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빛을 비추어라

이사야60:1-6

마태복음2:1-6

 

오늘은새해들어처음맞이하는신년주일이면서동시에교회력으로는주현절에해당하는주일입니다. 주현절은한자로‘주님’의‘주’(主)자와‘나타나다’라는뜻의‘현’(顯) 자로구성된말인데, 헬라어에서유래한Epiphany라는영어단어도‘드러나밝혀진다’는의미를갖는말입니다. 곧, 주현절은하나님께서육신을입고오셔서동방박사들을통해인류에게당신의모습을처음드러내신것을기념하는날이라고볼수있습니다. 전통적으로교회에서는1월6일을동방박사의방문일로정하여기념하는데, 사순절이시작되기  이전까지지속됩니다. 이기간동안교회는온성도들에게예수그리스도의생애를묵상하면서삶의참된가르침을깨달을수있도록가르쳐오고있습니다.

 

물론동방박사와관련된이야기는성탄절연극에서자주사용되는소재이기도합니다. 아기예수를만나귀중한예물을드리는사람들로묘사가되곤하지요. 그런데교회의전통은이들의여정을통해그리스도가우리에게나타나신주현절의의미를다시금깊이있게살펴볼것을권면하고있습니다. 왜냐하면그리스도의현현, 곧나타나심이우리에게는주님과의만남이라는체험을의미하기때문입니다. 한마디로하나님은육신의모습으로우리에게나타나신것이지만, 우리는그로인해주님을만날수있는기회를얻었다는뜻이지요.

 

그런맥락에서동방박사의긴여정을다시생각해보지않을수없습니다. 지금의이란땅가까운곳에서왔을것으로추정되는그들이베들레헴까지가기위해서는족히3개월이란긴대장정을거쳐야만했기때문입니다. 유대의왕이되실그분을경배하기위해별을보고그먼길을찾아왔다는사실이놀라울뿐입니다. 이는당시유대의그어떤이들도생각하지못한일이기에더더욱놀라지않을수없습니다. 오히려전해내려오는이야기를통해더자주들을법했던유대인은사실무지에가까울만큼모르고있었습니다. 어쩌면너무나무관심해서복음의소식에도둔감한반응을보이고있었는지모르겠습니다. 유대의관점에서보면, 유대의왕이나실것이란소식에오히려이방인들이더적극적인태도를보인셈입니다. 

 

그런데이와비슷한사례들이교회안에서도지속적으로발생하는경우를어렵지않게볼수있습니다. 물론예수의이름으로예배의시간을갖고여러행사를이끄는단체는대부분교회가맞습니다. 하지만예수님이말씀하신일과행적의내용을가지고보면상황이달라질수있습니다. 예수님은가난하고힘없는약자의편에늘서계셨습니다. 그들의곤궁과억울함을해결하기위해긍휼한마음과정의로운메시지로세상과정면으로맞서야만했던것이지요. 이사야의예언대로예수님은가난한자에게복음을전하시고, 포로된자에게자유를, 눈먼자에게다시보게함을전파하며눌린자를자유롭게하고주의은혜의해를전파하셨던겁니다.


헌데오늘날교회가과연예수님의행적을제대로따르고있는것이맞는가에대해서세상은매우부정적인평가를하고있는것이사실입니다. 교회가예수님의지상대명령이라할수있는복음의증인으로서의역할을제대로하지못하고있다는반증입니다. 오히려세상의물질주의가교회안에서도버젓이가장큰영향력을행사하고있고, 이웃을향한나눔의정신보다모두가자기삶의안주와성공을기복하는신앙이팽배한오늘날교회의현실을마주하게됩니다. 온갖장애와방해를이겨내고주님을경배하려했던동방박사의신실한모습과는너무나대조적인모습이되어버렸습니다. 한마디로소금과빛의본분을잃어가고있다는것이지요. 오직주님을만나려는일념하나로먼여정을기꺼이떠나온동방박사의변함없는신실함은물론이고, 어둠속에서빛을바라볼수있는영적예민함도잃어버린것이아닌가염려되는부분이기도합니다.

 

그런의미에서이사야를통해주신하나님의선포는허물어져가는교회가귀기울여들어야할소중한말씀이아닐수없습니다.  바로“일어나빛을비추라”는말씀이그것입니다. 사실이말씀을듣고있던당시이스라엘백성에게는다소황당하게들릴수있는명령이아닐수없었습니다. 왜냐하면어둠이짙게깔린것처럼삶의여건이매우힘든상황이었기때문입니다. 그런데일어나빛을비추라하시니, 도대체무엇을가지고하란말이냐반문할수도있었을것입니다. 나라를잃고삶의터전조차불안한상황속에서세상에빛을비추라는말이정신나간소리처럼들리기쉬웠을겁니다.

 

빛을비추는것은고사하고일어서기도버거운상태였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기먹을것도없는상태에있는사람에게남과나누며살라고한다면그말이곱게들릴수있을까요? 패잔병처럼전의를상실하고쓰러져있는군인들에게남의전투에참전하여승전보를가져오라고명령한다면과연누가선뜻나설수있겠습니까? 그럼에도불구하고하나님은그의백성들에게왜일어나빛을비추라고명령하신것일까요?

 

어둠이땅을덮고있다는표현은결국비전을잃어버린상태라고할수있습니다. 앞이막막하고정말캄캄한상태인것이지요. 보통우리는본다고하면시력을떠올립니다. 사람이눈만멀쩡하면보는데지장이없을것이라생각하는것이지요. 삶의의욕을잃어버리고쓰러져있는사람에게‘사지멀쩡하면어떻게든일어설수있다’며다독이는말을종종들을때가있습니다. 충분히납득이가는말입니다. 때로는그만한위로의말도없는것같을때도있고요. 

 

그런데막상세상을살다보면자기시력만가지고는모든것을제대로본다고말할수없는순간을깨닫게됩니다. 자기능력과의지만가지고는불가능한것이더많다는것이지요. 어둠속에서아무리보려해도사람의시력은늘한계가있기마련입니다. 시력도빛이있어야그능력을발할수있는법입니다. 그래서이사야는이스라엘백성에게구원의빛이그들위에비치고있다는사실을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은혜가그들가운데임하고있다는말씀입니다. 

