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나타내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새로운 세상과 방식이 열리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세상은 힘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힘이 있으니 더 화려하고 위용을 드러낼 수 있는 모습으로 과시하는 것은 당연한 모습입니다. 우리도 은연 중에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지요.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는 세상의 시선으로는 그 편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새끼 나귀를 타고 향한 곳도 예루살렘이라는 도성이라는 사실입니다.예루살렘은 성전과 왕궁이 있는 곳으로 유대사회의 가장 상층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지역이었습니다. 성전과 왕궁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누리던 지배층이 모든 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도시였던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힘의 논리를 재생산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약자는 언제나 그들의 통제 하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생각이나 가치관 조차도 만들어진 세상의 방식에 길들여진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지난 주 한국에서는 전직 대통령이 뇌물수수를 비롯한 여러가지 죄목으로 구속되는 사건이 또 일어났습니다. 일년을 사이에 두고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가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이미 전두환, 노태우 두명의 전직 대통령은 중형을 선고 받고 지금은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지위를 모두 잃은 상태이니, 생존하는 전임 대통령 중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퇴임생활을 하는 이는 하나도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국가적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이번에 구속된 이명박 전 대통령은 IMF 이후로 민생의 어려움을 겪던 국민들에게 자수성가의 모델이자 무너진 경제를 다시 회복시킬 것이란 희망으로 선출된 대통령이었습니다. 모두가 다시 잘 살 수 있는 성공적인 경제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국민들의 기대를 받았던 겁니다. 하지만 결국 국민을 잘 살게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혼자 잘 사는 일에 나름대로 성공한 대통령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 대통령의 개인적인 배경을 생각해 보면, 과연 이것이 그 혼자만의 문제일까라는 의문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물론 제가 한 개인을 변호하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개인의 욕망과 성공이라는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들을 잃어 왔는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의 성공담은 많은 사람이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주경야독을 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온갖 일을 다하는 억척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아마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도 이와 똑같은 경험을 하며 삶에 최선을 다 기울였을 겁니다.그러나 그 가운데서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손에 꼽을 만한 소수의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계층의 사다리 끝까지 오를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입니다. 이후의 세대에게는 따라가야할 모범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산업화를 거치며 우리 사회 모두가 공감하는 삶의 목표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금번 이 전대통령의 뇌물수수 혐의와 관련해서 언급된 삼성이라는 대재벌에 대한 우리의 시선도 마찬가지에서 볼 수 있을 겁니다. 회사의 광고카피이기도 했던, “일등주의”는 어쩌면 말은 안해도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의 모습이었던 것이지요. 성공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무한경쟁과 성공주의가 우리의 가치관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만큼 말입니다.

지난 주 한국에서는 소위 로또 청약이라고 불리는 아파트 분양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개장을 앞두고 줄을 늘어 선 사람들의 길이가 1Km를 넘었다고 하니, 여전히 인생 대박을 꿈꾸는 한국 사회의 성공주의는 대통령 한사람의 구속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사람들도 이제 다 아는 것이지요. 열심히 일만 해서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히려 성공신화는 이 대통령과 같은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성공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미련하리만큼 열심히 살면 될 수 있을 것이란 사람들의 이야기 아닐까요? 이제는 신화처럼 이루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오래 전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평범하게 자신의 삶에 충실히 사는 것이 인정 받지 못하는 세상. 성공을 위해서는 편법과 일탈을 눈감아 주는 세상. 오히려 잘못된 불의에 대해 지적을 하는 이가 더 욕을 먹고 “정말 팍팍한 인간”이라며 구석으로 내몰리는 세상.어쩌면 나귀 새끼를 타고 향했던 당시의 예루살렘과도 같은 모습인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자, 한 번 보라고. 성공이 최상의 목표인 너희 눈에 이처럼 보잘 것없는 모습이 또 어디 있느냐고. 그런데 하나님은 이 보잘것없는 모습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실 것이라고. 그것은 소수의 몇명만 잘먹고 잘사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기뻐하며 평화를 누리는 새로운 세상이라고. 힘이 조금 없어도, 가진 것이 조금 부족해도, 생긴 것이 조금 못나도 열심히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삶의 행복을 누리는 그런 세상을 주실 것이라고. 적어도 내 가족을 위해 지금 비록 가난해서 많은 것을 줄 수 없지만, 열심히 땀흘리며 일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또 그런 부모님을 보며 자식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세상.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오히려 사람들 보기에 미안하고 부끄러워지는 그런 세상. 바로 그런 세상을 위해 내가 왔노라고 말입니다.”

