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사회정의란 무엇인가?

1.    공평하신 하나님 vs불공평한 세상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공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언뜻 공평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기에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싶다가도, 가난하고 힘없는 실제 주변의 이웃들을 보노라면 쉽게 공평하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한동안 한국사회에서는 “수저계급론”이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유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극소수의 상위 계층이 전체 소득과 소비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꿈이 있다는 상실감이 만들어낸 사회적 신조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삶의 수준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계층의 사다리(ladder of hierarchy)는 이미 구조화 되어 사람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극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질적 부와 재화의 불평등한 분배 상황은 물론 삶의 질에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미치는 문화적 자본의 차이에 이르기까지,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명확하게 구별되어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오늘의 현실입니다. 게다가 능력에 의한 성취 보다는 타고 나면서부터 얻게 되는 집안의 배경, 자질, 미모와 외적 조건이 삶의 수준을 결정짓는 더 중요한 요인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공평이라는 말을 쉽게 떠올리기가 어려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며 이 땅에 기독교적 가치관을 세워나가야 할 교회의 입장에서 이러한 현실은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현실의 사회 정의와 관련된 사회학적 질문이면서 동시에 오래된 신학적 주제를 떠오르게 만듭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왜 세상을 이토록 불공평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을까?” “분명 거기에는 하나님의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접근과 사회학적 진단이 있지만, 여기서는 하나의 개념이 지닌 인문학적 통찰력을 통해 문제에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특히 불공평해 보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세계관을 추적하다 우연히 이 문제를 접근하는 하나의 단서를 우연히 발견하였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목회자 가운데 하나인 김동호 목사의 글에서 얻은 개념인데, 그것은 바로 “흐름” 이라는 말이었습니다.

 

2. 생명의 흐름

하나님의 창조는 한마디로 생명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혼돈에서 질서있는 우주를 만드는 과정은 곧 생명을 만드는 창조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창조하신 역사의 과정은 생명의 전제 조건으로부터 최종적으로는 인간을 만드셔서 생명의 소중한 가치를 모두에게 부여해 주시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특징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움직이고 변화되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움직이고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개념 정의입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가르침이 사랑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입니다. 흔히 사랑의 반대를 무관심이라고 말합니다. 반응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사랑의 특성도 반응하는 성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생명을 향한 반응, 그것이 바로 사랑의 출발점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주신 새계명은 사랑에 당위성을 부여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믿는 자들에게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책임을 뜻하는 영어 단어가 Responsibility 인데 이를 풀이하면 Response + Ability, 다시 말해 반응하는 능력입니다. 생명의 소중한 가치에 반응하는 힘이 바로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사랑과 책임은 생명이라는 창조의 질서를 유지하고 순행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같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생명의 특징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한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바로 흐름이라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물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물은 고여 있으면 죽지만 흐르면 사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이처럼 흐름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인 생명을 유지시키는 중요한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흐름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가능해 지려면 또 하나의 전제조건을 필요로 합니다. 반드시 높낮이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높낮이의 구별이 없으면 흐를 수 없고 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원리를 보면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가운데 불공평한 위계구조가 존재하는 근원적인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는 구절은 이처럼 불공평해 보이는 세상조차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힘인 “흐름”이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 흘러 가도록 창조 되었다고 해서 세상의 불평등한 위계 구조까지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걸까요? 흥미로운 해석이긴 한데, 세상에서 나타나는 불공평한 위계구조는 인간의 의지와 욕망으로 왜곡된 흐름이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정당화될 수 없는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것이라면, 그와는 전혀 반대의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부의 흐름을 보면 실상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흘러가듯 가난한 사람에게서 부가 부자들에게 역행하여 이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가난한 사람의 돈으로 부자의 배를 불리고, 약한 자들을 착취하여 강한 자가 세력을 불리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지요. 소유구조가 아래에서 위로 집중하는 역행의 흐름을 보이고 있는 형국입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같은 흐름의 현상이라 할지라도 세상에서의 왜곡된 흐름은 생명의 흐름이 아니라 결국 죽음의 흐름이라 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생명의 흐름에 완전히 역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믿음이 강한 자가 마땅히 믿음이 약한 사람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는 흐름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믿음이 강하다는 건 세기의 문제가 아니라 포용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큰 그릇으로 작은 그릇을 담을 수 있듯이, 믿음이 큰 자가 작은 자를 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요, 동시에 생명의 흐름이라는 겁니다. 작은 시냇물이 흘러서 결국은 큰 바다에 다 포용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인 셈입니다. 그런데 현실의 왜곡된 상황을 보면 힘있는 자가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억압하고 강권적으로 무력을 행사하여 힘없는 사람들을 유린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 역시 생명의 흐름에 역행하는 죽음의 흐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현실 상황입니다. 기독교적 사회정의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위배하고 선한 생명의 흐름에 역행하는 이 부정한 현실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만일 흐름이 잘못되어 역행하고 있다면, 그것을 변화시켜 바로잡는 것이 정의로운 교회의 역할 아닐까요?