 

이는어둠속에서방황하는이들에게, 무엇보다그안에서어떻게든살아보려고온갖노력을다하는이들모두에게주시는축복이자위로의말씀이아닐수없습니다. 하나님은결코우리를포기하지않으시리라는약속이나다름없기때문입니다. 어떻게든하나님은우리를위해쉬지않고일하시겠다는다짐이기때문입니다. 그래서우리에게는선물인것이지요. 구원의은혜는이처럼우리의노력이아닌우리를향한하나님의아무공로없는사랑의증표라고할수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눈만똥그랗게뜨고가만있으라는이야기는아닙니다. 그래서일어나라고하지않습니까? 은혜는앉아서그냥받는것이아니라일어나적극적으로나설때얻게되는선물입니다. 그것이우리에게주신은혜의선물이라는사실을믿고일어나는것아닙니까? 그리고우리에게행하라고하신것도내능력대로빛을만들어비추어보라는것이아닙니다. 우리에게비추인그빛을반사하라는말씀입니다. 하나님의구원의빛을받았으면, 그것을이제세상에전하는증인이되라는말씀인것이지요. 그것도우리힘으로만이아니라주님과함께행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이베푸신대로, 우리도그일에함께적극동참하라는말씀인것이지요. 그것이바로세상을변화시키고움직이는힘이라는겁니다.

 

분명주님은우리에게주현, 곧스스로를나타내보여주셨습니다. 빛으로말이지요. 그러나그빛은무관심과무감각, 그리고무책임한이들에게는결코드러나지않는법입니다. 동방박사처럼빛을찾기위해일어나먼길을마다않고떠나서, 세상에그빛을전하고자하는이들을통해발하는것이지요. 그것이바로오늘교회와성도들이가야할길이기도합니다. 일어나빛을비추는겁니다. 

 

이를위해저는올한해우리교회가걸어가야할신앙의여정을이렇게요약하여말씀드리려고합니다.

첫째, 우리교회가올해의표어로삼은데살로니가전서5장16-18절말씀대로항상기뻐하고, 쉬지말고기도하며, 범사에감사할수있는매일의생활을우리모두가실천하는한해가되기를바랍니다. 기쁘고감사하는것을명령으로말한것은기뻐서기쁜것이아니고, 감사할만해서감사한것이아니라는뜻입니다. 기쁘지않아도기뻐하고감사할조건이아니어도감사할수있어야한다는것이지요. 이런삶의시선이나태도가되려면쉬지말고기도하는삶의습관이배어있어야합니다. 날마다매일의양식처럼주시는말씀을묵상하며흔들리지않고항상기뻐하며감사할수있도록은혜를베풀어주시기를기도하는우리모두가될수있기를소망합니다.

 

둘째, 빛을비추어어둠을밝히기위해서는함께힘을모으는것이더욱효과적이라는사실입니다. 그러므로날마다신앙의중심을잃지않고유지할뿐만아니라, 세상에더큰영향력을미칠수있도록신앙의공동체로함께모이는것이중요합니다. 하나님의명을따라허락하신예식에적극참여하는것은물론, 자신에게주어진은사와서로의필요에의한모임에도함께동참하는올한해가될수있기를바랍니다. 특별히속회와소그룹을통해신앙의기반을다지고, 믿음의동지와손을잡고먼신앙여정을흔들림없이나아갈수있기를소망합니다. 

 

셋째, 일어나빛을비추라는하나님의말씀을따라세상에복음을증거하는교회와성도가되어야할줄믿습니다. 우리내부적으로는아직미약한어린아이들로부터청년에이르는미래세대가세상을변화시키는제자로성장해나갈수있도록양육하는일에중점을두고자합니다. 바깥으로는저희교회가선교의사명으로정한분야에더욱관심과열정을모아사역하고자합니다. 지역사회의빈곤층구제사역과북한동포돕기, 그리고지난5년간사역해온멕시코단기선교와음악콘서트를통한네팔선교를지속시켜나갈계획입니다. 더불어금년에는멕시코유카탄지역에서열릴선교대회에도단기선교팀을파송하여교육과함께선교사역에동참하고자합니다. 바라기는아직비전을찾지못한많은성도님들이구원의빛에눈을떠서함께일어나그빛을세상에전하는주님의도구로나설수있게되기를기대합니다.

 

이제서른세살이되는우리열린교회가금년에도하나님의은혜가운데주어진복음의사명을잘증거하며감당하는한해가되기를소망합니다. 비록그여정이늘평탄한것만은아니더라도, 서로를격려하며이해하고소통하면서하나님이바라시는이시대의참된빛을비추는교회가될수있도록함께동참해주시기를부탁드립니다. 

임중도원(任重道遠)

누가복음 2:41-52

 

우리 옛말에 “될성부를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흔히 크게 될 인물은 어릴 때부터 다르다고 말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사람을 가리킬 때만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할 때도, 그 처음을 보면 나중의 결과를 알 수 있다는 식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물론 ‘역변’이라고 해서 처음과는 다르게 나쁜 결과로 나타나는 사례도 있겠지요. 그러니까 시작이 그 끝까지 완벽하게 보장해 준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다만 처음의 출발이 나중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2018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도 올 한해를 되돌아 보며 과연 처음의 결단이나 생각처럼 그 끝 마무리를 잘 매듭짓고 있는가 생각해 보는 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교회에 파송된 이후로 매년 마지막 주일 예배의 설교 제목은 한국의 교수신문이 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를 차용해 말씀을 전해 왔습니다. 매해마다 교수신문은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들에게 설문조사를 하여 사자성어를 선정하고 발표하는데, 올해는 ‘임중도원(任重道遠)’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고 합니다. ‘임중도원’은 중국고전인 『논어(論語)』의 태백편(泰伯篇)에 실린 고사성어로,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의 사자성어입니다.

