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lation 1:4-8
"Grace and Peace in the End Times"
Gratitude for Last Week
Thank you for your hard work and participation in last week’s Dedication Worship Service. As you saw in the video, it was truly a worship filled with thanksgiving. I believe God also received our worship with joy. Once again, I want to express my gratitude to everyone who contributed with their dedication and help.
I heard that more people came than expected, and some of our members weren’t able to eat properly during the fellowship meal. I felt very sorry about this. I mentioned in a message that I would take everyone out for a meal, though I’m sure you thought, “Can that really happen?” Honestly, I thought the same! So today, as we celebrate Thanksgiving Sunday, my family has prepared rice cakes as a token of our gratitude and apology. Please accept it as though I were treating you to a meal.
Today’s Message
Last week, we discussed “Eschatology,” and since today’s text is from Revelation, you might think I’m continuing on a similar theme. However, I’d like to clarify that the preconceived notions surrounding Revelation and the title of today’s sermon are not the limits of what I want to share. While the text and title may seem restrictive, the story I wish to share today is broader and deeper. And since it is Thanksgiving Sunday, we will also reflect on gratitude.
Trauma: The Fall of 587 BCE and the Destruction of the Temple
Have you ever experienced trauma? Maybe something small or something severe? In Israel’s history, there are two significant traumatic events. The first is the fall of Judah in 587 BCE, and the second is the destruction of the Jerusalem Temple. We could even include the Holocaust in modern times as a third traumatic event. The ongoing conflict between Israel and Palestine is tied to these historical traumas.
The fall of Judah in 587 BCE represented the complete destruction of the covenantal promise between God and His people regarding the land. The destruction of the Jerusalem Temple in 70 CE happened when Roman forces brutally suppressed a Jewish rebellion, burning the Temple. The gold decorations melted into the cracks between the stones, and Roman soldiers dismantled the Temple to retrieve the gold, leaving not a single stone unturned.
The Bible doesn’t hide the varied responses to these traumas but records them vividly.
Responses to Trauma
Here are six different responses recorded in Scripture, which also reflect our reactions to trauma today:
Turning to Other Gods
Some abandoned their faith in God and chose to worship the Babylonian gods—Marduk, Nabu, and Ishtar—believing they were stronger since Babylon had won.
Weeping and Lamentation
Others wept in despair. The Psalms and Lamentations record their grief, anger, and sorrow in raw detail.
Theological Reflection
For some, the Babylonian exile became an opportunity to reflect deeply on God’s covenant. Without the land or the Temple, they reinterpreted God’s presence. Prophets like Jeremiah and Ezekiel began to proclaim that God was not confined to Israel but was present even in foreign lands.
Hope and Expectation
Prophets like Isaiah (Second Isaiah) offered visions of a restored Jerusalem and a renewed covenant, emphasizing that suffering was not the end but a part of God’s greater plan.
Adaptation and Identity Preservation
Some adapted to life in Babylon, forming communities and maintaining their Jewish identity through practices like synagogue gatherings, dietary laws, and the study of the Torah.
Rejection and Cultural Isolation
Others rejected assimilation and maintained their cultural and religious purity, as seen in the stories of Daniel and his friends.
These varied responses, recorded in the Bible, mirror how we navigate challenges in our own lives.
Personal Reflection on Trauma
On a personal level, these responses could look like this:
“I’m done with church!”—the first response.
Crying and lamenting daily—the second response.
Recognizing that God hears others’ prayers, not just mine—the third response.
Believing that trials are a way for God to refine and strengthen me—the fourth response.
Trusting that repentance and obedience will lead to restoration—the fifth response.
Holding on and enduring without compromise—the sixth response.
No one response is inherently right or wrong, but the question remains: which response best serves the community of faith?
Revelation: Another Trauma
The Book of Revelation also arises from trauma. Churches faced unprecedented persecution. In this context, John writes to the seven churches of Asia Minor, addressing their specific circumstances. Revelation was not written as a universal message for all Christians but as a targeted response to the struggles of these seven churches.
John’s Vision of Jesus
In verses 4 and 8, John describes Jesus as “the One who is, who was, and who is to come.” While this may seem like a simple declaration of God’s eternal nature, the original text conveys a more active and aggressive tone. The phrase “is to come” signifies that Jesus will invade, attack, and reign over the kingdoms of this world. John assures the persecuted churches that Christ will come and conquer.