제주도에 가면 여러 곳에서 돌담을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제주를 흔히 삼다도라고 해서 돌, 바람, 여자가 많다고 하니 놀랄 일도 아닙니다. 요즘에는 남자의 수가 급증해서 이제 여자가 유난스럽게 많다는 말은 옛이야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바람과 돌은 자연적인 현상이라 그런지 지금도 제주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돌담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돌담의 모습이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빈틈이 너무 많기 때문이지요. 그냥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것처럼 가지런한 모습이 아닙니다.보통 담벼락을 만들때는 시멘트를 사용하면서까지 한치의 틈도 없이 메꾸어 쌓아 올리는데, 제주도의 돌담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멍이 숭숭 난 것처럼 빈틈이 많다는 특징이 있습니다.그 이유는 바로 바람 때문입니다. 바람이 강하게 그것도 자주 불기 때문에 일부러 빈틈을 두어 담벼락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빈틈으로 지나가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던 이들에게 그가 타고 온 새끼 나귀는 빈틈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성공이라는 신화 속에서 경쟁력이 없어 보이는 자신의 배경, 능력, 외적인 모습이 마치 빈틈처럼 느껴지듯 말입니다.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만들어가실 새로운 세상의 모습은 그 빈틈도 의미 있는 곳입니다. 오히려 그 빈틈을 통해 사람 사는 진정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빈틈 없이 보이듯 빡빡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인정없는 세상이 한번의 풍파에 무너질지 모르지만, 주님이 만드실 나라는 결코 쉽게 무너지는 법이 없습니다. 조금은 바보 같아 보일만큼 순진한 빈틈이, 자신을 채우고 내세우는 것 보다 다른 사람을 돕고 나누며 내 자신을 내어주는 그 이타적 빈틈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공고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을 환영합니다.우리 삶의 작은 빈틈 조차도 소중한 의미로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아멘. 

 

꽃과괴물

꽃과괴물

요한복음2:13-22

 

“내려갈때보았네/  올라갈때보지못한/ 그꽃”

 

내용은아주짧고단순한데, 의미하는바를곰곰히되새겨보면그깊이가느껴져서감탄을하곤하는시입니다. 분명산을오를때도거기있던꽃인데, 오르느라정신이팔려보지못했던꽃을정작내려오는하산길에서야보았다는싯구절은우리인생의단면을떠올리게합니다. 그러고보면살다가많은소중한것을놓치고사는경우가많습니다. 저는미국에오기이전에한국에서참정신없이살았습니다. 학자의꿈을안고살던그때,새벽같이나가서밤늦게녹초가되어서야되돌아오곤했습니다. 그러다보니소중한것하나를놓치고있었다는사실을나중에야깨닫게되었습니다. 바로첫아이가자라나는모습이었습니다. 다시는돌아갈수도없는그소중한순간에대한기억을놓치고살았던것이지요. 사실그게얼마나소중한것인가는그땐몰랐습니다.아이가다커서대학을졸업할때가되니, 이제야어릴적딸에대한기억의소중함을깨닫게된것이지요.

 

누구나공감할수있는이야기를이렇게짧은시어에담아표현한다는것은결코쉬운일이아닙니다. 그래서이러한시를쓸수있는시인을사람들은부러움과존경의마음으로보는것아닐까요? 실제로“그꽃”이라는제목의이시를쓴시인은한국문학계를대표하는문인으로잘알려진사람입니다. 매년노벨문학상후보로거론될만큼유명한시인입니다. 그런데얼마전또다른시를통해그의존재가다른모습으로나타나게되어화제가된일이있었습니다. 시인최영미의“괴물”이라는시에서묘사된괴물이바로그였던겁니다. 절대옆에앉아서는안될사람. 젊은여자만보면만지려드는치한같은사람. 하지만문단에서누리는유명세와권력으로피해자의수치와고통따위에는아랑곳하지않는두얼굴의괴물. 그가바로“그꽃”을통해사물과존재의소중한가치를노래한시인고은이었던겁니다.   

