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1) - 졸업생들을 향한 사자후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드리는 마지막 기도. 그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뒤에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이 보낸 군인들에게 체포당하시기 직전의 일이었습니다. 마지막 만찬과 체포 사이에 행하신 예수님의 기도. 그것은 이제 남겨질 제자들을 위한 간절함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초기 기독교 교회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연관이 있습니다. AD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완전히 함락을 당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도 이때의 일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을 지탱하고 있던 유대교의 세력들간에 변화가 생겨나게 됩니다. 성전을 통해 세력을 과시하던 사두개파와 무력투쟁에 앞장서던 열심당(젤롯당)은 몰락의 길을 가게됩니다. 금욕적 생활을 강조하던 엣세네 파는 완전히 현실과 떨어져 은둔생활에 들어 갑니다. 오직 바리새파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성전은 파괴되었어도 회당과 율법을 중심으로 세력을 오히려 확장시켜 나갑니다. 그와 함께 이들의 근본주의적 율법주의는 이에 반하는 모든 세력들을 축출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초기 기독교 교회 역시 근본주의적 율법주의로 대변되는 유대교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해야할 입장에 서게 됩니다. 사실 유대 근본주의 운동이 득세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기독교 교회는 유대교와 상당히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도 유대교의 전통 안에서 부활의 복음을 따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을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겼다는 것도 그와 맥을 같이 합니다. 하지만 바리새파의 근본주의 운동이 강화되면서 기독교 교회는 그들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결별해야 할 것인지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유대교와의 결별은 초대 교회에 엄청난 시련을 가져왔습니다. 새로운 종교에 대한 로마의 탄압과 유대인들의 극심한 배격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순교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떠나신 뒤 남겨진 제자들은 세상에 의해 버림을 받은 존재가 되버린 겁니다. 결코 세상에 속할 수 없는 이 땅의 이방인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예수님도 스스로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자신의 제자들 역시 세상에 속하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운명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요한복음 18장 36절에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속한 곳도 바로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비록 우리의 몸은 이 땅에 머물러 살아가지만 우리가 속한 곳은 하나님의 나라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이 땅의 신앙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세상에 몸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일까요?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을 잘못 오해하여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것처럼 살아가기도 합니다. 교회 이외의 일에 대해서는 아주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마치 세상이야기라도 입에 꺼내면 불경해진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미는 제자들이 세상과 스스로 격리되어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남겨진 제자들이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그 안에서 진리로 거룩해지기를 소망하셨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세상 속에서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원어에는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뜻의 “ἁγιάζω hagiazō” 를 사용하였습니다. 하기아조는 하기오스(ἅγιος)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인데, 그 뜻은 구별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세상 속에서 구별된 존재가 되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마5:14). 그 말은 어둠 속에서 환히 비치라는 뜻이지, 우리더러 어둠을 피해 환한 양지로 나와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으로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빛이신 그리스도를 닯아 빛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구별되는 것은 우리가 특별히 잘나서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진리 가운데 거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진리를 붙들고 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제자된 모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졸업을 하여 세상 가운데 나아갈 청년들에게도 이와 같은 권면을 드리고자 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세상에 나가되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거룩한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삶을 복되고 가치있게 만드는 길입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의미있는 삶을 사는 길입니다. 이 세대를 좇는 자들이 아니라 진리의 빛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그래서 모두가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지란지교는 말뜻 그대로 지초와 난초의 사귐이라는 의미입니다. 향기로운 지란처럼 맑고 깨끗한 우정을 일컫는 말입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교우(交友)〉편을 보면, "선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마치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與善人居 如入芝蘭之室)는 표현이 있습니다. 반면에 악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악취가 진동하나, 그마저도 오래 있으면 그 냄새를 맡지 못하니 친구를 잘 선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를 오래 전 여류시인인 유안진이 한 편의 시로 만들어 발표한 바 있습니다. “지란지교를 꿈꾸며”란 제목의 시인데, 그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저녘을 먹고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조금 나더래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있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 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보일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여러분은 이런 친구를 가져 본 일이 있습니까? 자신에게 한없이 편한 친구는 어쩌면 매우 일방향적인 관계처럼 비추어질지 모릅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하게 맞장구 쳐주고나서, 나중에 시간이 흘러 평온해 질 때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는 그런 선한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무조건 덮는 것이 아니라 지적도 해줄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것이죠. 이런 친구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렇게 허물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얼마나 만날 수 있을까요? 시인도 말합니다. 자신이 바라는 건 많은 사람과 사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오히려 한 두사람과 정말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지속되길 바랄 뿐이라는 겁니다. 매우 소박하면서도 현실적인 바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면 요즘 우리의 모습은 마치 스스로가 스타병에 걸린 사람처럼 타인을 대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특히 인터넷을 통해 불특정 다수와 소통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심리적 성향은 강화되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소소한 심리상태나 행동 하나하나도 인터넷에 올려 다른 사람이 공유해 주길 바라고, 자신도 수많은 인터넷상의 친구들을 만들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반응하는데 익숙합니다. 은연중에 많은 사람들이 스타처럼 만인의 연인이 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나눌 수 있다면 그만큼 이상적인 모습도 없습니다. 하지만 대개는 실제로는 현실화되기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만인을 사랑하는 것과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어떤 편이 가능한 일일까요? 오히려 속마음은 만인으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편이 더 솔직한 표현이 아닐까요? 사실은 사랑을 전적으로 자기 중심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만인의 연인이 되려는 사람보다 내게 솔직할 수 있는 진정한 연인을 갖고 싶은 것이 모두의 솔직한 마음 아닐까요? 연예인들이 자신의 팬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나를 사랑하는 연인이 말하는 사랑과 그 진정성은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 너무 흔하고 대상도 불분명해서 가슴에 와닿지도 않는 영혼없는 단어가 된 것은 아닌가 라는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목회자인 저 역시 스스로 이 질문을 되뇌이곤 합니다. “과연 나는 성도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맞는가? 내가 사랑하는 성도는 누구이며, 교회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정말 한 영혼을 향한 진지한 관심과 사랑으로 기도하고 있는가? 내가 사랑하는 것이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는가? 나의 자존심과 명예, 그리고 출세를 위하여 사랑이라는 말조차 값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재난과 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는 지진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나라들도 있었습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며 도움의 손길을 보내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이러한 재난과 전쟁의 피해를 생각하며 함께 애통하고 긍휼한 마음이 진정 느껴지시나요? 마치 내가 겪는 것처럼 아니면 내 가까운 사람의 고통으로 함께 아픔을 느끼고 계시나요? 여러분의 감정을 지금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정말 여러분이 믿고 있던 사랑의 적합한 정의가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답을 구하다 보면, 적어도 만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게 될 겁니다. 사랑이라는 말의 무게가 그만큼 무겁게 느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여기서부터 사랑이 출발된다는 점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무겁게 느낄 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사랑의 연인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건네기 위해 수백번 되삼켜야 했던 사랑의 무게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게 상처를 준 원수와 같은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의 그 무게를 생각해 보십시오. 낯선 이방인과 멀리 떨어져 일면도 없는 익명의 사람에게 그들을 생각하며 사랑이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의 무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무거움이 실로 느껴질 때 사실은 사랑이 막 시작되는 것임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사랑은 실로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무게를 짊어진 사랑 아닙니까? 자신의 목숨을 건 사랑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신실한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너희도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친구가 되어 달라는 일종의 초대의 말씀입니다. 종처럼 억지로 누구를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사랑이라 말할 수도 없는 법입니다.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를 향해 보여주신 신실한 사랑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 진실된 사랑을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쳐나는 지란지교와 같은 친구가 되어주라는 권면입니다. 허물없이 서로 나눌 수 있는, 그래서 억지로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영혼없는 관계가 아니라 매우 소박하면서도 현실가능한 친구가 되어주라는 가르침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란 결국 자기자신이 아니라 친구에게 무게 중심을 옮겨놓는 행위입니다. 내가 되받기 위하여 혹은 내가 만족하기 위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위해 자기중심을 포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큰 사랑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그 때 비로소 지란지교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묵비사염

