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신앙과 종교윤리

현세적 물량주의와 문화적 문법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이야기할 때 늘 거론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현세적 물량주의이다.[i] 물량주의는 교회의 목회기준이나 실질적인 운영방향이 질적인 수준이 아니라 양적인 측면에 치중할 때 주로 언급되는 현상이다. 교회가 외형적이고 양적인 성장에만 몰두한다든지 배금주의적 경향이 심화되는 것이 그 전형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ii] 개인의 영적 성장을 위해 올바른 지침을 제시하거나 사회적 영성의 회복을 위한 현실 참여보다는 교인의 수, 헌금 액수, 그리고 건축과 같은 교회의 외형적 성장에만 집착하는 한국 교회의 부정적 이미지는 물량주의의 폐해에서 찾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정치와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교계에서 물질숭배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한국적 산업화를 잘 대변해주는 기치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가 하나님을 잘 믿으면 축복받아 잘살게 된다는 식의 신앙 기조로 교회에서 재해석됐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김광식은 이를 두고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한국교회에서는 ‘이금칭의’(以金稱義)로 둔갑하었다는 비판을 가한 바 있다.[iii] 종교의 영역이 경제의 논리에 오히려 예속되어 교회의 식민지화가 발생했다는 주장의 설득력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iv]

 

이처럼 한국 개신교회가 과도한 물질 중심의 현세적 가치에 경도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기복신앙과 결부시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한국 교회의 성향을 기복신앙이라고 단적으로 정의하는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통상적 개념 규정이 실질적인 상관관계를 증명하는 수준으로 인정받으려면 적어도 몇 가지 선결되어야 할 요건들이 있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흔히 사용하는 한국인의 기복신앙이라는 정서적 개념과 기독교적 신앙 행태로서의 기복이라는 개념을 일치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기복신앙이라는 현상이 한국 교회와 그 구성원들에게 유의미한 영향력을 가졌는지와 연관이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가 가진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를 삶의 전반적 문제에 대한 해석과 의미 부여에서 찾는다. 따라서 기복신앙이 신앙공동체인 한국 개신교회와 그 구성원들의 삶에 구체적인 가치를 제시하고 윤리적 행동 방식에 대한 의미를 재해석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앞의 선결 요건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문화적 문법”이란 개념을 분석 틀로 사용하고자 한다. 문화적 문법이란 용어는 “그 문화를 공유하는 구성원들 사이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거의 의식되지 않는 상태에 있으면서 구성원들의 행위에 일정한 방향을 부여하는 문화적 의미체계”를 말한다.[v] 정수복은 그의 저서를 통해 한국사회의 문화적 문법을 근본적 문법과 파생적 문법으로 나누고 그 문법들이 한국인들의 세계상을 어떻게 형성해가고 있는지를 진단하였다. 그가 말한 근본적 문법이란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어 쉽게 변화되지 않는 근본적인 현상들, 예로 들면 “현세적 물질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와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반면 파생적 문법은 “속도지상주의” “수단방법중심주의”처럼 한국사회가 급격한 변천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파생하여 나타난 현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복신앙’이라는 특수한 종교적 현상을 문화적 문법이라는 개념 틀을 사용하여 접근해 보고자 한다. 지면상 세밀한 분석은 어렵겠지만, 적어도 특수한 종교적 신앙 형태가 과연 한국 교회의 성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또 그것이 교회의 실질적인 역할에도 유의미한 연관성을 갖고 있었는지를 가늠해 보는 것에는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기복신앙의 행태가 한국 개신교회의 뚜렷한 신앙 문법으로 정의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복신앙이라는 개념정의가 한국 교회를 설명하는 도구로 적합한지, 한국적 상황에서 파생할 수 있는 특수한 의미에서 기복신앙을 재정의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에 이 글의 의의를 두고자 한다.

 

기복의 의미와 성서적 정의

소위 오순절파라고 불리는 교파의 신앙 행태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한국 교회의 현세적 복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자주 문제로 지적되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가 주장한 삼박자 구원론은 세속화된 사회의 현실적 욕구를 적극적으로 대변하여 종교소비자인 대중의 요구에 영합하는 기복신앙의 대표적 사례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문제에 대한 비판적 접근에 앞서 ‘기복(祈福)’이라는 용어에 더 세밀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말뜻 그대로 생각해보면 기복은 복을 비는 것인데, 이 자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복’에 대한 무조건적 비판을 지적하는 주장도 있다.[vi] 복을 비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복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 성서를 보더라도 현세적인 복이 무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복음서의 기록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마가복음 10:29~30).

 

마가복음의 이 구절은 복에 대한 정의를 이중적으로 구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부분이다. 현세적인 수준에서 받게 될 복과 내세의 영적 개념으로서의 복을 분명하게 나누고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 성서는 차별성을 두어 선후관계를 명확하게 규정지으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일례로 구약의 신명기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신명기 28:1~2).

 

먼저 복의 조건을 규정한 신명기의 가르침은 순종이라는 신앙의 규율이 선행되면, 모든 복은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약의 복음서는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위의 두 구절을 요약하면 성서에서 말하는 복의 핵심은 복을 받기 위한 신앙 태도에 중점이 있으며, 그것도 우선적인 복의 중심이 사랑의 실천이나 정의의 실현 혹은 생명의 구원과 같은 영적 재화(財貨)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논리적 전제로 기복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기독교적 신앙 행위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기복신앙을 매우 현세적인 개념으로만 규정하여 부정적 이미지를 재생산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말의 전통적인 용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차용한 용어이기도 한 ‘기복신앙’은 한국의 전통적 샤머니즘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주로 현세적 금전과 건강 그리고 장수의 복을 비는 내용이 샤머니즘의 민속신앙 형태에서 발견되는 전형적 모습이다. 이때 현실의 삶에 직접 결부된 세속적 보상이나 물질적 재화가 복의 구체적 내용으로 제시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달리 샤머니즘은 영적인 복의 개념은 물론이고 윤리적 차원의 규정도 포함하지 않고 있다는 특징을 보여준다.[vii]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성서의 가르침과는 다른 복에 대한 관점을 가진 샤머니즘의 신앙관을 기독교의 신앙행태로 정의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 질문이 그것이다. 이로 인해 영적인 복을 구하는 적극적 기독교의 구원 신앙까지 부정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이다. 무엇보다 역사적으로 사회 저변에서 종교가 혼합되어 온 사실을 고려하면 기복신앙이 샤머니즘의 영향이라고 단정할 수만도 없다. 한국 사회에 전통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유교와 불교조차 현세적 성향을 농후하게 지녀왔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이유에서 기복신앙이라는 개념을 통해 한국 교회의 성향을 통칭하거나 규정짓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더불어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한국적 기복신앙에 대한 개념 정의도 재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파생적 신앙관으로서의 기복

막스 베버의 정의에 따르면 종교는 삶의 실재적 내용을 보다 체계적으로 합리화시키는 고유의 과제를 수행한다. 문화적 문법이라는 개념을 적용해 생각해 보면, 결국 종교는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문화적 의미체계를 규정하는 결정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근대적 노동의 개념을 소명이라는 신성한 의무로 재해석함으로써 사람들의 행위와 사고의 방향에 결정적인 역할을 제공한 것 역시 종교의 영향력이었다. 인간의 궁극적인 삶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유의미한 것으로 해석하여 인간이 그에 합당한 행동을 취하게 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복신앙을 한국 교회의 지배적 신앙 행태로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해진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기독교의 ‘기복’ 개념은 일면 정당한 신앙의 형식이라 말할 수 있다. 내용 규정에 따라 성격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절대자로부터 복을 구하는 형식적 신앙 행태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문제의 접근을 기복신앙의 형식 자체에서 찾기보다는 한국 교회에서 통용되는 복의 내용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의 문법처럼 교회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게 된 요인과 과정이 무엇인지를 추적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한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고려하여 한국 개신교의 성향을 이해하려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초기 선교사들의 종교성향과 그들의 사고구조이다.[viii] 왜냐하면, 이들의 선교활동을 통해 한국 개신교의 모체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전해 준 기독교의 핵심 사상도 결국은 그들의 이해 속에서 재해석된 것이라 해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더불어 당시 서구적 유형의 사회발전을 기대하며 근대화를 추종하려던 한국의 지식인층, 소위 급진적 개화파가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ix] 이전의 전통적 유교 윤리와 이를 주도하던 지식인층의 세력이 퇴조하면서 개신교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지식인층의 출현은 한국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구한말 진보적 지식인들은 서구 문명처럼 사회 진보와 발전이라는 근대화 프로젝트가 개신교의 선교와 함께 한국사회에 급속하게 유입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선교사들은 사회의 세속적 진보 과정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선교는 서구 국가들의 부흥과 성장이 곧 기독교의 강력한 영향력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믿었던 지식인층의 소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초기 선교사들의 관심은 과학 기술을 필두로 하는 진보적 사회사상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적 태도와 훈련을 통한 인간의 도덕적 향상에 더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초기 선교사들의 대부분이 심령부흥운동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실제로 1893년부터 1901년까지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40여 명의 선교사는 북미 장로교 출신으로 그들의 신학교 배경은 대체로 근본주의적 신학이 지배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x]

 

비록 선교사들을 통해 활발한 의료활동과 근대교육의 기반이 마련되기는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교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이들에게 진정한 선교는 복음을 선포하여 많은 사람을 개종시켜서 교회 공동체를 부지런히 세워나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한국의 일반 민중들이 겪고 있었던 전쟁의 상흔과 그로 인한 정서적 폐허는 왜곡된 형태로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xi] 그들의 눈에 비친 사람들은 상처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무질서와 도덕적 합리성이 모자란 각성의 대상에 가까웠다. 이를 위해 선교의 화두는 죄로 물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영적 회개운동에 집중하는 것에 머물렀다. 문제의 근원을 당시 역사적 사회현실과는 단절한 채로 오직 개인의 영혼 구원을 위한 신앙훈련에만 관심을 둔 것이었다. 이는 개신교가 한국 사회에 일상적 삶의 방식을 종교적 의미에서 체계적으로 합리화시킬 기회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한마디로 한국인들의 생활에 주도적 역할을 할만큼의 근본적 문법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는 뜻이다.