 

그런데 그 뜻이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짐이 무거운 까닭은 바로 인(仁),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을 마음의 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처럼 무거운 짐이 또 있겠냐는 것이지요.그래서 그 무거운 짐을 평생 짊어지고 내려놓을 수 없기에 멀게 느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에게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있는 일종의 사명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제자가 되기 위해 져야 할 십자가의 소명에 견줄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룩한 책임감처럼 의의 면류관 쓰는 그날까지 선한 싸움을 다하는 모습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사실2018년 한해를 마무리하는 사자성어로 지성인들이 이 말을 꼽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바로 한반도의 평화가 성공적으로 완수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지난4월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을 시작으로 올해에만 세 차례 남북 정상이 만나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이는 지난 70여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전쟁과 폭력, 갈등과 분단으로 상처받은 한민족이 걸어온 무겁고도 기나긴 길에 종지부를 찍고 평화의 길로 나가기 위한 노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반도 평화의 길은 멀고도 험한 여정입니다. 넘어야 할 장벽과 숱한 어려움이 남아 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평화를 향한 굳은 의지를 지켜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평화를 향한 민족의 열망이 무겁고 기나긴 여정처럼 보이지만, 어떠한 장애에도 굽히지 않고 실현시켜 나가자는 뜻에서 한국의 지성인들은 임중도원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했다는 겁니다.


임중도원이 선택된 또 다른 이유는 오랫동안 한국사회를 짓눌러온 폐단들을 청산하고 불평등 없는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노력들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난해 시정연설에서 대통령은 성장의 열매가 국민 모두에게 공정하게 나뉘고 있는지 돌아보고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결하겠다고 천명한 바 있습니다. 물론 불평등한 경제 현실을 바로 잡고 사회적 약자를 보살피겠다던 다짐이 과연 이루어지고 있는가는 앞으로 더 지켜볼 일입니다. 하지만 얼마 전 산업재해로 숨진 청년노동자의 죽음을 통해 여전히 열악한 노동환경과 팍팍한 삶의 현실을 마주한 바 있습니다. 정부의 안정정책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출렁이는 부동산시장이나, 경제불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속적인 호황을 맞이하고 있는 고급 수입제품 시장의 현실은 여전한 우리사회의 빈부격차를 체감하게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많은 지성인들은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품은 평등과 나눔의 짐이 실현될 수 있는 그날까지 함께 걸어갈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임중도원’ 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요? 지난 주 북가주 한인 코커스 목회자 가족수양회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 폐회예배의 성찬식을 앞두고 집례목사님이 선물을 하나씩 준비했다며, 성찬을 받을 때 하나씩 들고 가라는 광고를 하셨습니다.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선물로 돈이나 물건이 아니라 십자가를 드려 죄송합니다’라고 해서 모두가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목사들에게 십자가는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짐이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소명은 목회를 직업으로 삼고 사는 목사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 각각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십자가의 짐은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 모두가 짊어진 소명이라는 뜻이지요.

  

물론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명에 대한 중요성은 귀에 닳도록 들은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평생 안고 살아야 할 무거운 짐처럼 느끼는 것도 당연한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소명을 어떻게 짊어지고 사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 의미에서,오늘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의 유년시절 이야기는 떡잎부터 달랐던 그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소명이 무엇인지 그에 대한 하나의 예시를 제시해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유년기에 있었던 예수는 유대인들의 오랜 전통에 따라 매년 유월절마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의 율법은 남자아이들이 태어나면8일째 할례를 받고(창17:12), 다섯 살 때 두루마리에 기록한 율법(쉐마:Shema, 할렐:Hallel)을 어머니로부터 배우도록 가르쳤습니다(신6:1-3).그리고10살이 되면 미쉬나(탈무드)를 공부하고, 13세가 되면 소위"언약의 아들"이 되는데 이 때부터 공회(Synagogue)의 회원이 되는 자격이 허락되어 성인으로 인정받는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러한 과정을 어린 예수도 똑같이 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예수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결국 요셉과 마리아가 백방으로 수소문 한 끝에 사흘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러 있던 소년 예수를 찾게 되지요. 그곳에서 율법 교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아들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이 때 걱정스러운 심정으로 아들을 찾은 부모에게 행한 예수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왜 찾으시냐는 다소 의아한 대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짊어지고 가야 할 소명에 관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는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바로, 우리의 영적인 상태와 관련된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애타게 자신을 찾은 부모에게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 단서입니다. 성전이 곧 우리 영의 집이라는 뜻이지요. 한마디로 영의 본향이라는 말입니다. 비록 육신은 땅에 머물러 살아가지만, 결국 우리의 영이 머물러야 할 최종 목적지는 바로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이지요. 이를 사도 바울은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바꾸어 설명해 준 바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을 통해 우리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결국 자기 몸이 하나님의 영이 살아계신 거룩한 성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소명의 출발점인 셈입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그러니까 우리의 몸이 예배당에 앉아서 찬양을 부르고 있다해도, 내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하나님의 영이 주인으로 역사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성전과 같이 성결한 삶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무겁게 느낄 만큼 짊어지고 살아야 할 십자가의 소명이라는 것이지요. 

 

그 일이 얼마나 개인이 감당하기 무겁고 힘든 것인지는  웨슬리가 속회(Class)라고 하는 작은 모임을 만들어 교인들에게 참여를 독려한 이유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속회를 통해 구성원들이 서로 경건한 삶을 살아 가도록 격려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신앙의 중심을 잃지 않게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이지요.그런 의미에서 속회는 단순히 모여 친교를 나누는 교제의 장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소명이라 할 수 있는 성결한 삶을 서로가 지켜나갈 수 있도록 돕고 권면하는 신앙의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공동체가 제공하는 강력한 장점이 바로 이것이지요.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누며 신앙의 여정을 끝까지 동행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개인적 영성의 문제로만 그치지 않는 이유가 이것입니다.세상을 혼자 살 수 없듯이, 신앙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아직 다 성장하지 않은 소년 예수가 자신이 머물러야 할 집이 성전이라고 밝히면서도, 결국은 부모를 따라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 순종하며 지낸 까닭이기도 합니다. 신앙은 결코 자기만 홀로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실천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마음 속으로 믿음을 고백하고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 믿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웨슬리가 속회에서 점검해야 할 일을 크게 세가지로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웨슬리는 구원에 대한 개인의 열망이 다음과 같은 속회 활동을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는 남에게 해가 되는 모든 종류의 악한 행위를 금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을 행하여 남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예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새해인 2019년에 우리 교회가 목표로 삼은 구체적인 신앙의 실천과제 가운데 하나도 바로 속회를 통한 신앙의 경건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우리 교회의 여건상 모든 행사가 주일에 집중되어 어려움이 많았는데, 매월 넷째 주일은 전 교인 속회주일로 정하여 모든 성도들이 속회별로 모임을 갖고자 합니다. 물론 교제를 위한 가정모임은 별개로 가져도 좋습니다. 하지만 속회주일에는 모임을 통해 말씀을 중심으로 교제하며, 서로의 신앙이 자라날 수 있도록 격려하고 함께 무거운 짐을 끝까지 내려놓지 않고 실천할 수 있는 길을 다짐하는 시간으로 삼고자 합니다.개인적인 영성을 위해 매월 첫째 주 토요일 새벽예배를 통해 첫열매의 소망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매월 마지막 주일에 있는 속회모임을 통해서는 신앙의 다짐들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결실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가 될 수 있도록 성도님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임중도원.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의미있는 사자성어입니다. 십자가의 무거운 소명을 짊어지고 끝까지 선한 싸움을 다 싸워 나가기를 결단하는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2018년의 마지막 주일에 이 말씀을 마음 속에 새기며, 새로운 한 해에도 더욱 더 신앙의 중심을 굳게 세워나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세가지 혁명