 

요즘한국사회에서불고있는“미투운동”을통해사람들로부터존경받거나사랑을받던수많은인사들이성적인가해자의두얼굴을하고있었다는사실이속속들이밝혀지고있습니다. 자신은대중들로부터꽃처럼인정받는존재였지만, 꽃과같이소중히여겨야할타인을성적으로  짓밟으면서도이를깨닫지못하는괴물로둔갑해버린겁니다. 마치두개의상반된인성을가지고있던괴물, 지킬박사와하이드같은존재가되어버린것이지요. 비록지금은성문제를통해알려지기는했지만, 사실이중적성향을보이는내면의모습은특정한사람들에게만국한된이야기라하기어려운것이사실입니다.누구라도꽃과괴물의상반된모습을동시에가질수있다는뜻입니다. 특히자기자신은꽃과같이취급되기를바라면서, 타인에게는유독괴물과같은태도를보이려는사람들이우리사회에얼마나많습니까?도대체왜꽃과괴물이라는전혀어울릴것같지않은두개의속성이한몸안에같이공존하게되는것일까요? 

 

이에대한하나의단서가되는말씀을오늘본문에서찾아볼수있습니다.예수님의성전정화사건에관한이야기입니다.유월절을즈음해서예수님은예루살렘성전을방문하십니다. 그리고그곳에서성전의타락상을목격하시지요.그상태가보시기에매우심각한수준이었습니다. 경건한유대인들에게유월절예루살렘성전으로의성지순례는당연한신앙여정중하나였습니다. 자연스럽게성전의주변은늘수많은사람들로가득찰수밖에없었습니다. 이와함께성전에서는제사와성전세를위해환전상과같은일을맡아하게되었습니다. 멀리서오가는사람들의편리를위해서이러한현금거래소의역할은필요불가피한일이었습니다.그러다보니제물과헌금을마련하려는사람들을위한환전소나물품구입을위한장사치들로성전은늘이권의유혹에노출되어있었습니다. 성전의종교지도자들과시장의이권을취하려는사람들사이에결탁과부정이발생하는경우도다반사였습니다. 

 

예수께서보신성전의모습이더이상거룩한하나님의성전이아니라세상의이권으로얼룩진시장의모습으로보인이유입니다. 다른말로표현하자면, 꽃처럼여겨져야할소중한하나님의집이돈에눈이먼괴물의소굴로둔갑해버린꼴이되어버렸다는겁니다. 16절의“내아버지의집을장사하는집으로만들지마라”는강경한예수님의어조는당시부패해버린성전의상황을그대로보여주는모습이라할수있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괴물로지적받은사람들은자신의잘못을인정하지않습니다. 오히려증거를내놓으라고다그칩니다.  표징을보여달라는것이지요.정말당신이털어서먼지안나는하나님의아들이맞는지보자는요구입니다. 

 

늘그렇지만범죄자나가해자에게잘못을지적하면,대개의경우는사실자체를부인하거나모르쇠로일관할가능성이높습니다. 물론억울하게가해자로지목되는상황이야다르지만말입니다. 여하튼잘못에대해인정을하지않고취하는대부분의범죄자와가해자의반응은증거를대라는주장입니다. 적어도자기스스로인정하지는않겠다는뜻입니다.

 

표징을보이라는유대인들의요구에대한예수님의응답은이것이었습니다.  바로성전을허물고, 사흘만에이를다시세우겠다는약속이었습니다. 이에대한유대인들의반응은한마디로허무맹랑하다는것이었습니다. 허무는것이야그렇다쳐도46년이나걸린성전건축을사흘만에하겠다는말이도무지믿기지않았습니다. 성전에대한시선과해석이예수님과완전히달랐기때문입니다.유대인들이생각하는하나님의집인성전은그자체로표징이었습니다.아름답고거룩한건축물이거기에있다는사실이그들에게는매우중요한부분이었던것입니다.