 

오히려 개신교가 사회를 조명하는 문화적 문법의 역할을 한다기보다 역으로 사회적 영향에 따라 신앙의 성향이 규정된다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이다. 협소한 의미에서 교회의 신도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일종의 신앙적 문법으로만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교회는 사회적으로 볼 때 많은 한국인에게 근대적 공간으로서의 상징성을 부여받았을 뿐이었다. 이로 인해 산업화 시기를 거치며 교회는 성공과 성장이라는 이미지를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교회가 스스로 이미지를 창출하여 양적 팽창을 주도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도시화와 개발의 과정에서 ‘잘 먹고 잘사는’ 번영과 성공의 길이 바로 신앙 행태에 있다는 논리가 정착한 것이다. 신앙을 종교윤리로 재생산시킨 것이 아니라 세속적 보상 개념으로 특이하게 이해한 결과였다. 개인의 영적 상태가 사회적으로 발현될 수 있는 보상이 물질적 재화를 통한 복의 획득이지 결코 윤리적 공의의 실현과 같은 구원관으로 확립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두로 제시한 한국 개신교의 기복신앙은 교회의 자생적 신앙 문법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역사적 조건 속에서 파생된 신앙관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문화적 의미체계로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만한 종교윤리의 기능은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오히려 한국 사회의 특정한 역사적 조건들이 빚어낸 파생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기복신앙에 대한 성서적 의미와 정의가 명확하게 강조되어야 할 필요성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나아가 번영과 성공을 갈구하는 파생적 기복신앙이 하나의 문법처럼 교회와 신도들에게 삶의 문제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기준틀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럴 때 비로소 한국 교회와 기복신앙이 하나의 동질적 관계로 오해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i] 최재건, “한국교회의 역사의식 - 물량주의를 중심으로,” 청암논단 45회 (2004).

[ii] 이대윤, “한국교회의 물량주의에 관한 문제,” 뉴스파워, 2003년 9월 6일 자 기사.

[iii] 김광식, “종교개혁에서 본 부흥회,” 기독교사상, 1997년 10월호, 27.

[iv] 박영신, “한국기독교와 사회의식,” 기독교역사문화연구소 편, 한국의 기독교 (겹보기, 2001).

[v] 정수복,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생각의 나무, 2007).

[vi] 김진규, “기복신앙의 문제인가, 번영신학의 문제인가,”뉴스앤조이, 2016년 4월 13일 자 기사자료.

[vii] 김성례, “기복신앙의 윤리와 자본주의 문화,” 종교 연구 27 (2002): 61~86.

[viii] 차성환,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의 종교성향과 근대적 삶의 형성,” 한국 종교사상의 사회학적 이해 (문학과 지성사, 1995).

[ix] 이광린, “개화파의 개신교관,” 역사학보 66 (1965). 차성환의 윗글에서 재인용.

[x] Sydney E. Ahlstrom, A Religiou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New Haven, 1972), 차성환의 글에서 재인용.

[xi] 김진호,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미국 복음주의를 모방한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 역사와 정치적 욕망 (평사리, 2006).

규율과 욕망: 경계에 갇힌 이민교회의 딜레마

1.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근대 일본의 대표적 정치사상가인 마루야마 마사오는 서구 자본주의의 핵심을 인간이 가진 욕망추구가 사회적으로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는 사회구조에서 찾은 바 있다.[1] 물론 욕망의 무한정한 향유가 허용된다기 보다는 합리적 규율의 방식 안에서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는 의미로 한 말이다.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은 이를 과학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막스 베버가 사용한 용어이기도 했다.[2] 그에 따르면 근대 이후 서구사회에서 이윤추구나 부의 축적과 같은 인간의 욕망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특수한 조건 하에서 규율화된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예컨대 전통사회처럼 돈을 벌기 위해 투기나 고리대금, 혹은 약탈과 편법 동원도 마다않는 탐욕적 경제행위가 아니라 노동의 합리적 운영방식이나 근검 절약과 같은 개인의 생활규율에 의해 이윤과 축적의 욕구도 정당화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본능적인 무한정 욕구 충족이 아니라 규율에 의해 매우 절제된 욕망의 허용이 서구 자본주의를 가능케 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끊임없이 구성원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경쟁의 세계에서 개인이 생존의 가능성을 높이고 탁월한 경쟁력을 확장시키기 위한 욕망의 추구는 어느 정도 필연적인 것처럼 보였다. 이를 원활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윤을 추구하고 자본을 축적하는 영리행위의 욕망 자체가 적극적으로 정당화될 필요가 있었다. 자본주의가 이전 사회와 다른 독특함이 바로 여기에서 발견된다. 노동에 대한 개념만 하더라도 근대 이전까지는 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담당해야 할 부담스럽고 고된 일로 여겨지던 것이[3],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하늘이 부여한 성스러운 의무로 자연스럽게 인정되기 시작했다. 노동 자체가 삶의 중요한 목적으로 그 의미가 전이된 것이다.

 

부와 재산의 축적에 대한 이해도 큰 변화가 있었다. 전통적 사고로 볼 때 돈을 벌고 모으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자랑스러워하거나 격려할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최소한의 한계를 넘어서는 소유욕은 죄스런 것이라 여겨져 기독교 신앙인들은 세속적 이익을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트는 남을 희생시키고 얻은 비겁한 욕망으로 여겨지던 영리행위조차 소명이라는 의무감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윤리적 정당성을 제공해 주었다. 나아가 개신교 윤리는 지속적인 이윤의 축적을 위해 더 열심을 다해 움직이고 효율적인 방법을 추구해 나가도록 요구했다. 근검절약과 근면, 계산과 계획적 태도, 금욕과 절제와 같은 덕목이 체계적인 삶의 중요한 태도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베버는 이러한 삶의 태도를 사회에 정착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의 종교적 금욕주의라고 주장하였다. 이윤추구와 자본축적을 위한 활동이 단순한 욕망의 발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예기치 않게 소명의 성취를 위한 구원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개신교의 금욕주의적 규율이 이윤축적이라는 인간의 욕망을 합리적으로 가능하게 만든 사건은 욕망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명확한 구별을 강조하던 이전 사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서구 자본주의만의  특이한 사항이었다.

 

2.     유교적 윤리와 거세된 욕망

 

유교적 세계관의 지배적 영향을 받아온 한국 사회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삶의 가치로 여겨져 왔다. 인욕(人欲)이나 자기의 사욕(私欲)을 막는 것이 곧 하늘의 이치(天理)를 이루는 행위라는 주장은 그 실천윤리의 핵심이었다.[4] 소인과 군자를 구분하는 차이도 욕망의 제어 여부에 달려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욕망의 제어는 단순히 법적제재나 규율에 의해 금지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심성의 존재여부 자체가 결코 인정되지 않았다. 어떤 조건 하에서도 욕망은 거세되어야 할 대상이며, 이를 드러내는 것은 하나의 죄악처럼 부정되었다.

 

예를 들어 유교적 전통사회의 이상적 관료상인 청백리(淸白吏)의 위상이 현대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예나 지금이나 청백리에게 요구되는 윤리적 기준은 ‘지공무사(至公無私)’이다.[5] 이는 단순히 공적인 의무에 충실하고 사적인 욕구는 자제하라는 뜻이라기 보다 공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사적인 욕망이 없어야 한다는 해석으로 적용되어왔다. 그러다 보니 실제 관료의 성실성이나 업무에 대한 적합도 보다 그가 얼마나 청빈한 삶을 사는가가 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는 경제적 무능력으로 인한 빈곤조차 관료의 도덕적 자질을 높여주는 웃지못할 상황이 발생할 때도 있었다. 공적인 업무 수행능력이 형편없는 경우에도 만일 그가 청렴한 삶을 추구하고 적어도 공무에 대한 마음이 없지 않다고 판단되면 충분히 청백리의 자격을 부여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한국문화의 일반적 정서라 할 수 있다.