누가복음1:46-55

 

예수님의출생과관련한이야기는복음서가운데서도마태복음과누가복음에만기록되어있습니다. 나머지마가와요한의복음서는주로예수님의공생애에관해서만다루고있을뿐입니다. 아기예수의탄생에관한내용을이야기하고있다는공통점을갖고는있지만, 마태와누가의복음서도그내용에서약간의차이가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아기예수를낳게될것이라는소식이마리아와정혼한요셉에게전달되는데반해서누가복음은마리아가직접천사로부터수태고지를듣는것으로기록되어있습니다. 아무래도유대교의전통이강조되는마태복음과는달리누가복음은이방인이나여자와어린이, 그리고 소외된사람들에게보다관심을두고있다는사실과연관이있는것으로보입니다. 

 

이와같은누가복음의관점은예수님의출생을세례요한의출생과연결시켜설명하는방식에서도나타납니다. 오늘본문의바로앞부분은요한의출생과관련한이야기를다루고있습니다. 제사장인사가랴의아내엘리사벳이천사가브리엘로부터아이를잉태하게될것이라는이야기를듣게됩니다. 사실엘리사벳은나이가많아서임신이쉽지않은몸이었습니다. 마치이삭을어렵게가진사라나사무엘을늦은나이에출산한한나의상황과마찬가지로말입니다. 그리고얼마지나지않아친척인마리아도임신을하게되지요. 엘리사벳이나이가들어가진것과는달리, 어린소녀였던마리아는아직결혼도하지않은상태에서아이를잉태하게된것입니다. 


이기록만보면엘리사벳이나마리아모두매우특별한상태에서아이를가졌다는공통점이있습니다. 엘리사벳은가임연령이이미훨씬지난상태였고, 마리아는아직결혼도하지않은어린처녀에지나지않았기때문입니다. 둘다일반적인상태에서임신을하게된것이아니라는뜻이지요. 여기서일반적이지않다는것은사람의뜻이나의도에의해이루어진임신이아니라는말입니다.  우리의능력밖에서이루어진신비로운사건이었다는뜻입니다. 그래서보다하나님의섭리를선명하게바라보는기회가된것이지요. 

 

사람들은일반적으로자신들의뜻으로행할수있고, 또가능할수있다고생각하는일에서는하나님의개입을좀처럼받아들이지못하는경향이있습니다. 시험공부를열심히해서좋은성적을얻고, 부지런히일해서돈을모으고하는과정속에서는하나님의섭리를잘발견하지못한다는겁니다. 모든행위의주체가자기이기때문에순전히자신만의결과물로생각한다는것이지요. 물론제뜻대로안되어, 일이잘안풀릴때는하나님이나남을원망하기도하지만말입니다. 그런의미에서출애굽의과정을되돌아보면, 비록황량하고매우고단한여정이긴했어도그과정에서하나님의직접적인개입을날마다체험할수있었다는사실을깨닫게됩니다. 정말아무것도갖지못한상황속에서오히려하나님께더전적으로의지할수있었다는사실을말이지요. 

 

엘리사벳이나마리아처럼의지대로할수도없고불가능해보이는상황속에서하나님의놀라운역사를더선명하게바라볼수있었던것도마찬가지의이유라고할수있습니다. 46절에서마리아의노래가내영혼이주를찬양한다고고백하는것으로부터시작하는이유도이러한배경에서찾을수있습니다. 내입이노래하는것도아니고내머리로생각해서부르는찬양이아니라는뜻입니다. 온마음과뜻과정성을다담아혼으로부르는감사의찬양이라는뜻이지요. 이게상상이되십니까? 얼마나기쁘고감사하기에이런찬양을할수있었던것일까요? 그것도이제겨우15세가량에불과한소녀에게서어떻게이런가슴깊이묻어나오는찬양이가능할수있었던것일까요? 

 

마리아가찬양한오늘본문의구절은전통적으로교회예배에서가장즐겨부르던찬송으로“마그니피카트(Magnificat)”라고부르기도합니다. 내용적으로볼때는사무엘상2장1-10절에있는한나의찬양과매우유사합니다. 그래서어떤이들은누가의기록이구약의영향을많이받은결과라고주장하기도합니다. 물론하나님이주신생명에대한어머니의기쁨과감사의찬양이라는점에서먼저공통점을찾을수있습니다. 그러나무엇보다중요한사실은이찬양안에서당시유대사회에대한놀라운통찰력이담겨있다는점입니다. 위대한감리교선교사였던스탠리존스(Stanley Jones)는이를이렇게표현하기도했습니다. “이세상에서가장혁명적인문서”라고말입니다. 다시말해오늘본문의마리아의찬가, 곧마그니피카트는하나님에의한혁명과같은내용을담고있다는뜻입니다. 

 

신학자인윌리엄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이를하나님에의한세가지혁명으로주석한바있습니다. 마리아의찬가를통해기독교의핵심을발견할수있다는것이지요. 첫째는마리아의찬가가개인의내면적혁명을노래하고있다는사실입니다. 51절에보면“하나님은마음이교만한자들을흩으신다”는구절이있습니다. 하나님이아닌자기스스로를  우상으로섬기고살아가는이들의삶을송두리째변화시킨다는말씀입니다. 그런의미에서기독교신앙의핵심은교만을없애는것이라해도틀리지않습니다. 그리스도를따른삶은철저히자기중심적삶을포기하는길이라는겁니다. 판단과행위의주체가‘나’에서내안에계신‘하나님’으로바뀌는것입니다. 그래서주님이나를통해역사하실수있도록자신을완전히비우는신앙의훈련을행하는것이바로그리스도를따르는신자된모습이라는것이지요.