<천자문>에 ‘묵비사염(墨悲絲染)’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의 원래 뜻은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했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군복무를 하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군 영창에 들어가 있는 아들을 속히 귀가 시켜 준 것에 대한 답례라며, 한 단기사병 어머니가 소속 부대원 몇명을 점심 초대한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기는 했지만, 내심 간만에 근사한 식사 한끼 해야겠다는 생각을 모두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약속한 날이 되어서 한 식당으로 향한 우리 일행은 생각했던 것 보다 작고 허름한 식당 모습에 조금 실망했습니다. 게다가 식당의 음식 역시 매우 평범한 것이어서 오히려 의아해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자 그 단기사병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듣기로 가족과 멀리 떨어져 근무하는 군인들에게 어머니가 해 주시는 밥상처럼 제일 근사한 것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영창이라고는 하나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아들이 가장 그리웠던 것이 바로 집에서 내가 해주는 밥상이라고 합디다. 그래서 우리 아들 보다 오랫동안 나라 지키느라 고생하고 계시는 여러분들께 이렇게라도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 순간 우리 모두는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치 늘 자신은 세상에 물들지 않은 의로운 사람처럼 믿고 살아가지만 삶의 중심에 말씀이 뿌리내리지 않으면 금새 흔들리고 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진 세상이 시대의 아픔에 탄식할 줄 모르고 불의와 부정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묵비사염처럼 주님이 죄악에 물든 시대를 탄식하며 절규했던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바라보시면서 똑같은 탄식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세대의 풍조를 좇아 물들어가기 보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람이 분다

프랑스의 시인인 폴 발레리의 작품 중에 ‘해변의 묘지’라는 시가 있는 데, 마지막 부분에 매우 인상깊은 표현이 하나 나옵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라는 구절입니다. 부는 바람에 삶의 의지가 생기는 경험을 아마도 시인은 그렇게 표현했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것 같은 순간에 어디선가 바람이 불면 잠시 멈추어 있던 사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마치 다시 생명을 얻은 것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가져다 주는 것이죠. 머리가 희끗해질만큼 세월이 훌쩍지나버렸는데도 지나간 옛기억에 마치 사춘기 소녀가 된 마냥 마음이 설레일 때가 있습니다. 잔잔한 호숫가에 돌을 던지 듯 마음에 파장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젊음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나이가 먹고 나서야 깨닫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인생에 바람처럼 찾아온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럴수록 더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누구에게나 다시 찾아온다는 겁니다. 물론 모두가 그 기회를 잡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지요. 