 

하지만예수님의눈에그들이자랑스럽게여기던성전건물은하나의껍데기에지나지않았습니다. 왜냐하면더이상하나님의집으로서의본분을잃어버리고,돈과 이득을챙기는수단으로밖에는보이지않았기때문입니다. 말하자면꽃이아니라괴물처럼변해버린겁니다. 괴물이되어사람들의혈세를빨아먹고,순수하고연약한이들의마음을기만하여상처를주는상태가되어버린것이지요.그들이예수께보여달라고요구한표증도결국은자기욕망을충족시키기위한수단에지나지않습니다. 결국자기를만족시켜

달라는것이니까요. 다른사람의인기와명예가올라가고, 부가증가하는표증은그들이원하는것이아닙니다. 만일다른사람에게그런행운이따르면, 오히려배만아프고삶의기운이빠지는증세나앓지않으면다행입니다. 

 

그런의미에서예수님이무너뜨려야한다고말씀하신성전의모습은바로괴물로둔갑한이성전을두고하신것이었습니다. 멀쩡하게서있는건물을무너뜨린다는것이아니라, 이를바라보는사람들을괴물로만든바로그마음을허물어야한다는뜻입니다. 고린도전서3장16절에서사도바울은“너희가곧하나님의성전”이라고한바있습니다. 무너뜨려야할대상도그렇지만우리가다시세워야하는성전은바로우리자신이되어야한다는말씀입니다.괴물과같이변하여우리안에있는하나님의집을탐욕과욕정의공간으로만들지말아야한다는것이지요. 하나님의집에는하나님이계셔야하니,자기자신만을향한이기적모습은철저하게부정되어야합니다.내안에그리스도를통해살아계신하나님을위해자기가부인될때, 비로소하나님의성전인내마음은 더이상괴물이안주할수없는거룩한  주님의집이될수있다는것입니다.

 

나아가예수님은성전을허물고다시세우는,부활에대해말씀해주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진정한표징이라는것이지요. 그럴싸한건축물로하나님의집을대신할수는없는법입니다. 자신을만족시킬만한조건이나일들이생겨난다고해서이를하나님의표징이라고부를수도없습니다.진정한표징은그렇게눈으로자기자신의입맛에맞게드러나는성질의것이아니라는겁니다. 성전을건축하거나자기원하는것을취하는방식처럼사람의힘으로행하는것은궁극적으로표징이라말할수없습니다. 

 

부활은오직하나님만이행하실수있는구원의은총입니다. 우리를향해베푸신하나님의한량없는사랑을확증하는표징입니다. 하지만이표징은눈으로볼수있는것이아닙니다.갖고싶다해서덥석잡을수있는것도아닙니다.오직하나님의능력이그리스도를통해임할때얻게되는은혜입니다. 때문에이것은육신의눈이아니라믿음의고백으로만볼수있습니다. 하나님의그크신사랑은오직믿음을통해증거될수있다는뜻입니다.믿음이아닌눈으로만보려한유대인들이그표징을알아보지못한이유이기도합니다.

 

그래서예수께서는표징을볼수있는믿음을갖기위해어떻게해야하는지를우리에게직접알려주셨습니다.먼저자기를부인하라고말입니다. 성전을허물라는것입니다.그리고자기십자가를지라고하셨습니다.하나님의집인자신안에그리스도가주인이된성전을다시세우라는것이지요.그래서갈라디아서2장20절에서사도바울이고백한것처럼, “그런즉이제는내가사는것이아니요오직내안에그리스도께서사시는것이라. 이제내가육체가운데사는것은나를사랑하사나를위하여자기자신을버리신하나님의아들을믿는믿음안에서사는것이라”이야기할수있어야된다는겁니다.