 

둘째는마리아의찬가가세상권력에대한혁명을노래하고있다는사실입니다. 52절에서마리아는“제왕들을권좌에서끌어내리시고비천한자를높이신다”고찬양합니다. 그리스도의가르침속에서도세상의첫째가오히려하나님나라의꼴찌가될수있다는역설을말씀해주시기도한바있습니다. 세상의지위와권력이하나님앞에서완전히무력화된다는이야기입니다. 마리아의몸을통해오신그리스도께서이땅에오신까닭은모든영혼을구하기위해서였습니다. 힘있는자와지위가높은자를위해서오신것이아니라모든생명을구원하시기위해오신것입니다. 

 

이를현실에적용해보아도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세상의어떠한국가권력도국민의존엄을침범할수없다는사실을알수있습니다. 어떤한사람의국민도하찮고쓸모없는존재로여겨서는안된다는것이지요. 그리스도는특정한이들만이아니라모두를위해오신분이기때문입니다. 따라서이땅에이루어가야할하나님의나라도바로사람이사람다운정당한대우를받으며살수있는곳이어야한다는것이지요. 흔히말하는법도결국생명을지키기위한최소한의수단이지, 결코생명을넘어서는절대권력이되어서는안되는이유가여기에있습니다.

 

셋째는마리아의찬가가사회정의에관한혁명을노래하고있다는사실입니다. 53절에서마리아는“주린사람들을좋은것으로배부르게하시고, 부한사람들을빈손으로떠나보내셨다”고찬양합니다. 그리스도를통해이루어질하나님의나라는함께더불어가는세상입니다. 그것은사회혁명을통해주인이단순히바뀌어또누군가가남보다더위에군림하거나더많은것을취하는소유의개념이아니라는것입니다. 가지려는것이아니라나누는것이삶의더중요한가치가되는것이지요. 삶의목적이완전히바뀐다는점에서혁명적이라는것입니다. 행복의기준이무엇이되었든더이상더많이갖는것에있지않고, 그사람곧생명자체가소중한가치를인정받을수있는것으로변화되기때문입니다.

 

마리아가영혼으로부른이찬양이단순히자녀를주신것에대한감사의표현이아닌까닭이바로이것입니다. 가진것없는비천한소녀를통해장차이루실하나님의역사를깨달았기때문입니다. 그녀의몸을통해이땅에오실그리스도예수께서행하실일들이마리아의영혼을통해찬양되었을뿐인것이지요. 그런의미에서오늘우리가맞이하는성탄주일은우리내면과이세상에대한혁명적사건을이루기위해오실그리스도를영혼으로찬양하며예비하는시간이되어야할줄믿습니다. 이땅의교회가다함께그리스도를통해행하실하나님의섭리를찬미하며, 우리도그혁명의역사에동참할수있기를소망합니다. 그래서진정과기쁨으로구주가오신이날을맞이하는저와여러분모두가될수있기를주님의이름으로축원합니다.

알곡과 쭉정이

누가복음3:7-17

 

탈무드를보면, 선과악에관련하여흥미로운이야기하나가나옵니다. 노아가하나님의명령에따라방주를다만들고모든동물의한쌍씩을태우려합니다. 그때“선”이라고하는녀석이혼자타려고들어오자노아가다른한쌍을마저데려오라고일러줍니다. 그래서자기의짝을찾아다니던‘선’은결국자기와전혀다른‘악’을데리고방주에들어가게됩니다. 이것이바로세상에‘선’과‘악’이공존하게된이유라고이야기는전합니다.

 

물론궁극적인선과악은외적으로는정반대의성향을가진다른무언가처럼보입니다. 그래서우리는좋은사람이있는것처럼나쁜사람도있을것이라생각을합니다. 그런데날때부터좋은사람이정해져있는것이아니듯이나쁜사람도처음부터그렇다고말하기는어렵습니다. 오히려탈무드의이야기처럼선과악은언제나공존하고있다고해도과언이아닙니다. 누구나선한면과악한면을동시에가질수있고, 과거에악했다고해서지금이나앞으로도그럴것이라는보장이없는법입니다.

 

로버트루이스스티븐슨의단편소설인“지킬박사와하이드”처럼, 사실한인간안에선과악의이중성이모두나타나고있다해도틀리지않습니다. 다만어떤성향이더강하게드러나는가의차이만있을뿐이라는것이지요. 그래서어쩌면인간은끊임없이내적갈등과싸움을해야만하는지도모릅니다. 우리가신앙을가지고산다는것도그런면에서늘그리스도의능력과복음안에서선으로승리하기위한투쟁의결과라고할수있습니다. 의의면류관을쓰기위해벌이는선한싸움을말이지요.

 

요한이장차오실그리스도를소개하는대목에서, 그리스도는알곡을곳간에모아들이지만쭉정이는불에태우실것이라고하는부분도마찬가지의맥락에서이해할필요가있습니다. 개인의문제로만놓고본다면, 알곡과쭉정이가따로있는것이아닐수도있다는뜻입니다. 물론세상이라는전체의관점에서보면, 좋은사람과나쁜사람을구별하여심판하는이야기로설명할수있습니다. 그러나다른한편으로한사람의내면에적용시켜보면, 우리모두가가진이중적본성중에서악한것은버리시고선한것을취하신다는말에가깝다는것이지요.  

 

단지쭉정이같은악한사람만을골라서불에태우는이야기라면, 지옥불에던져질심판만을떠올리면그만입니다. 무서운이야기이지요. 그래서주님이오시는날이기다려지기보다는두렵고떨리는것이사실입니다. 자신이쭉정이인지알곡인지도대체알수가없어서말이지요. 그런데하나님은청천병력과같은말을이미우리에게하신바있습니다. 우리모두는다죄인이라고말입니다. 쉽게말해선과악으로만놓고본다면, 그누구도자신을완전히선하다고자신할사람이없다는뜻입니다. 그래서기독교를성악설로분류하기도하지요. 그렇다면결국우리는모두가쭉정이라는이야기아닌가요?

