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서 후서 4:3-6 (주현 후 마지막 주일 / 변화주일)
변화: 우리가 기대하는 힘
변화주일: 사순절을 기다림
주현절 마지막 주일을 우리들은 변화주일로 지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예수님이 처음으로 신적 변화의 표징으로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환하게 빛나는 예수님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꼼꼼히 읽어내는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출애굽기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비슷한 모양으로 변화된 사건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과 평행 본문인 복음서에 마가복음 9장에서는 마침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만나는 장면이 그리고 예수님이 변화된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변화는 μεταμορφόω metamorphoo, 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Transfigure, Transformation이라는 말로 번역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겉모양만 변한 것이 아닌 전체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혹시 기억나는 분들이 있으실지 모르는데,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가 μετάνοια 라는 말로 “변화”와 “회개”가 모두 “Meta”라는 원어에서 만들어낸 단어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변화는 “외형과 내면 그리고 삶의 방향”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교회절기로 주현 후 마지막 주일에 변화주일을 보내면, 우리들은 곧 사순절 기간에 접어듭니다. 변화주일을 지내고 사순절,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보내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변화”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전해줍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변화는 본인의 영광과 세상에 군림하는 힘을 소유하는 의미가 아닌, 자신을 희생함으로 구원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드러내는 사건임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변화를 경험했을 때 아마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이 마치 수퍼파워를 가지는 분으로 여겼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본인을 고난으로 몰아가시고, 고난을 통해 진정한 변화는 희생과 섬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변화: 감리교회의 시작
“변화”에 대한 의미를 곱씹어보면, “회심”에 대한 의미와 연결되어 집니다. 마침 몇몇 분들이 질문하신 것 중에 “감리교회”에 대한 직제와 교리에 대한 질문을 먼저 잠깐 나눠보려고 합니다. 감리교회는 원래 교단의 의미가 아니라, Movement에 대한 명칭이었습니다. 감리교 운동을 시작하신 존 웨슬리 목사님을 감리교 창시자로 소개하는데, 이분의 “회심”을 통해 감리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몇 번 말씀드린 것처럼, 존 웨슬리 목사님은 교육을 잘 받은 목회자였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훈에 동생 찰스 웨슬리와 조지아 선교를 하기 위해 배를 타고가는 중에 배에서 폭풍을 만납니다. 거친 파도에 흔들리는 배 위에서 웨슬리 목사님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는데, 함께 동승한 모라비안 교인들이 찬송을 부르고 함께 기도하며 밝게 보내는 모습에 충격을 받습니다. “똑같은 그리스도인인데 나는 왜 두려워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깊이 웨슬리 목사님 삶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미국 조지아 선교에 실패하고, 사랑의 질투에 눈이 멀어서 사역에 실패하고 몰래 미국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영국으로 돌아간 후에, 런던에 올더스게잇이라는 거리를 걷다가 다시 한번 모라비안 교인들의 모임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때, 평신도 리더 중에 한 분이 로마서 서론을 읽어 내려가는 내용을 듣고는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존 웨슬리 목사님의 본격적인 감리교 운동이 시작됩니다. 원래 Methodist 라는 말은 옥스퍼드를 다닐 때, 친구들이 웨슬리와 친구들에게 붙여준 별명이었습니다. 좋은 의미도 아니었고, 약간의 놀림이 섞여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으로 신앙 운동의 이름으로 붙인 이유는 “규칙쟁이”라는 이 말을 통해 철저한 신앙훈련과 동시에 규칙에 얽메이지 않는 복음전파라는 의미를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영국성공회는 하이처치( High Church)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정해진 장소, 정해진 자리, 특히 기부를 많이 한 사람이 교회에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회심”한 존 웨슬리 목사님은 길거리에서 묘지에서, 공원에서 탄광촌에서 술통 위에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성공회는 웨슬리 목사님의 교회 안에 설교권을 금지하면서 길 거리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오히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예배한 웨슬리 목사님의 사역은 영국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는 혁명으로 왕을 단두대에 세우는 일이 벌어졌지만, 영국이 지금까지 왕권을 지키고, 영국 사회가 붕괴하지 않은 이유는 감리교 운동 때문이라는 것이 영국 사회학자들의 평가일 정도로 당시에 웨슬리 목사님의 감리교운동은 대단했습니다.
이런 감리교 운동이 미국 땅에까지 전해졌습니다. 활발하게 선교 활동을 하던 감리교 선교사들이 미국의 독립전쟁으로 영국이 아닌 미국을 후원하기로 하고는 영국에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남음으로 감리교 운동이 감리교단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됩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교단을 만드는 것을 반대했지만, 특별한 역사적 상황에서 미국의 감리교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는 않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감리교회는 교리를 내세우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교단보다 중요한 것이 복음 사역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감리교단은 미국의 시작과 함께 서부 개척에 선봉에 섭니다. 목회자가 부족하다 보니, 평신도들의 역할을 중요하게 가르쳤고, 속회모임이나, 평신도 설교자를 훈련시켜서 서부 개척에 제일 먼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합니다. 그래서 다른 교단과 달리 감리교회는 직분보다는 위원회 활동을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고, 평신도 사역자, 평신도 설교자를 훈련해서 사역할 수 있도록 권장합니다. 이런 영향으로 미국에서 최초로 가장 많은 교회를 세운 교단이 되었고,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워가는데 필요한 시스템들을 감리교회가 제공합니다. 웨스트포인트에 가면 미국 군사 역사를 배울 때, 감리교회가 미국 군대 시스템에 미친 영향이라는 과목을 배운다고 합니다. 감리교회는 다른 교단과 달리 교리로 분리된 교단이 아니라 여전히 서민들에게, 평신도들에게 어려운 교회의 문턱을 활짝 열고, 목회자가 가진 권한을 나눔으로 평신도 공동체를 세우도록 노력한 신앙 운동을 통해 비롯되었습니다.
