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신앙과 종교윤리

현세적 물량주의와 문화적 문법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이야기할 때 늘 거론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현세적 물량주의이다.[i] 물량주의는 교회의 목회기준이나 실질적인 운영방향이 질적인 수준이 아니라 양적인 측면에 치중할 때 주로 언급되는 현상이다. 교회가 외형적이고 양적인 성장에만 몰두한다든지 배금주의적 경향이 심화되는 것이 그 전형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ii] 개인의 영적 성장을 위해 올바른 지침을 제시하거나 사회적 영성의 회복을 위한 현실 참여보다는 교인의 수, 헌금 액수, 그리고 건축과 같은 교회의 외형적 성장에만 집착하는 한국 교회의 부정적 이미지는 물량주의의 폐해에서 찾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정치와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교계에서 물질숭배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한국적 산업화를 잘 대변해주는 기치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가 하나님을 잘 믿으면 축복받아 잘살게 된다는 식의 신앙 기조로 교회에서 재해석됐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김광식은 이를 두고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한국교회에서는 ‘이금칭의’(以金稱義)로 둔갑하었다는 비판을 가한 바 있다.[iii] 종교의 영역이 경제의 논리에 오히려 예속되어 교회의 식민지화가 발생했다는 주장의 설득력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iv]

 

이처럼 한국 개신교회가 과도한 물질 중심의 현세적 가치에 경도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기복신앙과 결부시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한국 교회의 성향을 기복신앙이라고 단적으로 정의하는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통상적 개념 규정이 실질적인 상관관계를 증명하는 수준으로 인정받으려면 적어도 몇 가지 선결되어야 할 요건들이 있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흔히 사용하는 한국인의 기복신앙이라는 정서적 개념과 기독교적 신앙 행태로서의 기복이라는 개념을 일치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기복신앙이라는 현상이 한국 교회와 그 구성원들에게 유의미한 영향력을 가졌는지와 연관이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가 가진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를 삶의 전반적 문제에 대한 해석과 의미 부여에서 찾는다. 따라서 기복신앙이 신앙공동체인 한국 개신교회와 그 구성원들의 삶에 구체적인 가치를 제시하고 윤리적 행동 방식에 대한 의미를 재해석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앞의 선결 요건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문화적 문법”이란 개념을 분석 틀로 사용하고자 한다. 문화적 문법이란 용어는 “그 문화를 공유하는 구성원들 사이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거의 의식되지 않는 상태에 있으면서 구성원들의 행위에 일정한 방향을 부여하는 문화적 의미체계”를 말한다.[v] 정수복은 그의 저서를 통해 한국사회의 문화적 문법을 근본적 문법과 파생적 문법으로 나누고 그 문법들이 한국인들의 세계상을 어떻게 형성해가고 있는지를 진단하였다. 그가 말한 근본적 문법이란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어 쉽게 변화되지 않는 근본적인 현상들, 예로 들면 “현세적 물질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와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반면 파생적 문법은 “속도지상주의” “수단방법중심주의”처럼 한국사회가 급격한 변천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파생하여 나타난 현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복신앙’이라는 특수한 종교적 현상을 문화적 문법이라는 개념 틀을 사용하여 접근해 보고자 한다. 지면상 세밀한 분석은 어렵겠지만, 적어도 특수한 종교적 신앙 형태가 과연 한국 교회의 성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또 그것이 교회의 실질적인 역할에도 유의미한 연관성을 갖고 있었는지를 가늠해 보는 것에는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기복신앙의 행태가 한국 개신교회의 뚜렷한 신앙 문법으로 정의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복신앙이라는 개념정의가 한국 교회를 설명하는 도구로 적합한지, 한국적 상황에서 파생할 수 있는 특수한 의미에서 기복신앙을 재정의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에 이 글의 의의를 두고자 한다.

 

기복의 의미와 성서적 정의

소위 오순절파라고 불리는 교파의 신앙 행태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한국 교회의 현세적 복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자주 문제로 지적되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가 주장한 삼박자 구원론은 세속화된 사회의 현실적 욕구를 적극적으로 대변하여 종교소비자인 대중의 요구에 영합하는 기복신앙의 대표적 사례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문제에 대한 비판적 접근에 앞서 ‘기복(祈福)’이라는 용어에 더 세밀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말뜻 그대로 생각해보면 기복은 복을 비는 것인데, 이 자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복’에 대한 무조건적 비판을 지적하는 주장도 있다.[vi] 복을 비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복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 성서를 보더라도 현세적인 복이 무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복음서의 기록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마가복음 10:29~30).