 

그래서하나님은쭉정이같은우리를구원하시려고자신의독생자그리스도예수를보내어주셨습니다.  알곡으로삼기위해서말입니다. 그러니까이말은쭉정이같던이도알곡이될수있는길이열렸다는뜻으로이해할수있는대목입니다. 운명적으로쭉정이와알곡이결정된것이아니라언제나변화될수있다는의미라는것이지요. 물론그것은쉬운일이아닙니다. 요한도자신의한계를분명하게알고있었습니다. 자기가행할수있는것은물로세례를주는의식일뿐이라는것을확실히지적합니다. 물로깨끗하게할수는있겠지만, 적어도쭉정이를알곡으로변화시키는일은행할수없다는것이지요. 그것은장차오실그리스도를통해행해질성령과불의세례로써만가능해질것이라고이야기합니다. 

 

그런맥락에서요한이강조하려고한것은심판에대한경고이전에, 누구나그리스도의능력안에서쭉정이가알곡으로변화될수있는길을알려주고자한것으로이해해볼수있습니다. 쭉정이같은삶을살던자가그리스도로말미암아완전히변화된새생명으로다시사는길이열린것이지요. 그리스도안에서쭉정이같던옛사람은죽고새로운피조물로거듭나는역사가이루어진다는것입니다(고후5:17).

 

누가는이를‘회개의세례’라는말로표현하고있습니다. 실제로본문8절에서요한은회개에합당한열매를맺으라고말합니다. 이는삶에서의실제적인변화, 곧쭉정이가알곡이되는변화를권면하는말씀입니다. 특히당시아브라함의자손이라는사실만으로안주하며살던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강력한메시지가아닐수없었습니다. 하나님은돌들로도아브라함의자손이되게하실수있으니, 착각하지말라는것이지요. 유대인의피를물려받아서타고나면서부터알곡이라생각했다면오해라는뜻입니다. 쭉정이인지알곡인지는복음의능력안에서변화되는것을통해알수있기때문이라는겁니다. 그러니까둘을가르는키질은본래부터쭉정이었던자와알곡이었던자를구별해내기위한것이아니라, 실제적인삶의변화를통해새로운피조물이되었는지를구별하기위한것이라고할수있습니다.

 

그러자이를듣고있던사람들이요한에게묻지요. “그러면무엇을해야하느냐? (10)”고말입니다. 알곡, 곧그리스도안에서새로운피조물이되기위해어떻게해야하는가를질문한것입니다. 이에대해요한은사람들마다제각각처한상황에따라맞춤형답변을제공합니다. 다만한가지공통점이있다면, 메시지가당시유대사회의기득권을가진이들을향한것이었다는점입니다. 첫째는남보다더소유한이들에게자신이가진여유분을그렇지못한사람들과나누라는가르침입니다. 둘째는당시식민지유대사회에서원성을가장많이들었던세리들에게던지는메시지입니다. 세금을정당하게징수하여부정한이익을취득하거나힘없는이들을착취하지말라는겁니다. 셋째는군인에게무력으로남을억압하거나재산을강탈하지말라는메시지를전합니다. 한마디로공권력을남용하지말라는뜻입니다.

 

흥미로운사실은요한이대답한변화의핵심이다한결같이개인의내적변화라기보다는사회적변화를이야기하고있다는점입니다. 알곡이되는과정을단순히개인의변화로만보지않았다는것이지요. 물론개인의변화가없는세상의변화를상상하기어렵습니다. 그래서복음의말씀도각사람이회개하며영적인변화를위해항상깨어있으라고권면한것아닙니까? 하지만예수님의말씀처럼복음은개인의변화만을이야기하지않습니다. 그리스도의몸된교회로세상을비유해본다면, 개인은전체와뗄수없는유기적인관계속에있습니다. 따라서나만의변화가아니라우리모두가변화되지않고서는진정한알곡을맺기어렵다는것이지요. 손가락하나만아파도내가아픈것처럼, 전체가하나의알곡을맺기위해서는개인과전체가더불어함께갈수밖에없다는겁니다. 

 

웨슬리도사회적종교가아닌종교가없고, 성결은오직사회적성결만이있을뿐이라고주장한바있습니다. 모든문제의근원을개인의문제로돌리지않은것이지요. 예컨대, 근대이전사회에서는가난으로인한삶의불행을개인의문제로돌렸습니다. 나태하고게을러서, 혹은천성이글러먹어서그렇다는식의생각이지배적이었습니다. 물론개인의문제도짚고넘어가야할부분인것은분명합니다. 그러나과연개인만이모든문제의근원이라말할수있을까요? 웨슬리뿐만아니라오늘날많은철학자나사회학자들은그렇지않다고말합니다. 왜냐하면인간은사회안에살면서대부분의의식과행동을사회로부터영향받고있기때문입니다. 우리가행동하고생각하는대부분이자기것같지만사실은사회적으로만들어진것이라는이야기입니다.   

 

비록사람들마다개인적차이는있겠지만, 어떤한사회에소속된구성원들은그사회의구조적성향에영향을받기마련입니다. 그래서개인의변화만으로는온전한변화를이루기어렵습니다. 예컨대, 학교교육이문제라고해서자기혼자만벗어나려고한다면그것은변화가아닌일탈로간주될가능성이높습니다. 만일잘못된것이있다면, 그구조적문제를고치지않고는진정한변화를맞이하기어려운것이지요.

 

요한이살던당시유대사회의상황도크게다르지않았던것으로보입니다. 하나님의말씀인율법의그늘아래살고있었지만, 기득권을가진이들의생각이나행태는크게달라지지않았던것이지요. 율법은존중하면서도, 자기들에게유리한방식으로만이해하고적용하려한결과, 사회의여러가지부조리한문제들이나타날수밖에없었던겁니다.

 

쭉정이에서알곡으로변화되기위해무엇을해야하느냐고묻는사람들에게요한이사회적성결에가까운대답을한까닭이바로여기에있습니다. 세상이변화되어야한다는것이지요. 그리고세상을바꾸기위해서는바로여러분각자가변화의시작이되어야한다는것입니다. 사람이변화된것을어떻게알수있나요? 혼자속으로다짐하고결단하는것으로증명될수는없는법입니다. 세상을통해증거되어야하는것이지요. 그래서알곡은저절로맺어지는것이아니라알곡을맺기위한수고의결실이라는겁니다. 그리스도안에서새로운피조물이되어하나님나라의알곡을함께만들어가는것이지요.

