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목회: 섬기는 지도자상

1. 직업과 소명

 

독일의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는 1917년과 1919년 세계1차대전의 막바지에 접어든 시기 뭔헨대학의 진보학생단체인 ‘자유학생연합’을 대상으로 ‘직업으로서의 정신노동’에 대한 두번의 강연을 한 바 있다. 첫번째 주제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이었고, 두번째는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는 제목의 강연이었다.[1] 학문과 정치라는 두개의 주제를 통해 베버는 당시의 위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당면한 과제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진단과 처방을 내렸다. 이는 시대적 문제에 대한 타개책과 방향제시에 갈망하던 젊은이들에게 냉철한 학술지침서이자 예언자적 선언문과 같은 것이었다.

두 강연의 주제가 공통적으로 “직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도 이러한 시대적 갈망과 무관하지 않았다. 원문인 독일어로 ‘직업’은 ‘Beruf’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알려진대로 독일어의 ‘Beruf’는 외적인 생계활동으로서의 직업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소명의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말이다. 신에 의해 부여된 과업이라는 의미에서 직업은 노동과 일이라는 행위에 윤리적 의무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베버는 두번의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학문과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다는 말은 ‘그것들을 위해 산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들로 먹고 산다’는 뜻인가?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목회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집단이 형성되었다. 오늘날 성직자로 구분되는 직업분류에 속한 이들이다. 교회라는 작업장에서 종교행위와 관련된 특정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베버의 질문처럼 현대의 전문 목회자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져 보면 어떨까? ‘직업인으로서 성직자 혹은 목회자는 목회를 위해 사는 것인가 아니면 목회를 생활수단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인가?’ 이 글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을 제시하고자, 막스 베버의 소명윤리라는 개념을 통해 직업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지도자로서의 덕목을 살펴 보는데 목적이 있다.

 

2.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제도적 교회의 정착은 종교지도자들이 점차 목회를 생업으로 하는 직업 목회자의 유형으로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목회자가 소명의식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갖지 않는다면 이전에는 없던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그만큼 목회자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목회라는 직업적 행위에 대해 일종의 의무감을 지닐 필요가 생긴 것이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근간을 이러한 소명의식에서 찾은 바 있다. 곧 신의 부름에 응하고 그것에 복무하는 것을 종교적, 윤리적 의무로 생각하여 헌신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모습을 신교의 핵심 윤리로 보았다.[2] 마찬가지 논리로 <직업으로서의 정신노동 강연>에서는 한 사람의 지도자에게 무엇보다 요구되는 자질을 바로 이러한 신교 윤리에 부응하는 소명의식에서 찾고자 했다. 그렇다면 과연 소명의식이란 무엇을 지칭하는 말일까? 베버는 이를 두 가지 의식으로 개념화시켰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의식의 결과로 인해 행위의 윤리적 지향성은 타협하기 어려운 상반된 원칙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3]

그 하나는 내면적 신념에 기초한 소명의식이다. 소명은 밖으로부터 주어진다기 보다 신앙 혹은 신념을 통해 스스로 갖게된 내면적 믿음이라는 생각이다. 때문에 자신의 행위에 대해 외부로부터의 어떤 보상이나 제재를 고려하지 않고도 당연히 해야한다는 윤리적, 도덕적 의무감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로부터 베버는 신념윤리의 원칙을 도출해 내는데, “기독교도는 올바른 행동을 하고 그 결과는 신에게 맡긴다”라는 의식 속에서 책임 보다는 순수한 신념에 기초한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 그 특징이라는 것이다. 행여 순수한 신념에서 나온 행위가 의도하지 않은 나쁜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그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 혹은 신에게 돌리려는 태도가 이에 해당한다.