 

마가복음의 이 구절은 복에 대한 정의를 이중적으로 구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부분이다. 현세적인 수준에서 받게 될 복과 내세의 영적 개념으로서의 복을 분명하게 나누고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 성서는 차별성을 두어 선후관계를 명확하게 규정지으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일례로 구약의 신명기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신명기 28:1~2).

 

먼저 복의 조건을 규정한 신명기의 가르침은 순종이라는 신앙의 규율이 선행되면, 모든 복은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약의 복음서는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위의 두 구절을 요약하면 성서에서 말하는 복의 핵심은 복을 받기 위한 신앙 태도에 중점이 있으며, 그것도 우선적인 복의 중심이 사랑의 실천이나 정의의 실현 혹은 생명의 구원과 같은 영적 재화(財貨)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논리적 전제로 기복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기독교적 신앙 행위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기복신앙을 매우 현세적인 개념으로만 규정하여 부정적 이미지를 재생산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말의 전통적인 용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차용한 용어이기도 한 ‘기복신앙’은 한국의 전통적 샤머니즘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주로 현세적 금전과 건강 그리고 장수의 복을 비는 내용이 샤머니즘의 민속신앙 형태에서 발견되는 전형적 모습이다. 이때 현실의 삶에 직접 결부된 세속적 보상이나 물질적 재화가 복의 구체적 내용으로 제시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달리 샤머니즘은 영적인 복의 개념은 물론이고 윤리적 차원의 규정도 포함하지 않고 있다는 특징을 보여준다.[vii]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성서의 가르침과는 다른 복에 대한 관점을 가진 샤머니즘의 신앙관을 기독교의 신앙행태로 정의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 질문이 그것이다. 이로 인해 영적인 복을 구하는 적극적 기독교의 구원 신앙까지 부정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이다. 무엇보다 역사적으로 사회 저변에서 종교가 혼합되어 온 사실을 고려하면 기복신앙이 샤머니즘의 영향이라고 단정할 수만도 없다. 한국 사회에 전통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유교와 불교조차 현세적 성향을 농후하게 지녀왔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이유에서 기복신앙이라는 개념을 통해 한국 교회의 성향을 통칭하거나 규정짓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더불어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한국적 기복신앙에 대한 개념 정의도 재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파생적 신앙관으로서의 기복

막스 베버의 정의에 따르면 종교는 삶의 실재적 내용을 보다 체계적으로 합리화시키는 고유의 과제를 수행한다. 문화적 문법이라는 개념을 적용해 생각해 보면, 결국 종교는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문화적 의미체계를 규정하는 결정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근대적 노동의 개념을 소명이라는 신성한 의무로 재해석함으로써 사람들의 행위와 사고의 방향에 결정적인 역할을 제공한 것 역시 종교의 영향력이었다. 인간의 궁극적인 삶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유의미한 것으로 해석하여 인간이 그에 합당한 행동을 취하게 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복신앙을 한국 교회의 지배적 신앙 행태로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해진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기독교의 ‘기복’ 개념은 일면 정당한 신앙의 형식이라 말할 수 있다. 내용 규정에 따라 성격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절대자로부터 복을 구하는 형식적 신앙 행태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문제의 접근을 기복신앙의 형식 자체에서 찾기보다는 한국 교회에서 통용되는 복의 내용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의 문법처럼 교회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게 된 요인과 과정이 무엇인지를 추적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한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고려하여 한국 개신교의 성향을 이해하려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초기 선교사들의 종교성향과 그들의 사고구조이다.[viii] 왜냐하면, 이들의 선교활동을 통해 한국 개신교의 모체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전해 준 기독교의 핵심 사상도 결국은 그들의 이해 속에서 재해석된 것이라 해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더불어 당시 서구적 유형의 사회발전을 기대하며 근대화를 추종하려던 한국의 지식인층, 소위 급진적 개화파가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ix] 이전의 전통적 유교 윤리와 이를 주도하던 지식인층의 세력이 퇴조하면서 개신교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지식인층의 출현은 한국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구한말 진보적 지식인들은 서구 문명처럼 사회 진보와 발전이라는 근대화 프로젝트가 개신교의 선교와 함께 한국사회에 급속하게 유입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선교사들은 사회의 세속적 진보 과정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선교는 서구 국가들의 부흥과 성장이 곧 기독교의 강력한 영향력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믿었던 지식인층의 소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초기 선교사들의 관심은 과학 기술을 필두로 하는 진보적 사회사상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적 태도와 훈련을 통한 인간의 도덕적 향상에 더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초기 선교사들의 대부분이 심령부흥운동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실제로 1893년부터 1901년까지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40여 명의 선교사는 북미 장로교 출신으로 그들의 신학교 배경은 대체로 근본주의적 신학이 지배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x]