 

이를위해서는성령의불세례를받아야합니다. 뜨겁게소리지르며기도하라는뜻이아닙니다. 불로타버리면질적으로완전히다른변화가일어나듯이, 새로운피조물로거듭나는것입니다. 신학자인폴틸리히의말을빌자면, “새로운존재(new being)”가되는것이지요. 알곡은바로이런상태를두고하는말입니다. 그것은물로세례를받아서될일이아닙니다. 여러분이진짜알곡이되었다는것은세례교인이라는사실로증명될수없습니다. 교회의제적부가여러분이알곡인지를구별해주는키질이결코될수없습니다. 오늘요한의가르침대로세상을변화시키기위해자기의유익과편리만을추구했던쭉정이와같은껍데기를그리스도의말씀안에서벗어버릴때, 비로소진정한알곡이될수있습니다. 

 

이제우리는세상이라는타작마당을정리하기위해키를들고오실그리스도를기다리고있습니다. 여러분은어떤모습으로그분을맞이하고싶으신가요? 알곡? 아니면쭉정이? 지금우리앞에쭉정이처럼놓여진세상을함께조금씩변화시켜나가지않으시렵니까?  

 

 

연리지(連理枝)처럼

누가복음21:25-36

 

오늘부터대림절이시작됩니다. 대림절은온인류를구원하기위해이땅에오신예수그리스도를기다리며, 그를맞이하기위해마음의준비를행하는절기입니다. 성경에서는메시아의강림에대해여러가지방식으로표현하고있습니다. 구원의날로이야기하는가하면, 다른한편으로는종말의때로설명하기도합니다. 심판을통해극명하게구별되는상태를표현한것이지요. 공의의주님이불의로가득찬악한세력을물리치시고, 공의를따라선한삶을살았던이들을구원하실것이라는생각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어둠의옛세력은사라지고, 새로운하늘과새땅이열리게될것이라믿었던것이지요. 

 

오늘본문도이대림절의의미를재확인시켜주는말씀이라고할수있습니다. 본문은크게세단락으로나누어볼수있는데, 첫째는(25-28절) 인자, 곧사람의아들이올것이라는묵시적선언에관한내용입니다. 둘째단락인29-33절은그징조를무화과나무의비유로설명한것입니다. 마지막으로세번째단락인34-36절은위에서언급한그때를미리준비하고있어야한다는가르침에관한내용입니다. 단락마다각각그리스도의강림에관한의미를다른각도에서접근한것이지만, 결국‘그때’가올것이라는점에서는같은말씀이라할수있습니다. 다만강림의의미를하나는‘인자’개념으로, 다른하나는‘하나님나라’로, 마지막으로는‘그날’이라는말로표현한차이만있을뿐입니다. 

 

먼저강림의주체라고할수있는‘인자’에관한이야기입니다. ‘인자’즉사람의아들은마지막심판을통해하나님의자녀를구원하러오실메시아를의미하는말입니다. 고통과절망속에있는이들에게현실은끝내버리고싶은시간일수있습니다. 무엇보다새로운세상을꿈꾸며오늘의고통도인내하며살아가는이들에게부정한현실의끝은새로운소망의시작을알리는신호탄이나다름없는말이었습니다. 당시유대인들은구약의예언서를통해그때가올것이라기대하고있었습니다. 예를들어다니엘서7장13절을보면, 환상중에서인자같은이가하늘구름을타고왔는데, 그권세가소멸되지않을뿐만아니라영원하다는예언이기록되어있습니다. 오늘본문의28절도같은말씀을전하고있습니다. 메시아가이땅의현실속에들어와서완전히세상을변화시켜줄것이며, 그로인해변화된세상이다시는불의하고부정한세력에의해타락하지않을수있을만큼강력하고영원한능력을보여줄것이라는것이지요.

 

어쩌면이것은많은사람들의바램이나기대라고할수있을겁니다. 또우려되는반전을막아줄것이라는굳건한약속일수도있습니다. 그런데문제는구약의예언과는달리당시유대사회나오늘우리에게인자의출현은또다른의미를갖게되었다는점입니다. 왜냐하면우리는2000년전그리스도예수의십자가사건을경험한세대이기때문입니다. 이미강림의역사를체험한사람들이라는뜻입니다. 그런의미에서지금의교회와성도는부활이후재림을구하는시대를살고있다고할수있습니다. 다시오실인자를기다리며, 하나님의약속을구하는시대인것이지요. 

 

하지만여전히구약시대를살던유대인들이나예수의부활이후곧돌아오리라는약속을애타게기다리던오늘본문의말씀에등장하는시대의사람들과다름없이, 지금우리도기다리며똑같은질문을하고있습니다. 그것은바로그때가언제인가라는질문입니다. 특별히이시대의교회와성도들에게그때는정말마지막날이라는이미지가강합니다. 그리스도의재림은진짜마지막심판이이루어지는것이라배워왔기때문입니다. 그래서혹자들은주님의재림을지구의종말과같은매우공포스러운주제로다루기도합니다. 마치SF영화의한장면처럼모든인류가재난속에사라져버릴운명앞에놓여있을것만같은이미지를떠올린다는것이지요. 지난2000년동안많은사람들은그런기대와두려움속에서과연언제그상황이벌어질것인가를두고논박을벌이기도했습니다. 허나분명한사실은오랜세월동안많은사람들이그때가언제올것인지를알기전에개인의종말부터맞이할수밖에없었다는사실입니다. 사실인간은지구의종말이언제올것인가는고사하고자기생명이언제다할것인가조차모르고살아가는미약한존재아니던가요? 

 

누가는이러한상황을조금다른각도에서설명해주었습니다. 단순한종말이아니라하나님나라가오는것으로보았던것이지요. 그래서종말과주님의재림을매우음침하고모든것의끝이라는절망적시각이아니라, 새로운세상이열리는구원의이미지로바꾸어보여주고자했습니다. 물론죄를범한이들의입장에서야심판대앞에서는것자체가두려움일수있습니다. 하지만하나님나라를구하며살았던믿음의자녀들에게그심판은오히려무거운짐을내려놓고진정한자유를누리는시간이되는것입니다. 그러니기쁨과희망의날이아닐수없는것이지요. 