반면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신념을 외적으로 나타나는 결과에 대한 책무로 받아들이는 소명의식이다. 신념윤리가 행위의 결과보다는 선한 내면의 의식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에 반해서, 책임 윤리는 예측할 수 있는 행위의 결과에 대한 엄중한 책임에 더 집중한다. 때문에 행동의 결과가 초래할 현실의 상황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신앙을 개인의 내면적 영성에서 바라보는 것이 신념윤리의 소명의식이라면, 책임윤리의 원칙은 현실의 세속적 요구에 대한 적극적 대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베버 스스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신념윤리는 무책임하고 책임윤리는 무신념과 동일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소명의식의 지향이 다름으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차이를 개념적으로 구분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소명의식 가운데 이렇게 서로 다른 윤리적 원칙이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직업으로서 목회를 해야하는 전문목회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직업이라는 소명의 의미 속에는 “왜 목회를 하려하는가?”라는 신념의 문제와 “어떻게 목회의 목적을 성취하여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라는 책무의 서로 다른 질문을 동시에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로서 목회자에게 이 질문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이기도 하다. 그것도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 아니면 보완과 절충의 길을 선택하는가는 오직 목회자 자신에게 남겨진 몫이다. 문제는 신념과 책임이라는 상반된 윤리적 원칙이 대립할 때 발생한다. 지도자가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가에 따라 신앙공동체의 성격에 심연과 같은 깊은 차이가 생겨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선교정책과 관련된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몇년 전 한 선교단체는 특정 지역에 대한 국가의 해외여행 자제 요청에도 불구하고, 선교에 대한 하나의 원칙만 고수하여 선교여행을 강행한 일이 있었다. 당시 선교단체는 기독교가 자리 잡지 못한 지역에 선교하는 것은 당연한 교회의 소명이고, 따라서 다소간 위험의 요소가 있을지라도 우선되어야 할 기독교인의 사명이라는 신념을 천명한 바 있다. 과연 국가의 요청을 배제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선교를 감행함으로써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신념윤리를 따르는 사람에게 이 질문은 매우 불신앙적이거나 도전을 두려워하는 비겁한 주장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법준수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 선교 목적에 대한 수단의 정당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어떠한 윤리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생명을 위해 생명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끝없는 논쟁만 낳을 뿐이기 떄문이다. 선한 신념에서는 오로지 선한 것만 나올 수 있다는 믿음은 순진한 발상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도자가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공동체는 언제나 불안의 요소를 안고 갈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수단과 방법의 정당성에만 집중하게 되면 방향을 잃어버리고 표류하거나 정체될 가능성이 높은 것 또한 사실이다. 변함이 없는 원칙주의자들만이 득세하는 세상은 베버의 말대로 “쇠창살 없는 우리”와 다름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암울한 시대를 거슬러 가슴으로 자신의 순수한 열정을 제시하는 신념의 지도자가 없다면 그처럼 불행한 것이 또 있을까? 위험과 고난의 순간을 견디고 이겨낸 선교사들의 열정이 없었다면 오늘날 교회의 위기를 논하는 것 조차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소명의식의 두가지 서로 다른 윤리적 원칙들 간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정당화하기 어려운 딜레마가 있다. 때문에 목회를 소명으로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능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윤리적 역설의 자각이라는 점은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다. 한 발자욱 더 나아가 베버는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결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도자 만이 소명을 가진 리더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목회자에게 필요한 소명의식은 무엇이며, 지도자로서 이러한 모순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길은 무엇일까?

 