 

비록 선교사들을 통해 활발한 의료활동과 근대교육의 기반이 마련되기는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교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이들에게 진정한 선교는 복음을 선포하여 많은 사람을 개종시켜서 교회 공동체를 부지런히 세워나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한국의 일반 민중들이 겪고 있었던 전쟁의 상흔과 그로 인한 정서적 폐허는 왜곡된 형태로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xi] 그들의 눈에 비친 사람들은 상처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무질서와 도덕적 합리성이 모자란 각성의 대상에 가까웠다. 이를 위해 선교의 화두는 죄로 물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영적 회개운동에 집중하는 것에 머물렀다. 문제의 근원을 당시 역사적 사회현실과는 단절한 채로 오직 개인의 영혼 구원을 위한 신앙훈련에만 관심을 둔 것이었다. 이는 개신교가 한국 사회에 일상적 삶의 방식을 종교적 의미에서 체계적으로 합리화시킬 기회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한마디로 한국인들의 생활에 주도적 역할을 할만큼의 근본적 문법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는 뜻이다.

 

오히려 개신교가 사회를 조명하는 문화적 문법의 역할을 한다기보다 역으로 사회적 영향에 따라 신앙의 성향이 규정된다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이다. 협소한 의미에서 교회의 신도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일종의 신앙적 문법으로만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교회는 사회적으로 볼 때 많은 한국인에게 근대적 공간으로서의 상징성을 부여받았을 뿐이었다. 이로 인해 산업화 시기를 거치며 교회는 성공과 성장이라는 이미지를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교회가 스스로 이미지를 창출하여 양적 팽창을 주도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도시화와 개발의 과정에서 ‘잘 먹고 잘사는’ 번영과 성공의 길이 바로 신앙 행태에 있다는 논리가 정착한 것이다. 신앙을 종교윤리로 재생산시킨 것이 아니라 세속적 보상 개념으로 특이하게 이해한 결과였다. 개인의 영적 상태가 사회적으로 발현될 수 있는 보상이 물질적 재화를 통한 복의 획득이지 결코 윤리적 공의의 실현과 같은 구원관으로 확립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두로 제시한 한국 개신교의 기복신앙은 교회의 자생적 신앙 문법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역사적 조건 속에서 파생된 신앙관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문화적 의미체계로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만한 종교윤리의 기능은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오히려 한국 사회의 특정한 역사적 조건들이 빚어낸 파생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기복신앙에 대한 성서적 의미와 정의가 명확하게 강조되어야 할 필요성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나아가 번영과 성공을 갈구하는 파생적 기복신앙이 하나의 문법처럼 교회와 신도들에게 삶의 문제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기준틀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럴 때 비로소 한국 교회와 기복신앙이 하나의 동질적 관계로 오해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i] 최재건, “한국교회의 역사의식 - 물량주의를 중심으로,” 청암논단 45회 (2004).

[ii] 이대윤, “한국교회의 물량주의에 관한 문제,” 뉴스파워, 2003년 9월 6일 자 기사.

[iii] 김광식, “종교개혁에서 본 부흥회,” 기독교사상, 1997년 10월호, 27.

[iv] 박영신, “한국기독교와 사회의식,” 기독교역사문화연구소 편, 한국의 기독교 (겹보기, 2001).

[v] 정수복,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생각의 나무, 2007).

[vi] 김진규, “기복신앙의 문제인가, 번영신학의 문제인가,”뉴스앤조이, 2016년 4월 13일 자 기사자료.

[vii] 김성례, “기복신앙의 윤리와 자본주의 문화,” 종교 연구 27 (2002): 61~86.

[viii] 차성환,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의 종교성향과 근대적 삶의 형성,” 한국 종교사상의 사회학적 이해 (문학과 지성사, 1995).

[ix] 이광린, “개화파의 개신교관,” 역사학보 66 (1965). 차성환의 윗글에서 재인용.

[x] Sydney E. Ahlstrom, A Religious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New Haven, 1972), 차성환의 글에서 재인용.

[xi] 김진호,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미국 복음주의를 모방한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 역사와 정치적 욕망 (평사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