Grace and Peace
In verse 5, John prays for grace and peace from Jesus Christ, describing Him as the “faithful witness,” the “firstborn from the dead,” and the “ruler of the kings of the earth.” Here, “grace” is translated from the Greek word eleao, meaning mercy or compassionate comfort, while “peace” (eirene) carries the sense of prosperity and flourishing beyond mere calmness. In the midst of unprecedented persecution, John offers a vision of Jesus who brings both mercy and the hope of abundant life.
Thanksgiving: A Natural Response
Today is Thanksgiving Sunday—a time when we often feel pressured to express gratitude. But true gratitude cannot be forced; it emerges naturally through reflection on God’s faithfulness over time. The first Thanksgiving was not simply a celebration of abundance but a profound acknowledgment of God’s provision after a season of great trial and hardship.
Revelation’s Question: Who Truly Holds Power?
Revelation challenges us to ask, “Who truly holds power?” In a world where political and military powers seem dominant, John reminds us that Jesus Christ is the ultimate authority. This is a question we must continually wrestle with as we navigate the challenges of our own time.
The End Times: A Time of Grace and Peace
As we look to the future, let us hold onto the promise that Jesus Christ brings grace and peace—even in the face of suffering. This is the hope of the end times: not despair, but the fulfillment of God’s kingdom, where grace and peace abound. May we live with this confidence and gratitude, trusting in the One who is, who was, and who is to come.
요한계시록 1:4-8
“마지막 때: 은혜와 평화”
수고와 감사
지난주 입당감사예배 때 수고하셨습니다. 영상에서 보신 것처럼, 감사를 가득 담았던 예배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도 기쁘게 예배를 받으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시한번 이런 저런 헌신과 도움으로 함께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저희 교인들이 식사를 잘 못하셨다는 이야기에 너무 죄송했습니다.
문자로 고마움과 죄송함을 드리면서 제가 밥을 사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아마 그게 가능할까?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면서 점심을 나눌텐데, 저희 가정이 “떡”을 준비했습니다. 고마움과 감사 그리고 죄송함의 표시로 드리는 것이니 제가 밥을 사서 드리는 것이라 생각하시고 드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의 이야기
지난주에 “종말론”에 대해서 이야기를 드렸고, 마치 오늘 본문이 “요한계시록”이기때문에 비슷한 주제로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요한계시록이라는 선입관이 그리고 오늘 설교제목이 제가 지금 드리는 이야기를 한정 짓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본문과 제목은 제한적인 의미를 두는 것 같지만, 오늘 나누고자 하는 것은 더 깊고 넓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거기에 추수감사절이기도 하니, 감사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누겠습니다.
트라우마: 587년과 성전파괴
살면서 트라우마를 겪은적이 있으시거나, 있으 신분이 계신가요? 아마 작은 것부터 심각한 트라우마가 있으실거에요.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두가지 큰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기원전 587년이고, 두번째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입니다. 여기에 한가지를 더하면 “홀로코스트”까지 포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의 이유는 이런 트라우마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587년은 잘 아시는 것처럼 유다가 멸망함으로 하나님과 맺은 약속의 땅의 계약이 완전히 파괴된 사건이었고, 예루살렘 성전파괴는 주후 70년에 로마의 황제의 표식을 성전에 놓는 것에 대항한 유대인들의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하면서, 성전을 불태워서 금칠로 장식한 것들이 녹아서 무너진 돌에 녹아 들었고, 그 돌이 금인 줄 알고 돌 하나 남지 않고 로마병사들이 가져갔던 성전파괴 사건이었습니다.
이 두가지 역사적 사건에 대한 반응들이 있었을 텐데, 우리가 읽는 성경은 바로 이 여러가지 반응들을 숨기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트라우마에 대한 반응
첫번째 반응은 나라가 멸망하자, 하나님이 아니라, 바벨론의 신이었던, 마르둑, 나부, 이슈타르를 믿겠다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하나님이 전쟁에서 패했으니 강한 신을 믿겠다고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으로 갈아탄 것입니다.
두번째 반응은 우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익숙한 반응일수 있는데, 이 우는 반응에 대해서 시편과 애가서는 분노와 탄식, 슬픔등에 대해서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반응은 신학적 성찰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바빌론 유수는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땅도 성전도 없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임재를 재해석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땅 외에 하나님을 상상한적이 없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밖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와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은, 예루살렘 밖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상하기 시작했으며, 하나님은 이방 땅에서도 그의 백성과 함께하신다고 예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해석을 통해 포로로 끌려갔던 이들은 새로운 언약을 자신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것으로 고백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약속은 이동성이 있고 개인적인 신앙을 지지할 수 있는것에 관대해졌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사도 바울을 통한 이방인 전도를 통해 전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는 신학으로 이어집니다.