 

국가나 기업을 운영하는 관리를 평가하는 기준이 개인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가의 여부처럼 지극히 인격적이고 내적태도에 머물러 있다는 건 이윤의 욕망추구가 적극적으로 용인되는 자본주의 시대에는 오히려 장애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개인의 이윤욕에 대한 규율의 방식에 있어서 서구의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상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금욕주의적 규율은 인간의 사욕을 적극적인 직업노동의 개념으로 합리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반면에 유교적 세계관은 심정적으로 개인의 욕망을 거세하는 순수한 금욕주의로만 작용하였다. 그 결과 이윤추구와 같은 욕망이 합리적 경제활동을 위한 긍정적 동력으로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낮아지게 된 것이다. 다만 공적인 이익을 추구한다는 명분하에서만 모든 이해추구와 욕망의 실현은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국가 주도하의 경제개발이 효과를 거둔 것이나 IMF 경제위기에서 보여준 국민들의 희생정신 등은 이를 뒷받침 해주는 현상이다. 유독 ‘가진 자’와 ‘튀는 자’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강한 우리 사회의 특성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개인은 공적인 규율 속에 묻혀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서구의 자본주의 정신에 견줄만한 그 무엇이 전혀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근거이기도 했다. 뚜 웨이밍 하버드대 교수는 이를 ‘유교적 윤리’라고 명명한 바 있다.[6] 개신교의 금욕주의적 전통처럼 아시아의 유교 전통 속에서도 절약, 근면, 교육 그리고 금욕생활을 이끄는 규율이 존재하고, 이로 인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유교윤리의 전통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맥락과 개신교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을 동일시한 것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무엇보다 서구의 자본주의를 보편적인 현상으로 규정하여 모든 것을 끼워 맞추려는 시도는 서구 중심적 편견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1990년대 이후에 불어닥친 동아시아 경제 위기 상황을 유교적 전통가치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는 모습은 이를 반증해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국민 개개인의 근면함과 절제하는 생활태도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의 원동력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유교적 금욕주의는 기업의 적극적인 이윤추구와 자본축적을 위한 합리적 추동력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기존 체제와 집단의 목적을 위해 개인의 욕망을 자제하는 수동적인 방식으로만 사용되었다. 고도 성장기 한국의 경제발전이 사기업이 아닌 권위주의적 정부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기간 동안 국가라는 대의 앞에 개인의 욕망은 당연히 억제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는데, 유교윤리는 이를 정당화하는데 필요한 규율의 근거가 되었다. 개인의 희생과 헌신의 미덕은 결국 산업화 과정의 어두운 단면을 덮기 위해 강요된 규율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이것은 이윤추구와 축적으로 대변되는 세속적인 욕망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하여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기업활동으로 재생산해낸 서구 자본주의 정신과는 분명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여전히 유교윤리의 금욕주의적 형태가 한국인들의 의식구조에 남아 있다는 증거는 경제위기의 주된 원인을 도덕적 해이와 같은 심정적 요인에서 찾으려는 경향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위의 청백리와 관련된 이야기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유교적 세계관의 실천윤리는 개인의 욕망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에 핵심이 있다. 이 말은 반대로 사욕을 채우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그 행위의 내용이나 결과는 크게 문제를 삼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부분이다. 명예나 위신처럼 개인의 명분때문에 공적인 규범이나 기업의 경제활동에서 얻게 되는 실리가 무시되고 간과되는 상황에 비교적 관대한 사회의 정서도 이에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책임소재가 개인의 수준에만 머무르게 되면, “나만 잘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가 얼마든지 가능해 질 수 있다. 이것은 신이라는 객관적 초월자와의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개신교 윤리와 큰 차이를 보여준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관점 하에서 행하는 행동규율과 자기 스스로 알아서 통제를 해야 하는 것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신탁의 개념을 통해 서구의 기독교적 전통은 근대의 합리적 법제도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반면 신이나 법처럼 객관적 심판자가 없이 스스로 완전을 추구하는 유교윤리의 전통은 자기규율을 제외하면 기껏해야 다른 사람의 판단에 따라 평가받는 길 이외의 방법을 찾지 못했다. 때문에 유교윤리의 대부분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가치와 덕목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삼강오륜과 같은 유교의 핵심윤리는 타인에게 행해야 할 덕목을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역으로는 상대방으로부터 받게 될 평가를 대비한 처세의 원리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구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비인격적인 규범에 따른 규율을 강화시켰던 것과는 달리 유교적 세계관은 매우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규율의 방식을 정착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연줄과 인맥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이민교회의 딜레마[7]

 

한인이민자의 약 60%정도가 교회와 관련이 있다는 통계 보고가 있다.[8] 그 중 30%정도는 이민 이후 교회에 출석하게 된 새로운 교인들이라고 한다. 이민교회가 단순히 종교활동을 위한 신앙공동체의 역할만이 아니라 다양한 이민생활의 필요를 제공하고 도와주는 봉사단체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면서 생긴 상황이다. 한인이민교회의 성격을 종교 기관임과 동시에 한인 이민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민속적(ethnic) 조직으로 정의내릴 수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9] 특히 한국의 정치상황과 주변의 정세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현실참여적 성향을 띠던 초기 이민교회와 달리 1965년 이후 이민자들에게 교회는 생존에 필요한 물적, 정서적 자원을 제공하는 공급처의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이민교회는 구성원의 요구에 부합하는 종교소비자 중심의 형태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교회의 성장에 대한 관심과 욕구, 이민교회 수 증가, 그리고 이민교회간 경쟁은 이를 부추기는 요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민교회의 종교적 성향이 점차 개인의 구원문제에만 초점을 두는 사사화(Privatization)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10] 주변부로 고립된 이민공동체를 주류사회와 연결시키는 고리의 역할을 하기 보다 오히려 게토화(ghettorization)된 공동체의 삶을 합리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선회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청교도 정신에 기반한 공적윤리가 교회를 통해 이민사회에 접목될 가능성이 그만큼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한인이민교회가 이민자들의 필요에 맞추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능에 머물게 됨에 따라 종교의 중요한 역할인 욕망의 규율방식에 있어서도 한계를 갖게 되었다. 한인이민공동체가 공적인 영역에서 고립되어 있다는 것은 결국 정치영역에서 시민으로서의 위치가 그만큼 불안정하다는 의미이다.[11] 때문에 대개의 관심은 사적 영역인 경제적 생존의 문제에만 국한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이민생활의 성공적인 모습을 경제적 안정과 자녀들의 교육에서 찾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종교소비자인 이민자들의 수요가 생존과 교육의 문제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공급자인 이민교회의 서비스 제공이 매우 사적인 영역에 집중될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따라서 개인적인 경제활동의 욕구가 가족이라는 범위 안에서 신앙적으로 정당화되는 상황을 이민교회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출애굽의 여정이나 가나안에서의 정착과정을 통해 얻은 신앙의 교훈을 이민자의 삶과 연관시키는 경우에 언제나 축복의 결실이 안정된 가정생활과 자손의 번영으로 귀결되는 것은 그 일례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개인의 이윤추구와 자본축적의 욕망을 정당화시킨 것에 있어서는 서구 개신교 윤리의 규율방식과 일면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사적인 경계 안에서만 허용된 욕망이라는 점을 빼면 말이다. 반면 공(公)을 위해 개인의 욕망을 철저히 규제했던 유교윤리에 비해 규율은 다소 약화된 모습이다. 주류사회로부터 다소간 고립된 이민공동체에게 공개념은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을 지배할만큼 크게 작용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욕망의 규제가 어디까지나 가족이라는 사적영역에 국한되었던 결과로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소명’이라는 직업윤리 보다는 ‘운명’이라는 현실순응의 방식을 인정하는 수준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이민공동체가 주류사회에서의 주도적 역할을 기대하고 글로벌화된 시대의 흐름에 부합한 시민의식을 고취하는데 있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이민사회가 가족이라는 경계를 넘어 전체 공동체로 확장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인가는 욕망을 규율하는 방식에서부터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세상이 이민교회를 주목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1] 마루야마 마사오(丸山 眞男)/김석근 역, <일본정치사상사연구> 통나무, 1995

[2] Max Weber,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Stephen Kalberg ed., Routledge, 2001

[3] 노동의 헬라어 번역인 “포노스 πόνος”는 고난과 불행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낱말이다. 노동이 타락한 인류에게 부과된 신의 징벌이라는 성서의 내용은 전통적 서구사상에서 노동을 부정적이고 부차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4] 이황, “성학십도” <한국의 유학사상>, 삼성출판사, 1991

[5] 차성환, “글로벌 시대 한국인의 숙명적 비극: 전통과 현대의 모순”, <글로벌 시대 한국의 시민종교> 삼영사, 2000

[6] Tu Wei Ming, “A Confucian Perspective on the Rise of Industrial East Asia”, Confucianism and the Modernization of China, v. Hase & Koehler Verlag, 1994

[7] 미국 한인 이민공동체의 경제윤리나 규율방식의 특성에 대해 일반화시킬 만한 연구자료는 많지 않다. 무엇보다 이민자들이 서구의 윤리적 가치나 한국의 전통적 세계관과 구별되는 특정한 사회문화적 동기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근거를 제시할 자료는 거의 전무하다. 따라서 이민교회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할만큼 특정한 종교적 신념을 이민사회에 제시했을 것이란 가정만 가지고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검증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민교회의 성향과 이민자의 현실조건을 가지고 둘 간의 연관성 속에서 발견되는 사회학적 함의를 살펴보는데 의미를 두고자 한다.