 

3. 하나님의 나라: 포도원 품꾼의 비유

예수께서는 정의로운 세상의 모범을 한마디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찾으셨습니다. 그것이 왜곡된 현실을 변화시켜 바로잡아가야 할 최종의 목적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독교적 사회정의의 구현도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모습에서 이룰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를 명확하게 보여주신 비유가 바로 포도원 주인과 품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비유의 이야기는 세상의 경제개념으로 보면 그 자체로 매우 불공평한 것처럼 보입니다. 노동의 양이나 노동시간을 가지고 임금을 지불하는 시장을 고려해 볼 때, 오전 아홉시에 들어와 일을 한 사람과 오후 다섯 시에 가까스로 고용되어 일을 한 사람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이라는 동일임금을 지불한다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불공평한 세상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께서 묘사하신 하나의 비유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이 비유의 목적은 이야기의 도입부인 마태복음 20장 1절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는 포도원 주인 또는 포도원 주인의 상황과 같다”는 구절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의 노동이나 생산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꾼을 고용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포도원을 통해 먹고 살아가게 될 일꾼을 고용해서 그들을 먹이는 것에 더 초점을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이 곧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자본주의에서 정의하는 기업인 정신의 핵심도 생산과 이윤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상품을 많이 생산해서 얼마나 많은 이윤을 올리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기업활동을 통해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기업활동도 단순히 이윤을 많이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있는 것이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돈과 생산의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장이 이기적 욕망에 의해 지배당하면서 이러한 원래의 목적은 점차 퇴색되고, 이윤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에만 사람들이 몰두하는 역행적 흐름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도 바로 돈이 아니라 ‘사람’에게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왜 모두가 한 데나리온인가의 문제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데, 사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 초점을 맞추고 계신 것은 애초부터 품삯이 아니라 바로 고용된 일꾼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하니까, 그것이 얼마인가 하는 화폐가치 자체가 아니라 하루를 살 수 있을만큼 최소생계비용이라는 점에만 관심을 두셨던 겁니다. 오히려 비유의 극적인 표현은 오후 다섯 시쯤에 길에서 여전히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포도원 주인의 마음입니다.

그 시간까지 길에서 일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하루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냥 빈손으로 되돌아 갈 수 없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방황하는 그 애절한 처지를 이해하십니까? 아마도 오후 5시는 우리 인생의 가장 초조하고 절박한 좌절의 때를 표현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삶의 가장 낮은 곳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불공평한 세상을 가장 애처롭게 바라볼 시점의 사람들입니다. 역행하는 세상의 흐름에 가장 피해를 입기 쉬운 “소자(작은자)”들입니다.

예수께서 이들을 주목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들을 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비록 세상의 높고 낮음이 분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방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강한 이들이, 높은 곳에 앉은 자들이, 더 많이 가진 이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포용하고 돕는 것이 옳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 흐르는 모습입니다. 정의로운 흐름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때로 이것이 세상의 관점으로는 눈에 거슬릴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조금 내려놓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왜곡된 흐름을 바꿀 때 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의 꼴찌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불공평한 세상의 눈에 하나님이 참 불공평하게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4. 기독교 신앙의 본질: 제자가 되는 길

히틀러가 세력을 떨치고 있던 1934년 독일의 나치주의에 반대하여 본 회퍼와 칼 바르트 등의 신학자가 주축이 된 ‘고백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고백교회는 설립 다음 해인 1935년 독일 바르멘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종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계시라는 내용의 《바르멘 선언》을 발표하고 히틀러에 대한 불복종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러한 저항은 결국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지속적인 탄압을 받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국가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고백교회의 구성원들은 그들의 신앙적 신념 속에서 저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반면 당시 독일에는 공식적으로 승인된 제국교회가 개신교회의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이들은 히틀러의 나치즘에 동조하거나 암묵적으로 묵인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고백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던 본회퍼는 독재에 굴복한 당시 독일 제국교회가 값싼 은혜에 빠져 있다는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값어치 없는 싸구려로 만들어 버렸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아무 공로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더럽힌 꼴이 되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의 모습을 살지 못했다는 비판이었던 겁니다.