 

이를믿는믿음안에서우리는부활의표징을볼수있게될것입니다.그리고그부활의능력을바라볼수있을때,비로소우리안에괴물과같은옛사람은죽고, 소중한꽃처럼성령으로새롭게변화된새사람이되는역사가일어나게될줄믿습니다.이를통해우리가함께더불어가는이땅에도더이상상처받은영혼과고통받는피해자가생겨나는일이재발하지않게되기를주님의이름으로간절히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일

창세기 17: 15-21, 마가복음 8: 31-34

 

오늘로 지난 2월 9일부터 시작된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수많은 선수들이 15개 분야의 여러 세부 종목에 걸쳐서 자신의 이름과 국가를 대표하여 최선의 경쟁을 벌인 지구촌 축제의 장이 그렇게 마무리된 것이지요. 특별히 금번 올림픽은 우리 고국에서 주최된 까닭에 해외 동포들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시차가 있어 경기를 중계방송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저 역시 마음 속으로 함께 응원하였습니다. 하지만 동계 올림픽이라 그런지 몇몇 종목을 빼놓고는 사실 저에게는 생소한 경기가 많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동계올림픽에 참여하여 메달을 따는 국가는 모두가 지구의 북반구에 자리잡은 나라들입니다. 특히 유럽의 백인들이 주도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에 몇몇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경쟁하고 있는 정도이지요. 한마디로 경제적 수준이 높은 나라들 위주의 대회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래 올림픽의 정신은 경쟁이 아닌 상생과 평화에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를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제적 능력이 없는 국가는 참여하기도 어렵고, 참가한다 해도 들러리로 전락해 버리기 십상입니다. 아마추어 정신을 강조하면서도 올림픽의 뒤에서는 국가간의 끊임없는 경쟁과 이권 쟁탈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다 알려진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올림픽이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될 수 있는 것은 경쟁과 이권쟁탈의  논란 속에서도 상생과 평화의 정신을 굳건하게 지키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여자 스피드 스케이트 500m 결승에서 금메달을 두고 선의의 경쟁을 벌인 한국과 일본의 두 선수가 보여준 아름다운 모습은 퇴색되어가는 올림픽의 정신을 다시금 일깨워준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비록 오랜 역사적 갈등으로 인해 깊이 패인 감정의 골때문에 국민적 정서는 좋을리 없지만, 이를 넘어서 상생과 평화라는 올림픽의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 두 선수의 우정은 감동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경쟁과 갈등으로 얼룩진 우리 현실의 문제를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해결책을 찾게 됩니다. 바로 서로를 향한 배려와 상생의 길을 통해서 말이지요.

특별히 금번 평창 동계올림픽은 남북이 단합을 모색하는 화해의 장이기도 하였습니다. 군사적 적대관계를 벗어나 한반도의 평화를 찾고자 대화와 교류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준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를 두고 많은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굴욕적인 외교의 결과라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평화를 논할 것이 아니라, 선제타격과 같은 군사적 방식을 통해 무력으로라도 제압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가지고 올 엄청난 재앙과 생명 손실에 대해서는 크게 염려하지 않는듯한 주장이었습니다.

정치적 논쟁은 차치하고, 이러한 호전적인 대응과 강경한 태도에 대해 저는 이런 질문이 들었습니다. ‘과연 사람의 힘으로, 그것도 무력을 통해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라고 말이지요.

올림픽의 정신처럼 기독교의 정신을 가장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는 구절이 오늘 신약의 본문인 마가복음 8장 34절의 말씀입니다.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의 길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길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따라 사는 제자의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부인해야 할 자기는 다른 말로 사람의 일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고, 반대로 무거워도 짊어 지고 가야 할 십자가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 다른 성경본문인 창세기의 말씀은 이러한 구별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오늘 본문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전인 13년 전에, 그러니까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기 훨씬 이전에도 똑같은 약속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한 하늘의 별처럼 그를 통해 온 민족을 이루신다는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민족은 고사하고 당장 자신의 유산을 물려 줄 자식 하나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내인 사라는 몸종 하갈을 통해서라도 자식을 갖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게 됩니다. 비록 정실의 자식은 아니더라도 분명 아브라함의 피가 섞인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얼마 안 가 분쟁의 불씨가 됩니다. 언약의 말씀대로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게되자, 이복 형제간의 불가피한 갈등이 시작된 겁니다. 첩의 아들인 이스마엘은 말그대로 천덕꾸러기가 되고, 아들을 둘러싸고 가족들간의 갈등이 일어난 것이지요. 갈라디아서 4장 23절을 보면, 이스마엘을 육신의 자녀라고 하면서, 이삭은 언약의 자녀라고 구별하여 정의내린 구절이 있습니다. 대놓고 두 명의 아들을 차별한 것이지요.