[8] 김찬희, “미국으로 이민 오는 한인의 수와 한인교회의 전망”, <미주 한인교계 연감>, 크리스천헤럴드, 2014

[9] 김계호, “미주 한인교회 백주년 기념 회고와 전망: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청암논단>, 2009

[10] 김계호, 위의 글

[11] “Pew 재단 2012년 보고서(2010 센서스와 퓨 재단 서베이 종합)를 보면 재미 한인중 64.7%가 시민(40.6%가 귀화시민, 24.1%는 미국태생)으로 아시안계의 평균 귀화율 74.1%보다 훨씬 떨어진다. 무엇보다 아시안 이민 그룹 중에 미국 정착에 성공했다는 주관적 평가나 미국에 동화한 지표는 한인이 가장 낮은 편이다.” 이윤모의 “한인 미국 이민 110주년과 도전” <새로이포럼> 자료참조

직업으로서의 목회: 섬기는 지도자상

1. 직업과 소명

 

독일의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는 1917년과 1919년 세계1차대전의 막바지에 접어든 시기 뭔헨대학의 진보학생단체인 ‘자유학생연합’을 대상으로 ‘직업으로서의 정신노동’에 대한 두번의 강연을 한 바 있다. 첫번째 주제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이었고, 두번째는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는 제목의 강연이었다.[1] 학문과 정치라는 두개의 주제를 통해 베버는 당시의 위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당면한 과제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진단과 처방을 내렸다. 이는 시대적 문제에 대한 타개책과 방향제시에 갈망하던 젊은이들에게 냉철한 학술지침서이자 예언자적 선언문과 같은 것이었다.

두 강연의 주제가 공통적으로 “직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도 이러한 시대적 갈망과 무관하지 않았다. 원문인 독일어로 ‘직업’은 ‘Beruf’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알려진대로 독일어의 ‘Beruf’는 외적인 생계활동으로서의 직업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소명의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말이다. 신에 의해 부여된 과업이라는 의미에서 직업은 노동과 일이라는 행위에 윤리적 의무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베버는 두번의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학문과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다는 말은 ‘그것들을 위해 산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들로 먹고 산다’는 뜻인가?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목회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집단이 형성되었다. 오늘날 성직자로 구분되는 직업분류에 속한 이들이다. 교회라는 작업장에서 종교행위와 관련된 특정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베버의 질문처럼 현대의 전문 목회자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져 보면 어떨까? ‘직업인으로서 성직자 혹은 목회자는 목회를 위해 사는 것인가 아니면 목회를 생활수단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인가?’ 이 글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을 제시하고자, 막스 베버의 소명윤리라는 개념을 통해 직업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지도자로서의 덕목을 살펴 보는데 목적이 있다.

 

2.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제도적 교회의 정착은 종교지도자들이 점차 목회를 생업으로 하는 직업 목회자의 유형으로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목회자가 소명의식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지 않는다면 이전에는 없던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그만큼 목회자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목회라는 직업적 행위에 대해 일종의 의무감을 지닐 필요가 생긴 것이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근간을 이러한 소명의식에서 찾은 바 있다. 곧 신의 부름에 응하고 그것에 복무하는 것을 종교적, 윤리적 의무로 생각하여 헌신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모습을 신교의 핵심 윤리로 보았다.[2] 마찬가지 논리로 <직업으로서의 정신노동 강연>에서는 한 사람의 지도자에게 무엇보다 요구되는 자질을 바로 이러한 신교 윤리에 부응하는 소명의식에서 찾고자 했다. 그렇다면 과연 소명의식이란 무엇을 지칭하는 말일까? 베버는 이를 두 가지 의식으로 개념화시켰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의식의 결과로 인해 행위의 윤리적 지향성은 타협하기 어려운 상반된 원칙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3]

그 하나는 내면적 신념에 기초한 소명의식이다. 소명은 밖으로부터 주어진다기 보다 신앙 혹은 신념을 통해 스스로 갖게된 내면적 믿음이라는 생각이다. 때문에 자신의 행위에 대해 외부로부터의 어떤 보상이나 제재를 고려하지 않고도 당연히 해야한다는 윤리적, 도덕적 의무감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로부터 베버는 신념윤리의 원칙을 도출해 내는데, “기독교도는 올바른 행동을 하고 그 결과는 신에게 맡긴다”라는 의식 속에서 책임 보다는 순수한 신념에 기초한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 그 특징이라는 것이다. 행여 순수한 신념에서 나온 행위가 의도하지 않은 나쁜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그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 혹은 신에게 돌리려는 태도가 이에 해당한다.

반면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신념을 외적으로 나타나는 결과에 대한 책무로 받아들이는 소명의식이다. 신념윤리가 행위의 결과보다는 선한 내면의 의식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에 반해서, 책임 윤리는 예측할 수 있는 행위의 결과에 대한 엄중한 책임에 더 집중한다. 때문에 행동의 결과가 초래할 현실의 상황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신앙을 개인의 내면적 영성에서 바라보는 것이 신념윤리의 소명의식이라면, 책임윤리의 원칙은 현실의 세속적 요구에 대한 적극적 대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베버 스스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신념윤리는 무책임하고 책임윤리는 무신념과 동일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소명의식의 지향이 다름으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차이를 개념적으로 구분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소명의식 가운데 이렇게 서로 다른 윤리적 원칙이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직업으로서 목회를 해야하는 전문목회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직업이라는 소명의 의미 속에는 “왜 목회를 하려하는가?”라는 신념의 문제와 “어떻게 목회의 목적을 성취하여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라는 책무의 서로 다른 질문을 동시에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로서 목회자에게 이 질문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이기도 하다. 그것도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 아니면 보완과 절충의 길을 선택하는가는 오직 목회자 자신에게 남겨진 몫이다. 문제는 신념과 책임이라는 상반된 윤리적 원칙이 대립할 때 발생한다. 지도자가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가에 따라 신앙공동체의 성격에 심연과 같은 깊은 차이가 생겨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선교정책과 관련된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몇년 전 한 선교단체는 특정 지역에 대한 국가의 해외여행 자제 요청에도 불구하고, 선교에 대한 하나의 원칙만 고수하여 선교여행을 강행한 일이 있었다. 당시 선교단체는 기독교가 자리 잡지 못한 지역에 선교하는 것은 당연한 교회의 소명이고, 따라서 다소간 위험의 요소가 있을지라도 우선되어야 할 기독교인의 사명이라는 신념을 천명한 바 있다. 과연 국가의 요청을 배제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선교를 감행함으로써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신념윤리를 따르는 사람에게 이 질문은 매우 불신앙적이거나 도전을 두려워하는 비겁한 주장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법준수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 선교 목적에 대한 수단의 정당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어떠한 윤리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생명을 위해 생명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끝없는 논쟁만 낳을 뿐이기 떄문이다. 선한 신념에서는 오로지 선한 것만 나올 수 있다는 믿음은 순진한 발상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도자가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공동체는 언제나 불안의 요소를 안고 갈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수단과 방법의 정당성에만 집중하게 되면 방향을 잃어버리고 표류하거나 정체될 가능성이 높은 것 또한 사실이다. 변함이 없는 원칙주의자들만이 득세하는 세상은 베버의 말대로 “쇠창살 없는 우리”와 다름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암울한 시대를 거슬러 가슴으로 자신의 순수한 열정을 제시하는 신념의 지도자가 없다면 그처럼 불행한 것이 또 있을까? 위험과 고난의 순간을 견디고 이겨낸 선교사들의 열정이 없었다면 오늘날 교회의 위기를 논하는 것 조차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소명의식의 두가지 서로 다른 윤리적 원칙들 간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정당화하기 어려운 딜레마가 있다. 때문에 목회를 소명으로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능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윤리적 역설의 자각이라는 점은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다. 한 발자욱 더 나아가 베버는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결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도자 만이 소명을 가진 리더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목회자에게 필요한 소명의식은 무엇이며, 지도자로서 이러한 모순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길은 무엇일까?