종전을 얼마 앞두지 않고 결국 나치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 본회퍼에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제자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고백교회의 저항 운동도 정치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리스도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데 장애가 되는 불의와 부정한 현실은 부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회퍼의 암울한 시대와는 또다른 모습의 삶을 살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전히 생명의 흐름이 왜곡되어 정의롭지 못한 현실이 눈 앞에 벌어지고 있다면, 지금도 제자의 길을 가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 고난의 삶을 선택한 본회퍼와 같은 결정이 요청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고백교회의 선택과 같은 험난한 길을 과연 얼마나 가려 할까요? 솔직하게 아주 ‘독한’ 소수의 사람만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심히 우려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모두가 본회퍼의 신앙고백을 입술로 행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독재에 항거해 목숨까지 던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당장 자신에게 불리하고 조금이라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면 과연 얼마나 그 길을 기꺼이 가려 할까요? 제자가 되기 위해 자기 소유를 버리라는 말처럼 오늘날 사람들의 귀에 속상하게 들리는 일이 또 있을까요?

 

5. 기독교적 사회정의의 실천: 라이크에서 러브로

최근 이어령 박사의 “생명이 자본이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 “양에게 이름을 붙이고 만 소년”이라는 일본책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식용으로 출하하는 양을 기르다가 양에게 정이 들어서 그만 이름을 붙여준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소년이 양에게 이름을 붙여준 순간 그 양은 더이상 식용 가축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소년의 친구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이어령 박사는 여기서 사랑(love)과 좋아하는 것(like)이 구분된다고 주장합니다.

양을 먹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지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고양이가 쥐를 좋아하는 것은 라이크이지 러브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잡아먹으면 맛있고 배가 부르니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이 생긴다는 겁니다. 우리는 개도 식용으로 먹는데 그건 개를 좋아하는 특이한 방식입니다. 그런데 사랑 “애(愛)”를 붙이면 순식간에 의미가 달라지게 됩니다. ‘애완용’ 펫 pet이 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것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는 겁니다. 먹지 않고(소유) 아껴주며 생명의 교감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사람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을 배경과 재산과 같이 소유를 보고 좋아한다면 그건 라이크의 감정이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가진 것 하나 없는데도 마음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남이 가진 것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내 것을 줄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한마디로 누구의 명령에 의해 강압적으로 시키지 않아도 자기의 소유를 내려놓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 소유를 내려놓는 자만이 제자가 되는 길을 갈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군대의 강압적인 규율과 원칙처럼 반드시 그렇게 해야한다는 식의 중압감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제자의 길은 가까운 혈육 조차도 미워해야할 만큼 지독한 신념에 사로잡혀 있어야만 가는 무미건조한 길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사랑이 없이 오직 신념으로만 사로잡혀 가는 길이라면, 행여 그것은 히틀러나 많은 독재자들이 고집했던 국가주의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자기의 소유를 내려놓으라고 하신 요청은 우리에게 라이크의 감정이 아니라 러브의 감정을 가지라는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자신을 위해 남의 것 조차 탐하며, 타인을 라이크의 대상과 도구로 삼는 모습에서 벗어날 것을 요청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제자가 되는 길, 그것은 결국 러브를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가장 최우선적인 것으로 삼으라는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오늘 우리 시대가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을 싸구려 라이크로 만드는 시대는 아닐까 라는 우려의 시선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사랑 조차도 외적 성장과 물질숭배라는 라이크를 위해 왜곡되고 있는 현실은 아닌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위해 타인을 욕망의 도구나 대상 정도로 여기는 우리의 모습은 결국 하나님의 정의가 무너진 왜곡된 흐름의 모습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적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길은 결국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길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유하기를 욕망하며 모든 것을 라이크의 대상으로 삼는 흐름의 역행이 아니라, 러브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바로 정의를 구현하는 제자의 삶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를 위한 세상의 투쟁도 하나의 방식이지만, 궁극적으로 부정한 흐름을 변화시키는 정의의 핵심은 결국 기독교적 신앙의 핵심인 사랑에서 찾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서로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고 정의를 실현하는 길에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중요한 근원적 실천의 출발지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