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성지순례 다섯째날
여리고에서 가장 기대되는 쿰란과 엔게디를 방문합니다. 그리고 맛사다를 오른 후에 사해 남쪽 끝 호텔에서 묵었습니다.
유대광야 짚차 투어를 한후 마르샤바 수도원 앞에서
쿰란광야는 유대인들에게는 신앙적인 가치가 있는 공간이지만, 기독교에게도 구약성경의 거의 원본이 발견된 귀한 자리입니다. 세례요한이 이 쿰란 공동체 즉 에세네파에서 활동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하는 공동체였고, 나중에 세례요한이 이 공동체를 떠나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에 쿰란에 방문하면 이 영화를 보여줍니다.
Ep6. 쿰란, 엔게디,맛사다, 사해 지역순례
쿰란 Qumran
쿰란 순례에 앞서 영화를 관람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세례요한이 바로 이 에세네파에서 활동하지 않았을까? 하는 내용입니다.
쿰란, 사해문서가 발견된 곳입니다. 사해문서의 중요성은 우리들이 읽은 성경이 역사성을 인정하 게하는 실시간 문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시기와 성경 사건의 시간차이가 거의 일치하는 )
사해의 북서쪽에 있는 쿰란은 사해 사본(the Dead Sea Scrolls)을 기록한 에세네파 사람들의 주거지역으로 유력시 되는 곳이다. 이 지역의 발견은 1951-1956년에 이루어졌는데, 폐허 속의 주건물은 폭 27m 길이 44m정도로, 석고 가 거칠게 발라져 있는 거대한 규모의 돌로 만들어진 것이다. 북쪽에는 수비 탑이 있으며 부엌과 붙어있는 식당에서는 1,000여점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주건물 주변에는 옹기장이집, 방앗간, 염색집, 7개의 저수탱크 등이 발견되었으며, 의자, 책상, 말라버린 잉크가 담겨진 잉크스탠드가 있는 기록실이 발견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쿰란 주변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800여개의 사해 사본들 가운데 두루마리 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불과 10개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는 수없이 많은 조각들로 발굴되었다. 이들 중 약 1/4이 구약사본이며, 나머지는 구약 주석, 신 학서, 쿰란 공동체의 규율집으로서, 대부분 양피가죽이나 파피루스 위에 고대 히브리어로 적어놓은 것들이다. 약 2000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해구약 사본은 현존하는 구약 사본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에스더서 만을 제외하고 는 구약의 모든 책들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 쿰란 공동체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추정하는 에세네파는 AD68년 로마군 에 의해 초토화 된 후 그 명맥이 끊겼다.
엔게디 Engedi
쿰란에서 20km 정도 남쪽, 사해 서안 중앙부에 있는 샘으로 원 뜻은 [염소들의 샘] 옛 명칭은 하손다말이며, 현재 이름은 아인게데(창 14:7, 수 15:62, 대하 20:2).
주위에 종려나무와 포도원의 고벨화가 유명하다(아 1:14). 모압인과 암몬인이 이곳에 와서 여호사밧을 치려다가 세일산인을 친 후 피차 살육하여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대 하 20:1-2, 23, 24). 이곳에서 예루살렘에 가려면 시스 고개를 넘는다(대하 20:16). 에스겔 선지자는 이곳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치는 곳이 되겠다 하였다(겔 47:10).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굴 속에 숨었을 때, 그 굴 속에 들어온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만났으나 그의 겉옷자 락만 베고 굴에서 나와 사울에게 자신의 무고함을 고했던 장소(삼상 23:29).
엔게디 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다녔을 곳. 광야로 보이는데 물이 흐르는 , 많은 동식물들이 서식하는, 사반이라는 쥐과로 신명기에 먹지말아야 동물로, 잠언에서는 작지만 지혜로운 동물로 등장합니다. 싯딤나무의 가시가 실감납니다.
마사다 Massada
맛사다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으로 사해의 서쪽 해변에 위치하고 있다. 주위의 유대 광야의 산들과는 고립된 높 이 400여m의 이 천혜의 절벽 요새는 정상이 길이 600M, 가장 넓은 곳이 폭이 250M인 평지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서기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가 기록한 "유대 전쟁사"를 통하여 맛사다가 헤롯왕의 요새인 동 시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항거했던 "유대 전쟁(Jewish War)" 최후의 비극의 격전지였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서기 66 년부터 시작된 이 반란이 로마의 월등한 군사력으로 서기 70년 예루살렘의 함락과 더불어 성전의 파괴로 끝을 맺게 되자 이에 굴복하지 않은 960명의 "열심당원"이라 불리는 극우파 민족주의자들은 이미 66년에 당시 소수의 로마 군 인들이 지키고 있던 맛사다를 점령하며 저장된 물과 식량, 무기를 이용, 로마에 대항하였다. 예루살렘을 이미 점령하 여 유대인 반란의 진압을 이미 달성한 로마의 총사령관 티투스(Titus)는 장차 아라비아 광야 지역으로의 진출을 예상 한 광야 전투의 훈련을 목적으로 실바(Silva) 장군으로 하여금 10군단을 이끌고 이곳에 대한 대규모의 포위 작전을 실 시하게 하였다. 로마군은 2년에 걸친 무수한 정상 공격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요새 꼭대기의 견고한 성벽을 파괴 시키기 위한 공성퇴(Battening Ram)를 끌고 올라갈 수 있는 거대한 경사로를 6개월에 걸쳐서 축조하였다. 이 경사 로를 축성하는데는 포로로 잡힌 유대인들을 동원하였는데 성곽 안에서 저항하던 유대인들은 차마 동족에게 공격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의 격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공성퇴가 성벽을 무너뜨리게 됨으로 항쟁의 막이 내리게 되었다(AD73년). 지금 이 지역가면 당시 로마군의 진영이 있었던 자리를 표시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으며, 얼마전까지 만 해도 이스라엘 육군사관학교의 생도들은 임관직전 이곳을 찾아 밤에 횃불을 들고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하며, 조국의 아픈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Masada never again!"
맛사다입니다. 유대역사에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있던 곳이죠.
사해 리조트 _보너스 사진
일정을 마치고 사해 리조트에서 1박을 했습니다. 잠깐의 쉼이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