 

3. 지도자의 덕목

현대 개신교 교회의 의사결정 구조는 대개 교회가 정한 교리와 장정의 절차적 원칙에 근거한 민주적이고 합리적 성향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시스템이나 조직이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 소규모의 개교회에서는 여전히 전통이나 관습 혹은 선례를 중요시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정작 교회 내부의 실질적인 의사결정 과정에 있어 보다 중요한 부분은 바로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교회내 지도자인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는 베버의 구분에 의하면 카리스마적 리더쉽의 유형에 가깝다. 카리스마적 목회자가 자신의 신념을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교인들은 이에 대해 반응하는 형식이 그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배출하고, 권위를 얻은 지도자의 유능한 리더십이 얼마나 큰 성과를 만들어 낼 것인가에 주목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야 할 부분은 지도자의 권위가 아무 조건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목회자가 교회 안에서 성도들로부터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정당성을 인정받아야만 한다. 베버는 정당성을 위한 기초를 세가지 이념형으로 구분한 바 있는데, 첫째는 전통에 의한 정당성, 둘째는 법의 절차적 원리를 중심으로 한 합리적 정당성, 셋째는 지도자의 카리스마적 자질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정당성이 그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베버가 민주적 리더십을 카리스마적 권위의 한 유형으로 보았다는 사실이다.[4] 민주적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흔히 법과 절차적 정당성의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베버는 오히려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이를 추종하는 대중의 관계 속에서 보았던 것이다. 그 결과 지도자가 어떤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는가와 지도자의 리더십이 공동체에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관심 대상으로 남게 된다. 따라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내면적 정신과 윤리적 태도가 강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베버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세가지 요소를 열정(Passion), 책임감(Sense of Responsibility), 균형적 판단(Judgment)이라고 정의내린 바 있다.[5] 이는 종교지도자인 목회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가능하다고 믿는다. 열정은 소명의식을 가진 지도자가 목회를 하는데 필요한 심리적 원천이라 말할 수 있다. 영어로 열정을 뜻하는 Passion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얻은 예수의 고통’과 일반적으로는 ‘이성적인 것과는 구별되는 감정’의 두가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결국 예수의 고통을 감정이입하여 스스로 공감하고자 하는 강력한 감정이 바로 열정이다. 때문에 열정은 개인적으로 나타나는 감정적 충동이라기 보다 오히려 종교적 신념이나 교리에 의해 규율되는 차가운 열정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같은 맥락에서 목회자의 열정은 단순히 목회적 신념이나 이상을 추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과 그 결과까지도 포괄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만큼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자질 가운데 책임감은 필수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다. 베버는 목표의 설정이나 목적의 가치는 언제나 수단과 방법을 통해 조정되고 재평가되며 재설정되어야만 한다고 보았다.[6] 지도자가 가져야 할 소명의식은 신념에 헌신하되, 그것이 미칠 결과와 그것을 통해 얻고자 하는 성과를 고려하여 타협과 재조정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분명한 목적의식과 정당성을 무기로 대다수 교인들과 재조정이나 타협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려 하거나 무시해 버린다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지도자의 몫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목표나 신념 그 자체도 언제나 결정된 것이 아니라 가변적일 수 있다는 전제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 때문에 지도자의 책임감은 단순히 결과에 대한 책임 만이 아니라 신념의 도출과정으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이 실현되는 전과정에 이른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흔히 민주적이거나 도덕적이라는 말은 신념의 선함이나 결과의 성취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과정 중에 얼마나 자유로운 조정과 타협이 가능했는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책임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가를 분명히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지도자의 균형적 판단이다. 이는 내적인 집중력과 평정심 속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능력이자, 베버에 따르면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이다.[7] 만일 지도자가 스스로 모든 것에서부터 객관적으로 거리두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다면, 공동체에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베버는 지도자의 허영심을 가장 큰 내면의 적으로 지적한 바 있는데, 허영심은 대의를 향한 헌신은 물론 지도자가 스스로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요인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하는 욕구처럼 공동체를 해치는 강력한 힘도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균형적 판단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의 가르침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마 16:24)’ 제자의 도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동안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라는 말이 유행했는데,[8] 사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요 10:10)”는 예수의 가르침은 지도자의 자질을 지탱해 주는 가장 중요한 바탕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소명의식을 가진 지도자의 자질과 덕목은 섬기는 지도자가 되기 위한 요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회를 소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현실은 순수한 신념의 실현과 책임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이상적 현장이 아니다. 개인의 삶과 결부된 생활의 문제로부터 공동체를 둘러싼 복잡한 관계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다. 그래서 현실과 타협하거나 아니면 현실로부터 도피하라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스스로 목회에 대한 소명을 갖고 있다고 믿었지만, 어느 순간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명의식은 잊어버리고 목회로 먹고 사는 직업인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바라보게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소명에 대한 진지한 질문으로 현실의 두터운 벽과 마주 선 목회자들도 있다. 그들 중에는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장벽에 한없이 작아져서 낙심한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베버의 말을 빌면, 목회는 열정과 책임감, 그리고 균형적 판단을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 뚫는 작업과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매우 더디고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그래서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지도자를 베버는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자신이 가진 것에 비해 현실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자신의 신념을 놓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외칠 수 있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다.[9] 바로 이런 사람만이 목회에 대한 ‘소명’을 가진 자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1] 막스 베버/전성우 역, “탈주술화 과정과 근대: 학문, 종교, 정치”, <막스베버 사상선집 1>, 나남출판, 2002.

[2] Max Weber,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and Other Writings, Penguin Books, 2002

[3] 막스 베버/최장집 역, <소명으로서의 정치>, 후마니타스, 2011

[4] 막스베버/최장집 역 (2011), 25

[5] 막스 베버(2002), 337

[6] 막스 베버/최장집 역(2011), 90

[7] 막스 베버(2002), 338

[8] Robert K. Greenleaf, Servant Leadership: A Journey into the Nature of Legitimate Power and Greatness, 2002, Paulist Press

[9] 막스 베버(2002), 360

2017년 부활절 남북 공동기도문

죽음을 죽이시고 부활하신 주님,
부활의 기쁨을 기억하는 이 계절에 초록 생명의 기운을 통해
생명의 신비를 보여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보시기에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죄 때문에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던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을 도우시며
우리의 역사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오나 주님,
우리는 70년이 넘는 세월을 남북/북남으로 나누어진 채
민족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리라'는 소망도 잊은 채,
하나님 아닌 것들을 의지하며 평화를 잊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그리하여
죽음과도 같은 분단의 세월, 녹슨 철조망을 걷어내고
남과 북/북과 남이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날을 이루게 하시고,
그 일을 위해 굳은 땅을 갈아엎고 씨를 뿌리는 농부의 심정으로 일하게 하십시오.

주님,
우리로 하여 먼저 자신의 굳은 마음을 갈아 부드러운 마음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한껏 부드러운 마음에 서로 감싸 안을 수 있는
관용의 씨앗과 사랑의 씨앗과 섬김의 씨앗을 뿌리게 하시고,
하나님은 그 땅과 씨앗에 복을 주시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가 맺히게 하시며,
더불어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 민족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부활의 하나님,
남과 북/북과 남의 교회가 차갑고 암울한 죽음과도 같은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음을 꿈꾸게 해 주십시오.
평화의 하나님,
우리 민족의 진정한 의사를 한데 모으고 힘을 합쳐 민족의 부활인
조국통일을 이루도록 해 주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남과 북/북과 남이 하나 되어 살아가던 옛적 일을 기억하게 하셔서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의 나라를 꿈꾸도록 도와주십시오.
생명의 하나님,
봄의 소식이 들려오는 부활의 계절에 우리 민족이 동토(冬土)에
솟아오르는 새순과 새싹을 보면서 희망을 보게 해주십시오.
정의의 하나님,
이 땅에 당신의 영광을 위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셔서
당신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주십시오.

죽음을 죽이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7년 4월 16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조선그리스도교련맹(KCF)

2017 Easter Joint North-South Prayer

Lord, you who have defeated death and risen,
In this season where we remember the joys of resurrection,
Thank you for showing the marvels of life this spring through the vitality of green life.

Yes Lord!
This world was created beautifully in God’s eyes,
Who also sent his one and only Son, Jesus,
To save those who have sinned against You.
Lord, You have shown us how to live as God’s children,
And Your Spirit has led us not only through life,
But also through history.

But Lord,
The sorrows of the 70-years ethnic separation,
Still lingers since the time of our North/South division.
We have lost the hopes of ‘becoming one with God’,
And have sought after earthly goods instead of peace.

Pity us, Lord.
Clear away the pain-filled memories of separation,
And also the rusty barbed-wires.
Help the North and the South fulfill a life of harmony and peace,
As the farmer readies himself to till new land and plant new life,
Prepare us Lord.

Lord,
Help us first open our firmly closed hearts,
So that we can embrace each other with tenderness.
Let us sow the seeds of tolerance, love and service,
And with God’s blessings,
May that land bear much fruit,
And bless our people with a life full of joy and harmony.

God of life,
Help the churches of the North and the South,
To defeat this cold death-like reality.

God of peace,
Help us work together with one united mind,
To fulfill the dreams of unification.
Help us remember the days when the North and the South once were one,
To better live into a world of harmony and peace.

God of life,
In this season of resurrection where we await the signs of spring,
Help us see the hopes of new life,
Sprouting in the cold barren land.

God of justice,
In this land where Your glory awaits,
Let the rivers of justice flow,
Bringing forth Your plans for us.

In Jesus name, the one who has defeated death and risen again,
Amen

April 16, 2017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NCCK)        Korean Christian Federation (KCF)

Both the NCCK of the South and the KCF of the North worked together to prepare this Joint Easter Community Prayer.

 

기독교적 사회정의란 무엇인가?