 

그래서누가는언제하나님의나라가임하는가에대해다른해답을내놓습니다. 지금우리에게중요한것은언제그나라가이루어질것인가의질문이아니라어떻게그날을기다리며, 나아가어떻게하나님의나라를만들어갈것인가를물어야한다는것이지요. 그런점에서무화과나무의비유를통해알려주고자한것도사실은나무의변화를통해그시기를알수있다는점이아니었습니다. 오히려더중요한것은나무가변화되어서열매를맺는모습그자체라는사실입니다. 사람으로비유해보자면, 그사람이정말제대로된사람이되는가를물을때중요한것은언제그렇게되는가라기보다는변화되는모습그자체라는것이지요. 성령의사람도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변화된다는것자체가더중요한것이지언제그렇게될것인가의질문은차후의문제라는것입니다.

 

누가가마지막단락에서기도하면서늘깨어있으라고권면한이유이기도합니다. 물론열매를기다리는입장에서언제올것인가라는질문은당연할수있습니다. 그런데그때가오더라도, 정작변화되지않으면아무소용이없는것아닙니까?(첫눈과첫사랑) 그때의핵심은심판대앞에선이가과연‘하나님의나라에합당한삶을살고있었는가?’, 곧‘성령의열매를맺는삶을사는변화된사람인가?’에있기때문입니다. 따라서지금우리의질문도‘과연지금기도하면서깨어있는삶인가?’가되어야한다는겁니다. 예수님이가르쳐주신말씀대로언제인지모를그날이비수처럼올것을아는사람이라면, 바로지금변화된삶을살고자하는것은지극히현명한생각이아닐수없다는결론에이르게됩니다. 

 

우리가지난주나눈말씀처럼, ‘항상기뻐하고쉬지말고기도하며, 범사에감사하는삶’을살아야하는이유가아주분명해지는것이지요. 하나님의나라는그저기다리는대상이아닙니다. 내안에계신하나님이내삶의주인이되시어역사하실수있도록자기자신을십자가위에희생하는믿음의결실입니다. 그래야그리스도안에서우리는다시부활의생명을얻을수있습니다. 그것이바로하나님나라를사는길입니다. 그때비로소진정한기쁨과감사로충만할수있습니다. 그러니쉬지말고기도하며, 내안에하나님의나라를이루며사시기바랍니다. 그것이지금대림절의기간동안그때를기다리며살아가는성도들의모습이되어야합니다. 

 

예수님도“그날에는내가아버지 안에, 너희가내 안에, 내가너희 안에 있는것을너희가알리라(요14:20)”고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하나님과그리스도예수, 그리고우리를하나가된모습으로비유하신겁니다. 그리고하나가되는것의중요성을포도나무의비유를통해서설명해주시기도하였습니다. 가지가포도나무에붙어있어야비로소열매를맺을수있듯이, 몸된주님의지체로함께할때에생명의열매를얻게될것이라고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점에서무화과나무의비유도그시기가중요한것이아니라열매를맺기위해서주님과하나되는변화된삶을사는것이얼마나중요한것인가를일깨워주시는말씀으로이해할수있는것이지요. 

 

우리말에‘연리지’라는것이있습니다. 가까이자라는두나무가 맞닿은채로오랜세월이지나면서로합쳐져한나무가되는현상을연리(連理)라고하는데, 나뭇가지가붙을때쓰는말입니다. 저는예수께서무화과나무의열매를맺는것이나포도나무와같이주님과우리가하나되는모든현상도이와같은모습일것이라는생각을해보았습니다. 비록그때가언제인지는누구도알수없습니다. 오랜세월을보내야할수도있습니다. 그렇다고뒷짐지고아무것도하지않고그저기다리기만할것인가요? 나뭇가지도끊임없이열매를맺기위해움직이는것처럼우리도열매를맺기위한노력을게을리하지말아야합니다. 주님의말씀처럼열매를맺기위해서로하나가되기위한노력을쉼없이기울여야합니다. 그때비로소연리지처럼하나님의나라를함께만들어주님의영광을다같이누리는복된구원의날을맞이할수있게될것입니다. 

 

어떤이들은이를두고미련한일이라고할지모릅니다. 언제가될지도모르고그결과도알수없는기나긴길을간다는것이무모해보일지도모릅니다. 그런데예수님은이를두고“산을옮길만한믿음”에비교하여설명하신바있습니다. 비록산을옮기는것은미련하고무모해보일지모르지만, 그래야하는것이라면지금비록한줌의흙이라도퍼서나르는것이무작정기다리는것보다의미있는일이아닐까요?

 

내년2월말이면우리교단의미래에영향을줄지도모를특별총회가열립니다. 4년마다개최되는정기총회가아니라말그대로특별총회를갖게된배경에는오랫동안지속되어온“동성애”에관한논쟁이있습니다. 현재교단의헌법이라할수있는“장정”에동성애를성경의가르침에불일치한다고하는주장에반대하는이들과고수하려는사람들간의팽팽한싸움이더이상해결의실마리를찾지못해서양측이합의한대안마련의자리입니다. 현재대안으로제시된소위“One Church Model”의통과여부에따라갈등이봉합되거나아니면더욱균열이커질수도있는상황입니다. 비관적인입장에서는교단이200년전노예문제때문에남북으로갈라졌던상황을재연하게될지도모른다고우려하고있습니다.

 

저는이러한위기상황속에서어떤주장에목청을높이기보다먼저귀를기울여서로의목소리에경청할수있는성숙한교회의모습을떠올려봅니다. 그속에서지금하나님의뜻이무엇인가를깊이성찰해보는것입니다. 무조건반대하고나와다르다는이유만으로상대방을적으로삼으려는정쟁에서한발자국물러서오늘교회의현실을되돌아보는겁니다. 그래서연리지처럼주님의몸된교회가서로찢겨져분열하는것이아니라하나된포도나무처럼함께하나님의나라를세워갈수있기를소망합니다. 지금우리가해야할것은그날을기다리며하나가되기위해쉬지않고함께기도하는일이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