이스마엘의 입장에서 본다면 참으로 억울할 만한 일입니다. 대대로 자신의 이름이 이삭과 대비되어 부정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납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본처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문제를 삼는다면 그 대상이 왜 이스마엘이어야 하는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오히려 문제를 만든 장본인은 아브라함이나 사라이니, 책임은 그들에게 있는 것 아닌가요? 사실 바울도 이스마엘과 이삭을 각각 육신의 자녀와 언약의 자녀로 구별한 이유가 윤리적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육신의 아들과 언약의 아들이라는 구분은 사람이 아니라, 아들을 얻게 된 방식의 차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육신의 나이가 백세가 다 된 아브라함과 이미 아흔이 넘은 사라가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비웃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사람의 방식으로 아이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자기방식대로 해석해 버린 결과입니다. 일은 사람의 방식으로 처리해 놓고, 모든 것은 마치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치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마엘을 얻는 과정은 철저히 사람의 일로만 생각한 결과였다는 것이지요.

반면에 이삭은 말 그대로 언약의 성취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진 상황입니다. 오랜 기다림이라는 인내를 제외하면, 모든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 일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 것이지요. 이삭을 언약의 자녀로 부른 것은 그가 이스마엘과는 다른 인격적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삭의 탄생 자체가 바로 사람의 일로는 불가능한 하나님의 일로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이삭과 이스마엘을 우리 맘대로 차별하여 보려는 시선 자체를 주의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유대인과 아랍계 이방인들을 구별하여 차별과 멸시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심각한 오해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 자체가 사실은 모든 것을 사람의 일로 생각하고 보려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민족을 구별짓고 분쟁의 근원으로 삼으려는 생각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라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삭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신 메시지는 하나님의 일을 깨닫고 따르는 신앙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만드시고 이를 소중히 여기셔서, 죽어가는 생명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대속의 은혜를 베푸신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결코 사람의 일처럼 분쟁과 갈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약속하신 복을 이삭에게만이 아니라 이스마엘에게도 허락하신 하나님입니다. 특별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모두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올림픽을 통해 어떤 사람들은 메달을 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선수들만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경쟁에서의 승리만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은메달을 따고도 고개를 숙이며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는 한국 선수들을 보며, 우리 사회의 현실을 되돌아 보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나 올림픽의 진정한 의미는 경쟁에서 승리한 몇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상생과 평화를 나누는 축제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비록 메달을 따지는 못했어도, 최선을 다해 자신의 모든 노력을 아낌없이 쏟아내는 열정과 경쟁이 끝난 뒤 서로의 노고를 함께 치하하고 위로할 수 있는 그 마음이야 말로 올림픽을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쟁에서의 우위와 승리가 목표가 된 오늘의 현실은 어쩌면 모든 것을 사람의 일로만 생각하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또다른 수많은 이스마엘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지요. 경쟁에서 뒤진 패배자와 낙오자,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차별을 받는 희생자로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땅에는 여전히 수많은 이스마엘의 그림자가 남아 있습니다. 차별시켜도 좋을 대상. 때로는 공격을 통해 제압해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만큼 증오의 대상. 차라리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믿는 쓸모 없는 존재로 말이지요.

지난 주 플로리다의 한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격사고로 17명의 무고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총기 관련 사고로 인한 피해는 더 이상 미국사회가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해를 입은 청소년들이 직접 총기규제에 대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더이상 이해타산만을 따지는 어른들의 결정을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항의의 표현이었습니다. 결국 지난 주 학생 대표들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자신들의 주장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대답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내놓은 해결책이  선생님들을 총으로 무장시키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총기를 손에 쥐게 해서 총기로 인한 사고를 막자는 이야기 입니다. 총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을 총기로 막아 보자는 생각. 혹 이것이야 말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일로만 생각한 결과가 아닐까요? 상생과 배려의 가치 보다 적자생존의 경쟁가치가 우세하고, 오랜 기다림과 인내를 요구하는 평화와 화해의 방식 보다는 당장 눈 앞에서 해결해 보고 말자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겨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과연 이 시대에 우리가 무겁고 힘들어도 짊어지고 따라야 할 십자가, 곧 진정한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