1.    공평하신 하나님 vs불공평한 세상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공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언뜻 공평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기에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싶다가도, 가난하고 힘없는 실제 주변의 이웃들을 보노라면 쉽게 공평하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한동안 한국사회에서는 “수저계급론”이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유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극소수의 상위 계층이 전체 소득과 소비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꿈이 있다는 상실감이 만들어낸 사회적 신조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삶의 수준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계층의 사다리(ladder of hierarchy)는 이미 구조화 되어 사람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극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질적 부와 재화의 불평등한 분배 상황은 물론 삶의 질에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미치는 문화적 자본의 차이에 이르기까지,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명확하게 구별되어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오늘의 현실입니다. 게다가 능력에 의한 성취 보다는 타고 나면서부터 얻게 되는 집안의 배경, 자질, 미모와 외적 조건이 삶의 수준을 결정짓는 더 중요한 요인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공평이라는 말을 쉽게 떠올리기가 어려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며 이 땅에 기독교적 가치관을 세워나가야 할 교회의 입장에서 이러한 현실은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현실의 사회 정의와 관련된 사회학적 질문이면서 동시에 오래된 신학적 주제를 떠오르게 만듭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왜 세상을 이토록 불공평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을까?” “분명 거기에는 하나님의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접근과 사회학적 진단이 있지만, 여기서는 하나의 개념이 지닌 인문학적 통찰력을 통해 문제에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특히 불공평해 보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세계관을 추적하다 우연히 이 문제를 접근하는 하나의 단서를 우연히 발견하였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목회자 가운데 하나인 김동호 목사의 글에서 얻은 개념인데, 그것은 바로 “흐름” 이라는 말이었습니다.

 

2. 생명의 흐름

하나님의 창조는 한마디로 생명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혼돈에서 질서있는 우주를 만드는 과정은 곧 생명을 만드는 창조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창조하신 역사의 과정은 생명의 전제 조건으로부터 최종적으로는 인간을 만드셔서 생명의 소중한 가치를 모두에게 부여해 주시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특징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움직이고 변화되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움직이고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개념 정의입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가르침이 사랑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입니다. 흔히 사랑의 반대를 무관심이라고 말합니다. 반응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사랑의 특성도 반응하는 성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생명을 향한 반응, 그것이 바로 사랑의 출발점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주신 새계명은 사랑에 당위성을 부여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믿는 자들에게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책임을 뜻하는 영어 단어가 Responsibility 인데 이를 풀이하면 Response + Ability, 다시 말해 반응하는 능력입니다. 생명의 소중한 가치에 반응하는 힘이 바로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사랑과 책임은 생명이라는 창조의 질서를 유지하고 순행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같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생명의 특징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한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바로 흐름이라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물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물은 고여 있으면 죽지만 흐르면 사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이처럼 흐름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인 생명을 유지시키는 중요한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흐름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가능해 지려면 또 하나의 전제조건을 필요로 합니다. 반드시 높낮이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높낮이의 구별이 없으면 흐를 수 없고 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원리를 보면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가운데 불공평한 위계구조가 존재하는 근원적인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는 구절은 이처럼 불공평해 보이는 세상조차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힘인 “흐름”이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 흘러 가도록 창조 되었다고 해서 세상의 불평등한 위계 구조까지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걸까요? 흥미로운 해석이긴 한데, 세상에서 나타나는 불공평한 위계구조는 인간의 의지와 욕망으로 왜곡된 흐름이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정당화될 수 없는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것이라면, 그와는 전혀 반대의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부의 흐름을 보면 실상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흘러가듯 가난한 사람에게서 부가 부자들에게 역행하여 이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가난한 사람의 돈으로 부자의 배를 불리고, 약한 자들을 착취하여 강한 자가 세력을 불리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지요. 소유구조가 아래에서 위로 집중하는 역행의 흐름을 보이고 있는 형국입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같은 흐름의 현상이라 할지라도 세상에서의 왜곡된 흐름은 생명의 흐름이 아니라 결국 죽음의 흐름이라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생명의 흐름에 완전히 역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믿음이 강한 자가 마땅히 믿음이 약한 사람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는 흐름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믿음이 강하다는 건 세기의 문제가 아니라 포용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큰 그릇으로 작은 그릇을 담을 수 있듯이, 믿음이 큰 자가 작은 자를 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요, 동시에 생명의 흐름이라는 겁니다. 작은 시냇물이 흘러서 결국은 큰 바다에 다 포용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인 셈입니다. 그런데 현실의 왜곡된 상황을 보면 힘있는 자가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억압하고 강권적으로 무력을 행사하여 힘없는 사람들을 유린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 역시 생명의 흐름에 역행하는 죽음의 흐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현실 상황입니다. 기독교적 사회정의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위배하고 선한 생명의 흐름에 역행하는 이 부정한 현실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만일 흐름이 잘못되어 역행하고 있다면, 그것을 변화시켜 바로잡는 것이 정의로운 교회의 역할 아닐까요?

 

3. 하나님의 나라: 포도원 품꾼의 비유

예수께서는 정의로운 세상의 모범을 한마디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찾으셨습니다. 그것이 왜곡된 현실을 변화시켜 바로잡아가야 할 최종의 목적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독교적 사회정의의 구현도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모습에서 이룰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를 명확하게 보여주신 비유가 바로 포도원 주인과 품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비유의 이야기는 세상의 경제개념으로 보면 그 자체로 매우 불공평한 것처럼 보입니다. 노동의 양이나 노동시간을 가지고 임금을 지불하는 시장을 고려해 볼 때, 오전 아홉시에 들어와 일을 한 사람과 오후 다섯 시에 가까스로 고용되어 일을 한 사람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이라는 동일임금을 지불한다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불공평한 세상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께서 묘사하신 하나의 비유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이 비유의 목적은 이야기의 도입부인 마태복음 20장 1절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는 포도원 주인 또는 포도원 주인의 상황과 같다”는 구절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의 노동이나 생산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꾼을 고용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포도원을 통해 먹고 살아가게 될 일꾼을 고용해서 그들을 먹이는 것에 더 초점을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이 곧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자본주의에서 정의하는 기업인 정신의 핵심도 생산과 이윤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상품을 많이 생산해서 얼마나 많은 이윤을 올리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기업활동을 통해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기업활동도 단순히 이윤을 많이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있는 것이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돈과 생산의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장이 이기적 욕망에 의해 지배당하면서 이러한 원래의 목적은 점차 퇴색되고, 이윤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에만 사람들이 몰두하는 역행적 흐름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도 바로 돈이 아니라 ‘사람’에게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왜 모두가 한 데나리온인가의 문제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데, 사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 초점을 맞추고 계신 것은 애초부터 품삯이 아니라 바로 고용된 일꾼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하니까, 그것이 얼마인가 하는 화폐가치 자체가 아니라 하루를 살 수 있을만큼 최소생계비용이라는 점에만 관심을 두셨던 겁니다. 오히려 비유의 극적인 표현은 오후 다섯 시쯤에 길에서 여전히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포도원 주인의 마음입니다.

그 시간까지 길에서 일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하루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냥 빈손으로 되돌아 갈 수 없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방황하는 그 애절한 처지를 이해하십니까? 아마도 오후 5시는 우리 인생의 가장 초조하고 절박한 좌절의 때를 표현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삶의 가장 낮은 곳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불공평한 세상을 가장 애처롭게 바라볼 시점의 사람들입니다. 역행하는 세상의 흐름에 가장 피해를 입기 쉬운 “소자(작은자)”들입니다.

예수께서 이들을 주목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들을 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비록 세상의 높고 낮음이 분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방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강한 이들이, 높은 곳에 앉은 자들이, 더 많이 가진 이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포용하고 돕는 것이 옳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 흐르는 모습입니다. 정의로운 흐름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때로 이것이 세상의 관점으로는 눈에 거슬릴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조금 내려놓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왜곡된 흐름을 바꿀 때 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의 꼴찌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불공평한 세상의 눈에 하나님이 참 불공평하게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4. 기독교 신앙의 본질: 제자가 되는 길

히틀러가 세력을 떨치고 있던 1934년 독일의 나치주의에 반대하여 본 회퍼와 칼 바르트 등의 신학자가 주축이 된 ‘고백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고백교회는 설립 다음 해인 1935년 독일 바르멘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종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계시라는 내용의 《바르멘 선언》을 발표하고 히틀러에 대한 불복종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러한 저항은 결국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지속적인 탄압을 받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국가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고백교회의 구성원들은 그들의 신앙적 신념 속에서 저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반면 당시 독일에는 공식적으로 승인된 제국교회가 개신교회의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이들은 히틀러의 나치즘에 동조하거나 암묵적으로 묵인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고백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던 본회퍼는 독재에 굴복한 당시 독일 제국교회가 값싼 은혜에 빠져 있다는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값어치 없는 싸구려로 만들어 버렸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아무 공로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더럽힌 꼴이 되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의 모습을 살지 못했다는 비판이었던 겁니다.

종전을 얼마 앞두지 않고 결국 나치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 본회퍼에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제자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고백교회의 저항 운동도 정치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리스도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데 장애가 되는 불의와 부정한 현실은 부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회퍼의 암울한 시대와는 또다른 모습의 삶을 살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전히 생명의 흐름이 왜곡되어 정의롭지 못한 현실이 눈 앞에 벌어지고 있다면, 지금도 제자의 길을 가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 고난의 삶을 선택한 본회퍼와 같은 결정이 요청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고백교회의 선택과 같은 험난한 길을 과연 얼마나 가려 할까요? 솔직하게 아주 ‘독한’ 소수의 사람만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심히 우려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모두가 본회퍼의 신앙고백을 입술로 행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독재에 항거해 목숨까지 던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당장 자신에게 불리하고 조금이라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면 과연 얼마나 그 길을 기꺼이 가려 할까요? 제자가 되기 위해 자기 소유를 버리라는 말처럼 오늘날 사람들의 귀에 속상하게 들리는 일이 또 있을까요?