어느 등산가가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 산을 수도 없이 오르내렸는데, 정작 자신은 산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오르려고만 했지 산에 무엇이 있었는지, 수없이 지나치던 사람들의 얼굴은 고사하고 말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한 산행이었다는 것이죠. 한평생 가족을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일만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밤샘을 밥먹듯이 해가며 열심히 돈을 모아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됩니다. 그새 지칠대로 지쳐버린 육신은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가족을 위해 모든 걸 감내했건만 돌아온건 무관심과 이제는 무용지물처럼 바라보는 냉소 뿐입니다. 사람은 얻고자 한 것을 얻지 못할 때 심한 좌절감을 갖게 됩니다. 믿었던 것이 더 이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극심한 박탈감이 몰려 옵니다. 한 때는 나를 움직이던 바람 같은 그 무언가가 저 멀리 사라지고 날 때 오는 고통입니다. 더 이상 살고 싶은 의지가 생겨나지 않는 공허한 순간입니다. 

이처럼 허무한 시절을 지나가는 인생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바람으로 다시 새롭게 거듭나라고 말이죠. 사실 지금껏 오르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믿었던 이에게, 돈이라도 많이 벌어오면 가족이 행복해 질 것이라 믿었던 사람에게, 인생의 행복은 무언가 값어치 나가는 것을 더 많이 소유하는 성공적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했던 이에게, 더 이상 허무한 인생이 아니라 충만한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영, 곧 성령이 함께 하시는 인생이 우리를 진정 살게 하는 힘이라고 말이죠. 그 성령의 바람이 우리 안에 불어올 때, 우리도 살아있는 생기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미생

바둑 용어 중에 미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자어로는 아직 완전히 살지 못한 상태라는 뜻인데, 바둑에서 집이나 대마가 완전히 살아있지 않은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반대로 완전히 자기 돌이 죽었을 때는 사석(死石)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죽은 돌과 달리 반전을 통해 집을 얻게 되면 그 때 완생(完生)했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미생은 아직 완전하지 않은 미완의 상태를 뜻하는 것이죠. 경우에 따라 죽을 수도 있고, 반대로 완전히 살 수도 있는 미결정의 상태라는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다 미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직 살아가야 할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사석과 완생의 구분만 있을 뿐이죠.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그날은 시간의 끝, 흔히 종말을 뜻합니다. 남아 있는 시간이 더이상 없는 때입니다. 그날 미생으로 살아온 우리의 운명은 죽음(사석)이냐 아니면 영원한 생명(완생)인가가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미생으로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완생의 그날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가의 질문입니다.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 예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당대로 보면 요한은 뭇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유명인사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말씀은 세례요한을 결코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에 불과한 존재라고 명확히 금을 긋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낸 목적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믿게 하기 위해 증거하는 도구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세상의 빛이 아니라 단지 그 빛을 증언하기 위해 선택 받은 자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요한의 역할은 주연이 아니라 주인공을 돕는 조연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완벽하게 보였는지는 몰라도 요한 역시 우리처럼 미생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던 셈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선택입니다. 그는 결코 사석의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고 있던 대중적 인기에 혹하여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스스로를 빛으로 생각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결국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그를 따르는 무리 역시 참빛을 보지 못하는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을 겁니다. 모두가 사망의 골짜기를 넘나드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비극이 일어났을테니까요. 자기 의에 사로잡혀 진리를 벗어나 잘못된 방향으로 백성을 인도한 지도자들이 역사 속에서 어떤 종말을 맞이하였는가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믿는 교만이 가져올 결과는 언제나 비극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이 도구로 선택 받은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오실 그리스도의 신발끈을 바라 보지도 못한다고 말할 만큼 스스로를 철저히 낮추고 비워서 빛이신 주님만을 높여 찬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참 빛을 증거하는 자의 모습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러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를 빛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5장 14절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를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고 지칭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도 한 사람이 혹은 주님의 교회가 그 자체로 세상의 빛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저 빛을 담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죠. 양초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양초가 빛을 내는 것 같지만 실상 양초 스스로는 불의 도움없이 결코 빛을 낼 수 없습니다. 똑같은 이치이죠. 우리 안에 참 빛인 주님의 말씀을 담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우리 스스로는 세상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생인 요한이 완생이 되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빛의 증언자가 되는 것이지요. 증언은 단순히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입으로 전하는 것만이 증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나’라는 도구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 증언자의 삶입니다. 양초가 빛을 내기 위해 자기를 녹여 없애 버리듯 그리스도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 자신은 완전히 비우고 낮추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 때 세상은 나는 죽고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빛의 증언자요 하나님의 도구로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완생을 준비하는 자의 진정한 삶인 것이지요. 그래서 축복된 삶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