네번째 반응은 회복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갖습니다. 이사야(제2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들은 미래에 고국으로의 귀환, 회복된 예루살렘, 심지어 새 언약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포로기가 이들의 삶에서 마지막 끝이 아니라 변화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으로 이어지는 일시적 경험임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고통은 연단의 과정이며 이 과정 이후에 더 위대한 미래가 있을 것을 상상합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고통을 연단이라고 이해합니다.
다섯 번째 반응은 적응과 정체성 고수입니다. 일부 유대인들은 바빌론 생활에 적응하여 공동체를 형성하고 예루살렘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도 정체성을 유지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포로기때 이들은 회당 모임, 토라에 대한 강조, 식생활법 준수 등 새로운 종교적 관습이 만들어냈으며 예루살렘이 아닌 이방 땅에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러한 적응은 디아스포라 환경에서 유대교가 회복력과 적응력을 발휘할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들은 바벨론 포로기는 자신들의 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데 대한 심판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는 예수님 시대에 보았던 바리새인들의 유대교로 발전합니다.
마지막 반응은 거부와 문화적 고립입니다. 일부 유대인들은 바빌론 문화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고립시켰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다니엘서에서 볼 수 있는데,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바빌론의 음식을 먹거나 바빌론의 관습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압박 속에서도 종교적 신념에 따라 살기를 선택했습니다.
이들은 포로기를 마치고 귀환할 때 이방인과의 결혼을 한 경우, 이 결혼을 해체하면서까지 문화적 고립을 고수합니다.
이 여섯가지 반응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아마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재의 삶에서도 비슷하네 나타나는 반응일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것을 좀더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 트라우마에 대한 반응을 표현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미워!” 하면서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는 것이 첫 번째 반응입니다. 그냥 매일 우는 것이 두 번째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내 기도만 듣지 않고 다른 사람의 기도도 듣는구나” 하는 것이 세 번째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더 강하게 연단 시키려고 시험을 주시지만 이길 힘도 주시는구나” 하는 것이 네 번째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내 죄를 심판하셨지만, 내가 회개하고 순종하면 회복시켜 주실 거라고 믿는 것이 다섯 번째 반응입니다. 나는 지은 죄가 없어. 인내를 가지고 버티면 결국 이길 거야 하는 것이 여섯 번째 반응입니다.”
내 반응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드리냐 하면, 성경은 바로 이런 우리들과 비슷한 반응들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공동체를 통해 또한 선생들을 통해 기록에 남고 가르침에 남고, 오늘 날까지 전해졌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확인하는 또 하나의 중요성은 여러가지 반응 중에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반응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하고, 여기서 만약 여섯 번째와 같은 반응으로 고립만을 주장하거나, 첫번째 반응처럼, 쉽게 신앙을 버리는 것들이 과연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엄격하게 예언자들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늘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는 것”을 “성경을 다 이해한 것처럼”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의 주제로 엮어져서 읽혀질 수 없습니다. 다양한 반응과 부족한 것 그리고 무너지고 회복되는 것들을 하나 하나 세심하게 기록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한가지 방향으로만 성경을 읽고,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성경을 잘 못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또 다른 트라우마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큰 트라우마가 교회 공동체안에 자리했습니다. 전례 없던 박해가 교회에 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럴 때 요한이 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요한은 제한적으로 아시아 일곱교회에 쓰는 편지로 요한계시록을 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목적은 “소아시아 일곱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쓴 것이지, 이것을 보편적인 모든 기독교인이나 교회에 적용되어야 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박해로 인해 밧모섬에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교회도 점점 박해로 인해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슷한 반응: 요한계시록 이해
앞에서 나눈 것처럼 비슷한 반응이 소아시아 일곱교회에서 벌어졌을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 기독교신앙을 버리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불안함에 어쩔 줄을 몰라서 탄식과 울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 박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이런저런 기대와 신학적인 작업을 위해 노력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고, 광야로 떠나 속세와는 거리를 담을 쌓고 고립된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요한이 이 박해 받았던 일곱교회에 편지를 쓴 글이 요한 계시록입니다.