 

5. 기독교적 사회정의의 실천: 라이크에서 러브로

최근 이어령 박사의 “생명이 자본이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 “양에게 이름을 붙이고 만 소년”이라는 일본책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식용으로 출하하는 양을 기르다가 양에게 정이 들어서 그만 이름을 붙여준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소년이 양에게 이름을 붙여준 순간 그 양은 더이상 식용 가축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소년의 친구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이어령 박사는 여기서 사랑(love)과 좋아하는 것(like)이 구분된다고 주장합니다.

양을 먹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지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고양이가 쥐를 좋아하는 것은 라이크이지 러브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잡아먹으면 맛있고 배가 부르니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이 생긴다는 겁니다. 우리는 개도 식용으로 먹는데 그건 개를 좋아하는 특이한 방식입니다. 그런데 사랑 “애(愛)”를 붙이면 순식간에 의미가 달라지게 됩니다. ‘애완용’ 펫 pet이 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것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는 겁니다. 먹지 않고(소유) 아껴주며 생명의 교감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사람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을 배경과 재산과 같이 소유를 보고 좋아한다면 그건 라이크의 감정이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가진 것 하나 없는데도 마음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남이 가진 것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내 것을 줄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한마디로 누구의 명령에 의해 강압적으로 시키지 않아도 자기의 소유를 내려놓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 소유를 내려놓는 자만이 제자가 되는 길을 갈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군대의 강압적인 규율과 원칙처럼 반드시 그렇게 해야한다는 식의 중압감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제자의 길은 가까운 혈육 조차도 미워해야할 만큼 지독한 신념에 사로잡혀 있어야만 가는 무미건조한 길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사랑이 없이 오직 신념으로만 사로잡혀 가는 길이라면, 행여 그것은 히틀러나 많은 독재자들이 고집했던 국가주의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자기의 소유를 내려놓으라고 하신 요청은 우리에게 라이크의 감정이 아니라 러브의 감정을 가지라는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자신을 위해 남의 것 조차 탐하며, 타인을 라이크의 대상과 도구로 삼는 모습에서 벗어날 것을 요청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제자가 되는 길, 그것은 결국 러브를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가장 최우선적인 것으로 삼으라는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오늘 우리 시대가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을 싸구려 라이크로 만드는 시대는 아닐까 라는 우려의 시선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사랑 조차도 외적 성장과 물질숭배라는 라이크를 위해 왜곡되고 있는 현실은 아닌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위해 타인을 욕망의 도구나 대상 정도로 여기는 우리의 모습은 결국 하나님의 정의가 무너진 왜곡된 흐름의 모습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적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길은 결국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길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유하기를 욕망하며 모든 것을 라이크의 대상으로 삼는 흐름의 역행이 아니라, 러브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바로 정의를 구현하는 제자의 삶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를 위한 세상의 투쟁도 하나의 방식이지만, 궁극적으로 부정한 흐름을 변화시키는 정의의 핵심은 결국 기독교적 신앙의 핵심인 사랑에서 찾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서로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고 정의를 실현하는 길에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중요한 근원적 실천의 출발지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살림의 길

우리 말에 ‘살림’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말 뜻 그대로 살린다는 의미의 명사입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먹고 사는 문제를 잘 해결하는 행위에서 기업이나 국가를 경영하는 것까지 다 포괄하는 말입니다. 경제적 의미에서 볼 때, 살림은 필요를 효율적으로 잘 채워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먹고 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면서 그로 인해 피해가 발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흔히 살림을 잘 한다는 표현이 이에 해당합니다. 반대로 살림을 잘 못하면, 지금 당장 먹고 사는 문제는 물론이고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처지에까지 놓이게 될 겁니다. 예컨대, 최근 한국의 국가부채가 640조가 넘어갔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이것은 국가의 살림살이가 방만하게 운영되어왔다는 지표이고, 또 이런 식으로 계속되다보면 결국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란 예측이 가능해 집니다.

살림살이를 못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개인의 생명이나 가계에 위협이 되듯, 기업이나 국가도 잘못된 살림살이로 인해 궁극에는 붕괴의 위험에 빠지게 되는 법입니다. 결국 살림이 아니라 죽임이나 멸망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대개의 경우 살림을 잘 해서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는 판단을 잘 해야 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비용과 수익, 곧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잘 관리하는 겁니다. 꼼꼼히 따져 보고 그 명분과 실익을 잘 계산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들어오는 것보다 나가는 것이 너무 많거나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대개 소비나 지출을 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 삶의 대부분 영역에 다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사람들은 손해 보며 밑지는 일을 하려 들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상에서는 이렇게 해야 보통 잘 사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교육에 대한 투자가 그렇습니다. 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이 수입보다 많아서 살림살이가 빠듯한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녀교육에는 공을 들입니다. 교육열이 높은 까닭도 있고, 또 언젠가는 투자한만큼의 결실이 맺어질 것이란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OECD 국가중 학자금 대출 이자가 가장 비싼 한국의 대학진학률이 거의 80%에 이른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 주는 증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수지타산 맞지 않는 상황조차도 세상을 잘 사는 법 중의 하나라고 믿고 있는 결과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실의 살림살이에는 그렇게도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들이 왜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일에는 그토록 인색한 것일까요? 왜 세상 일에는 그렇게 과도할만큼 관심을 두면서 생명을 다루는 신앙 문제에 대해서는 남의 일처럼 방관하고 지내는 것일까요? 사실 누가복음 14:25-33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은 결국 이 질문에 관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살림살이를 다른 말로 제자가 되는 길이라 표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곧 영원한 생명의 길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누군가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것은 그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살림의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옷으로 입히고, 말씀으로 생명의 양식을 먹임으로 사람을 살게 만드는 살림살이와 같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하는 살림살이가 그렇듯, 하늘의 생명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 속에서 행하는 살림살이 역시 지혜롭게 운용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방만하고 무분별한 살림살이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살림이 아니라 죽임 혹은 멸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살림을 위해 치루어야 할 비용이나 대가가 무엇인가 입니다. 보통 일상의 삶은 자기 자신, 자기 가정, 자기 기업, 혹은 자기의 국가와 민족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비용을 치루고 살림살이를 합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살림살이는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자기와 관련된 모든 것을 댓가로 내놓아야 합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자기와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세상과는 완전 딴판의 살림살이입니다. 이렇게 살면 세상에서는 살림 못한다고 핀잔이 아니라 죽는다고 아우성일텐데, 주님은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살림살이라고 말씀합니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그래서 자기와 자기 소유를 버리는 것을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 표현하셨습니다.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가 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입니다. 만일 이렇게 살림살이를 하지 못하면, 그 끝은 죽음과 멸망 뿐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 이유를 주님은 우리에게 토기장이와 질그릇의 관계를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질그릇은 토기장이의 작품입니다. 진흙을 빚어서 만든 도구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생기를 불어 넣어 우리를 살게 하셨습니다. 그 분의 영이 우리를 살리는 힘입니다. 먹고 마시며 입는 것은 육신을 살리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은 흙에서 온 것처럼 언젠가 흙으로 돌아가면 그 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그 분의 영으로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분명 우리의 생명은 그 분의 손 안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살림의 길은 영이신 주님과 동행하는 것 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육신에 속한 자기 욕망의 십자가를 내려놓고 영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 나서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에게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자신이나 가족과 자기가 가진 소유를 그저 포기하라는 현실부정의 말씀이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곧 우리 자신을 살리는 살림의 길입니다. 

완장

작가 윤흥길의 <완장>이라는 소설작품이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임종술은 뚜렷하게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늘 낚시하러 다니던 저수지의 감시원으로 임명됩니다. 이후로 그는 새로운 삶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에게 주어진 비닐 완장이 새로운 삶의 근거요 명분이 되어준 것이었습니다.

완장을 팔에 두른 뒤 종술의 태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합니다. 온갖 위세와 으름장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듯 행패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불안한 마음으로 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완장은 원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 것이야. 진짜 힘을 가진 주인은 언제나 완장 뒤편 안전한 곳에 숨어 있다는 걸 잊지마라”

그러나 이미 시답잖은 권력욕을 맛본 종술은 분수를 모르고 일을 벌이다 스스로 파멸의 길을 가게 됩니다. 결국 자신에게 모든 것을 가져다 주리라 믿었고, 급기야는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게 만들었던 완장을 벗어 던지고 길을 떠나는 신세가 되어 버립니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완장으로 상징되는 권력의 오만과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겁니다.

옛말에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꽃이 열흘이 지나면 시들어 가듯이, 아무리 높은 권세라 하더라도 10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무서울 것 없고 남부러울 것 없는 힘과 미모를 지니고 있다해도 영원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유한한 인생에 주어진 조건들은 그 어느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도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유한함을 다시금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할 변함없는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삶의 우선순위와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할 이유입니다.