3. 지도자의 덕목

현대 개신교 교회의 의사결정 구조는 대개 교회가 정한 교리와 장정의 절차적 원칙에 근거한 민주적이고 합리적 성향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시스템이나 조직이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 소규모의 개교회에서는 여전히 전통이나 관습 혹은 선례를 중요시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정작 교회 내부의 실질적인 의사결정 과정에 있어 보다 중요한 부분은 바로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교회내 지도자인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는 베버의 구분에 의하면 카리스마적 리더쉽의 유형에 가깝다. 카리스마적 목회자가 자신의 신념을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교인들은 이에 대해 반응하는 형식이 그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배출하고, 권위를 얻은 지도자의 유능한 리더십이 얼마나 큰 성과를 만들어 낼 것인가에 주목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야 할 부분은 지도자의 권위가 아무 조건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목회자가 교회 안에서 성도들로부터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그 정당성을 인정받아야만 한다. 베버는 정당성을 위한 기초를 세가지 이념형으로 구분한 바 있는데, 첫째는 전통에 의한 정당성, 둘째는 법의 절차적 원리를 중심으로 한 합리적 정당성, 셋째는 지도자의 카리스마적 자질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정당성이 그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베버가 민주적 리더십을 카리스마적 권위의 한 유형으로 보았다는 사실이다.[4] 민주적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흔히 법과 절차적 정당성의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베버는 오히려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이를 추종하는 대중의 관계 속에서 보았던 것이다. 그 결과 지도자가 어떤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는가와 지도자의 리더십이 공동체에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관심 대상으로 남게 된다. 따라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내면적 정신과 윤리적 태도가 강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베버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세가지 요소를 열정(Passion), 책임감(Sense of Responsibility), 균형적 판단(Judgment)이라고 정의내린 바 있다.[5] 이는 종교지도자인 목회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가능하다고 믿는다. 열정은 소명의식을 가진 지도자가 목회를 하는데 필요한 심리적 원천이라 말할 수 있다. 영어로 열정을 뜻하는 Passion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얻은 예수의 고통’과 일반적으로는 ‘이성적인 것과는 구별되는 감정’의 두가지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결국 예수의 고통을 감정이입하여 스스로 공감하고자 하는 강력한 감정이 바로 열정이다. 때문에 열정은 개인적으로 나타나는 감정적 충동이라기 보다 오히려 종교적 신념이나 교리에 의해 규율되는 차가운 열정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같은 맥락에서 목회자의 열정은 단순히 목회적 신념이나 이상을 추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과 그 결과까지도 포괄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만큼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자질 가운데 책임감은 필수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다. 베버는 목표의 설정이나 목적의 가치는 언제나 수단과 방법을 통해 조정되고 재평가되며 재설정되어야만 한다고 보았다.[6] 지도자가 가져야 할 소명의식은 신념에 헌신하되, 그것이 미칠 결과와 그것을 통해 얻고자 하는 성과를 고려하여 타협과 재조정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분명한 목적의식과 정당성을 무기로 대다수 교인들과 재조정이나 타협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려 하거나 무시해 버린다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지도자의 몫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목표나 신념 그 자체도 언제나 결정된 것이 아니라 가변적일 수 있다는 전제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 때문에 지도자의 책임감은 단순히 결과에 대한 책임 만이 아니라 신념의 도출과정으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이 실현되는 전과정에 이른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흔히 민주적이거나 도덕적이라는 말은 신념의 선함이나 결과의 성취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과정 중에 얼마나 자유로운 조정과 타협이 가능했는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책임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가를 분명히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지도자의 균형적 판단이다. 이는 내적인 집중력과 평정심 속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능력이자, 베버에 따르면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이다.[7] 만일 지도자가 스스로 모든 것에서부터 객관적으로 거리두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다면, 공동체에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베버는 지도자의 허영심을 가장 큰 내면의 적으로 지적한 바 있는데, 허영심은 대의를 향한 헌신은 물론 지도자가 스스로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요인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하는 욕구처럼 공동체를 해치는 강력한 힘도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균형적 판단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의 가르침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마 16:24)’ 제자의 도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동안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라는 말이 유행했는데,[8] 사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요 10:10)”는 예수의 가르침은 지도자의 자질을 지탱해 주는 가장 중요한 바탕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소명의식을 가진 지도자의 자질과 덕목은 섬기는 지도자가 되기 위한 요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회를 소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현실은 순수한 신념의 실현과 책임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이상적 현장이 아니다. 개인의 삶과 결부된 생활의 문제로부터 공동체를 둘러싼 복잡한 관계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다. 그래서 현실과 타협하거나 아니면 현실로부터 도피하라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스스로 목회에 대한 소명을 갖고 있다고 믿었지만, 어느 순간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명의식은 잊어버리고 목회로 먹고 사는 직업인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바라보게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소명에 대한 진지한 질문으로 현실의 두터운 벽과 마주 선 목회자들도 있다. 그들 중에는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장벽에 한없이 작아져서 낙심한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베버의 말을 빌면, 목회는 열정과 책임감, 그리고 균형적 판단을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 뚫는 작업과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매우 더디고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그래서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지도자를 베버는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자신이 가진 것에 비해 현실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자신의 신념을 놓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외칠 수 있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다.[9] 바로 이런 사람만이 목회에 대한 ‘소명’을 가진 자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1] 막스 베버/전성우 역, “탈주술화 과정과 근대: 학문, 종교, 정치”, <막스베버 사상선집 1>, 나남출판, 2002.

[2] Max Weber,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and Other Writings, Penguin Books, 2002

[3] 막스 베버/최장집 역, <소명으로서의 정치>, 후마니타스, 2011

[4] 막스베버/최장집 역 (2011), 25

[5] 막스 베버(2002), 337

[6] 막스 베버/최장집 역(2011), 90

[7] 막스 베버(2002), 338

[8] Robert K. Greenleaf, Servant Leadership: A Journey into the Nature of Legitimate Power and Greatness, 2002, Paulist Press

[9] 막스 베버(2002), 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