요한이 전하는 예수
4절과 8절에 보면,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분”이 두 번 등장합니다. 읽혀지는 바로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나타내는 “존재론적 진술”로 느껴지지만, 사실 이 문장은 꽤 공격적이 동사를 사용되어졌습니다. 즉, 그냥 계신 것이, 또는 그냥 계시는 것이, 그냥 오시는 아니라, “오실 것”이라는 동사는 “하나님이 스스로,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 나라에 침입하여, 또는 공격하여, 이 나라를 다스리시기 위해 “오실 것”이라고 의미입니다. 요한은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분명하게 “그리스도께서는” 그 고난을 넘어 반드시 오시는 분으로 선언하며 본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은헤와 평화
5절에 보면,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라는 기원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글성경은 “예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빈다는” 기원이 5절에 등장하지만 원어성경은 4절과 5절이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보통 은혜는 “카리스”라는 헬라어를 번역했는데, 여기서 번역된 은혜는 “엘라오”라는 헬라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엘라오는 “자비를 베풀다” 또는 “동정심을 주다”는 의미로, 은혜로 번역했지만, “간절한 자비” 불쌍함으로 주시는 “위로”로 예수께서 주시는 “은혜”라고 번역을 한것입니다.
평화는 “에이레네”라는 단어로 늘 평화라고 번역되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문자 그대로 “평화”로 번역되지만, 지금의 현실을 넘어선 번영을 기대하는 마음을 담은 “번영의 기대”라는 표현으로 평화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전례 없는 박해가운데 이것을 넘어서 자비와 번영의 기대가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화라는 것입니다. 지금 경험적으로 전례 없던 박해속에 어떤 트라우마와 비슷한 상황에 초대교회 공동체가 어려움을 마주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은 이 상황을 네번째와 다섯번째 반응으로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응답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의 응답: 예수의 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전례 없는 어려움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도 이 박해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분인데, 앞으로 오실 분은 기다리면 그냥 오는 분이 아니라 “공격적으로 이 박해의 시간을 침략하여” 우리와 함께하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의 고백은 좀더 직설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전까지, 제자들이나 바울이 중점을 두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 즉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이를 통해 교회를 세워가는 것을 무게를 두었다면, 요한은 여기서 “그리스도 되시는 예수님”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고난속에서 예수는 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오실 구원자로 요한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감사를 어떻게 고백할 수 있을까?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에게 감사를 강요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할 것이 많겠죠. 하지만, 동시에 어려움도 늘 그 삶에 함께합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가장 조심하는 것 중에 하나가 “감사를 강요하지 않는 것”을 위해 노력합니다. 지나고 보면 감사하죠. 정말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큽니다. 하지만, 그런 감사가 자연스러운 시간과 마주하고, 그 시간을 지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지, 그냥 감사하다고 해서 감사가 고백 되어지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감사합니다.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늘 엄마 아빠에게 고마워해야 해”하면 아이들이 정말로 고마워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를 봐도, 지나온 시간이 어느날 어떤 사건과 마주할 때 깨닫게 됩니다. 우리들이 맞이하는 추수감사절 또한, 깊이 생각해보면, 험난한 시간, 또는 박해의 시간을 피해, 먼 신대륙까지 왔습니다. 거기서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는데, 잘되어서 소출을 얻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첫 소출을 얻지 못했다면 굶어 죽을 수 있었을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농사가 잘되었습니다. 그냥 감사한 것이 아니라, 긴 고난의 시간을 통과하고 지금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추수감사절입니다.
요한계시록: 환상이 아닌 현실적으로 던지는 질문
전례 없는 고난을 경험하면서 교회들이 어려워졌습니다. 세상의 힘있는자들이 활개를 치면서 자신들이 힘있다는 것을 무력으로 폭력으로 초대교회를 흔들어놓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들의 힘은 어마어마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요한이 쓴 요한계시록은 “과연, 누가 진정한 힘이 있는자 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대선이 끝나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세상은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새대통령이 펼칠 정책을 평가하면서 나라의 이익을 따지고, 국제정세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걱정이 기대가 동시에 교차하며 사람들은 뭔가 바뀔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정작 이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가 과연 진정한 힘을 가진 자인가?에 대한 물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소망을 품고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다행이 우리들은 오늘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세상을 향해 치열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화를 간구하는 요한의 목소리를 읽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생각하고 고백하는 추수감사절의 우리들의 고백은 “여전히 은혜와 평화”로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삶에 우리의 생각을 맞춰야 합니다.
마지막때: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하는 시간
마주한 현실에 우리는 과감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화를 이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들려오는 답답함에 우리들은 그 너머 희망을 기대하고 사람들에게 감격을 나눠줄 은혜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뀔 것 같지 않은 현실에서도, 적극적으로 이 세상을 새롭게 바꾸실 하나님의 귀한 사역의 손길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자부심과 단단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진정한 감사와 고백으로 이 땅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때~!라는 기독교적 고백의 의미는 고난을 넘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가득한 시간을 꿈꾸고 실현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이해하는 종말과 마지막때의 의미입니다.
다음주부터 대림절기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심을 평화의 마음으로 기다리는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바라기는 우리모두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화가 이땅에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가득채워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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