성령의 불세례를 받으면 싸고 있던 껍데기는 다 타버리고 알곡만 남기 마련입니다. 타락한 육의 사람을 벗고 온전한 영의 사람이 되는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타고 남은 알곡이야말로 하나님이 바라는 진정한 열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감싸고 있는 완장과 같은 온갖 쭉정이들은 다 태워버려야 합니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우상들, 그것이 다 완장이요 쭉정이 입니다. 진정한 알곡이 되기 위해 성령의 불세례로 다 태워져야 할 것들입니다.

이제 새로운 학기를 맞이하여 나아가는 우리교회와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참 알곡들이 되십시오. 우리의 눈과 귀를 막고 있는 완장과 쭉정이들은 다 성령의 불로 태워버리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믿음의 눈과 귀로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담는 도구이자 통로입니다. 하늘의 생명수를 부어주시는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실 때, 우리를 통해 마르지 않는 은혜의 샘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현명한 부자가 되는 법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세상이 모두 내 것이라는 듯 주먹을 쥐고 있지만, 세상을 떠날 때에는 ‘보아라, 이렇게 빈손으로 가지 않느냐’는 듯이 손바닥을 편다.” 이와 비슷한 뜻으로 우리 옛말에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고려시대 명승 중 하나인 나옹화상(懶翁和尙)의 누이가 그에게 읊었다는 부운(浮雲)이라는 선시의 일부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이것이 인생이다 
태어남은 어디서 오며 죽음은 어디로 가는가
태어남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인데
뜬구름 자체는 본래 실(實)함, 고정된 형태가 없나니, 태어남과 죽음도 모두 이와 같다네
여기 한 물건이 항상 홀로 있어, 담연히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네"

이 시는 살고 죽는 것을 마치 한조각 구름이 일고 사라지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자체로는 쉽게 꺼지고 말, 꿈같은 것일 뿐인데 여전히 사람들은 그 당연한 이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헛되고 허망한 일이라 고백했던 전도서의 고백 역시 이러한 이치의 연장선 속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인생을 현명하게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내일이면 꺼져버릴 화려한 욕망의 빛을 좇는 불나방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일깨우는 참된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현명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어느 날 예수께 한 사람이 나아와, 형제간의 재산 상속 문제로 겪는 어려움을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올바른 판단을 자기 형제에게 내려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가르침의 핵심이 현실에서 얻고자 하는 재산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말씀은 죽어서는 한 줌도 쥐고 가지 못할 물질적인 부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쌓게 될 숨은 보화에 관련된 것을 강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 부자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소출을 올린 부자가 배부른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넘치도록 풍부한 수확물을 창고에 보관하고서는 어떻게 즐기며 살 것인가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마치 사업이 잘 되서 은행 잔고가 늘어나고, 투자한 주식이 소위 대박이 나고 구입한 주택시장이 때아닌 호황을 누릴 때, 부푼 가슴을 누르며 이 넘쳐나는 이윤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희망하는 순간이 이 때가 아닙니까?

그런데 맥빠지게 거기에 대고 주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쌓아두고 즐길 것 생각하면 뭣하나? 오늘밤 네 운명이 끝이 날터인데.’ 자신을 위해서 쌓아 둔 재물, 운명이 오늘로 그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제목이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그렇다고 부를 누리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 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만일 더 많은 수확을 거두고 그것을 위해 더 많은 땀과 노력을 흘리는 이윤창출 행위까지 부정해 버린다면 아마도 세상은 넝마주의나 회의주의 같이 태만과 방종으로 가득차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때문에 이 비유의 핵심은 부자가 되고 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부자가 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곧 어리석은 부자인가 아니면 현명한 부자인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부자에 대한 정의도 담겨 있습니다. 부자를 규정하는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기준이 부를 쌓는 목적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위해서 유한한 이 세상에 쌓아 두는 부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쌓는다면 분명 그것은 현명한 선택임을 밝혀 주고 계십니다. 비록 세상에 화려하게 비치는 모습은 아니지만, 하늘 나라에 쌓는 숨은 보화야말로 영원을 살아가는 현명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한치앞도 볼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오직 죽어 없어질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사는 삶이라면, 그것보다 허망한 것도 없을 겁니다. 공수래 공수거의 한조각 구름같은 삶을 깨닫지 못한 결과입니다.그러므로 참 지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보이지는 않으나 숨은 보화처럼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하늘의 보화를 심는 일이란 게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나 자신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교회와 공익을 위한 곳에 자신의 재산을 환원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막상 내 문제가 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차라리 자식한테 물려주는 한이 있어도, 힘겹게 벌어들인 재산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나눠 준다는건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인생의 순례자입니다. 여행길 얻는 모든 것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대로 사용하다가, 때가 되면 다시 돌려주고 떠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모두가 인생의 동반자들입니다.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장 큰 덕목이 바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리 모두가 그 뜻 가운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아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현명한 부자로 살아가는 법임을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비움의 길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말씀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해 놓고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양식인 말씀은 우리가 완전히 받아 먹은 것처럼 내 안에 소화를 시켜 버리면 없어져 버려야 합니다. 먹은 음식은 소화가 되어서 영양분이 되면 그만입니다. 비우면 우리 영육이 채워지는 이치가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먹은 사람은 입에 말씀으로 가득차 내뱉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잘 먹고 소화시켜 잘 사는 사람입니다. 잔에 물을 채우려면 먼저 비워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사람이 걷기 위해서는 발이 땅에 고정되어 있어서는 안됩니다. 땅에서 발을 떼어 공간을 비워야 움직일 수 있는 법입니다.

노자 도덕경 48장에 보면 “爲學日益 爲道日損” 이란 구절이 나옵니다. 풀이하면 지식을 쌓는 일은 하루하루 쌓아가지만 길을 가려면 날마다 덜어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매일 공부하면 분명 우리 가운데 지식은 축적될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앎의 길이란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워낼 수 있을 때 얻는 것이란 뜻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을 자기 비움이라고 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고향, 자기 친척, 자기 집에서 ‘자기’를 다 비워내는 겁니다. 소유하려는 욕망을 다 내려놓는 겁니다. 그저 주님께 맡기는 믿음만 있으면 족하다는 것이지요. 제자들을 떠나 보내시면서도 예수님은 비움의 길을 강조하셨습니다. 대신에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생활은 소유하기가 쉽지 않은 나그네 여정이지만, 대신에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신앙의 힘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자기 능력, 자기 지혜, 자기 물질에 의지하다 보면 주님의 권능과 기적이 임하는 것을 보기 어렵습니다. 주시는 이도, 행하시는 이도 주님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진정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신앙도 결국은 비움의 길입니다. 우리가 채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채우실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비워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같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자기를 비우는 연습을 날마다 행하게 하소서. 그리고 저희를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빛과 소금을 담기 위해 먼저 저희를 깨끗이 비우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비움의 길을 묵묵하게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2) - 졸업생들을 향한 사자후

성서에 자주 언급되는 단어 "영광"이라는 말의 원어인 doksazo(δοξάζω)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생각 없이 우리의 욕망에 사로잡혀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부질없는 생각들로 인해 잘못된 길을 걸어가지 말고, 건강하고 균형 잡힌 바른 생각을 하라는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때로 어려움을 당하거나 중대한 고비를 겪고 난 뒤에 자신의 능력 밖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찬양이 우러나옵니다. 그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놀랍고 신비로운 역사를 찬양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 삶은 분명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실한 삶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나님의 진리로 거룩한 자녀가 되는 삶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면서 영광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룩한 삶을 생각하며 부질없는 세상의 욕망에 붙잡히지 않고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오래 전 고등학교 시절 제 친한 친구의 집에 방문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같은 또래의다른 동기들 보다 생각이 매우 깊고 독특한 자기 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어서 늘 제 마음속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친구의 집에 이르렀을 때, 저는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달동네 허름한 무허가 주택의 모습에 한 번 놀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게의치 않고 오히려 당당한 친구의 모습에 또 한 번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를 놀라게 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집에 들어가서 친구의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앉자마자 던지신 아버님의 질문때문이었습니다. 저희에게 한가지 숙제를 주신다고 하시면서 다짜고짜 “가서 여의도의 중심을 찾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30여년이 지난 요즘, 문득 그 때 그 질문이 떠올라 제 자신에게 묻게 됩니다. 그 질문에 답을 구했는가 라고 말입니다. 아니 어쩌면 더 정확하게는 ‘답을 구하려 노력은 해보았는가’ 라는 질문이 더 맞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오래 전 유명한 한 도예공이 했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움직이는 물레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중심을 찾는 것이 인생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되고 세월도 흘러서 이제 중년의 나이에 이르렀지만, 과연 제 자신은 변하지 않는 중심을 발견하고 살았던 것일까?

이제 졸업을 통해 세상 속으로 나가는 젊은이들에게 드리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 것입니까?” 부디 바라기는 삶의 중심을 찾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 길은 바로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세상과는 구별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영광된 삶을 사는 모습입니다. 이를 위해 부딪끼는 모든 것에 늘 생각하며 세상과 마주하십시오! 그리고 그 때마다 물밀듯 다가오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비로소 변화되는 세상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삶의 중심을 온전히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