감리교회가 장로교회와 대표적으로 다른 것은 “예정론” 중심의 구원관이 아닌, “은혜의 낙관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통한 구원론을 주장합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을 사역의 실패와 중생, 곧 회심을 경험하면서 느낀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를 향해 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역사하신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존 웨슬리 목사님은 “먼저 베푸신 은혜” (Prevenient Grace) 라고 이야기하게 됩니다. 즉 우리들이 주님을 몰랐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이미 은혜를 주셨고, 그 은혜를 깨닫는 순간에 “은혜 위에 은혜” 즉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백은 당시 도시화로 빈곤에 처한 도시 빈민 사람들과 탄광의 노동자들에게 깊은 감명과 은혜를 경험하게 합니다. 본인들의 삶은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의 은혜 약속은 여전히 자신들의 삶에서 역사하신다는 확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짧은 시간, 다 설명할 수 없지만, 감리교회는 존 웨슬리 목사님의 “변화” 곧 “회심”을 통해 일어난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변화와는 차이가 있지만,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보편적으로 전해지고, 우리들 삶에 가까이 오도록 낮아지신 하나님의 구원 손길을 고백하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 변화를 통한 변함 없는 열정
오늘 읽은 본문은 바울의 변호로 시작합니다. 오늘 읽지 않았지만, 2절에 보면 바울은 어떤 공격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숨겨지고 간교함으로 드러낼 수 없는 도덕적인 스캔들” 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명확하게 “하나님 앞에 자신을 떳떳이 내세울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숨겨지고 간교함, 그리고 도덕적 스캔들”은 사역자에게 치명적인 약점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 소문 자체가 사역자의 신뢰에 대한 치명적인 손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눈여겨 봐야 할 것은 “바울은 자신을 치명적으로 만드는 소문”에도 “복음을 전하는 것”에는 변함없는 열정을 보입니다.
우리들이 바울을 기억하는 것은 “사울”이었던 바울이 “바울”이 된 이후에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큰 위협이었고, 이방인들에게는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말 그대로 바울이 평생 일구어온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신이 배운 것, 출신, 누렸던 권리들은 버려졌고, 대신,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 땅에서는 온갖 모욕을 당하고 오해를 받으면서 지치지 않고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엄청난 공격을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이고, 이방인들에게 누구보다도 열정을 다한 사역자였는데, 정작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의심하고 바울이 사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쟁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복음이 가려지는 경우: 바울의 우려
이에 대해,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고백합니다. 3절에,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가려졌다면, 멸망하는 자들에게나 가려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복음은 모든 이들에게 새겨져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하지만,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의 본질보다는 바울의 모험적인 사역의 모양에 의문을 품습니다. 자신을 사도라고 고백하는 바울의 고백을 의심하고, 바울의 가르침 보다는 거짓 교사들의 농간에 바울과 동역자들을 의심합니다.
이를 바울은 “복음은 가려질 수 없고, 멸망하는 자들에게나 가려진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이 가려진 것을 벗겨 냄으로 복음의 본질, 즉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마땅한 삶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4절에, 이 세상의 신이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 하는데, “이 세상의 신”은 문자적으로는 사탄을 나타내지만, 고린도후서 3장을 연결해 보면,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이 자유와 해방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억압과 삶의 제약이라는 굴레로 변해버린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왜곡된 율법, 그러므로 벗겨내야 할 것들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가기 위해 주어진 율법이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상황에 놓인 종교적 타락을 바울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결방법은 가려진 너울을 벗겨버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심으로 주신 복음으로 우리들이 초대됐다는 것을 확신하고, 은혜 안에 기쁨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죽이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우리들이 무지함으로 가려질 때가 있습니다. 바울의 입을 빌리면, 율법에 얽매여 복음이 가려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이라는 것이 이스라엘이 출애굽 했을 때 모세를 통해 주신 “해방의 선물”이었지만, 예수님 시대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려지는 것으로 변질하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역 중에 가장 큰 어려움은 고린도 교회 안에 활동했던 율법주의 자들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사역의 열매보다도 율법으로 판단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둔 자들이었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도 아무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를 나누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을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세운 교리적인 혹은 교회법이라는 이름은, 웨슬리 목사님의 설교를 막고, 자신들과 비슷한 방법이 아니라는 이유로 감리교 운동을 무시합니다.
우리를 드러내지 말고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 빛으로 살아가는 삶
오늘날,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보내는 시간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어려움을 경험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상이 고통스러워 아우성칠 때, 교회는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야 하지만, 교회가 스스로 만들어낸 원칙과 때로는 이기적인 신앙으로 피난처가 아닌 오히려 자신들이 가장 힘든 피해자라고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5절 말씀에, 바울이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는 것일 뿐 우리 스스로가 주님의 종이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들은 우리가 믿는 방법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방법입니다. 이 사실이 드러나는 것은 바울이 6절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어둠 속에 빛을 비춰라”는 행위에 함축되어 집니다. 보통 고난을 어둠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이 어둠처럼 막막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는 즉 복음을 전하는 자는 바로 이 막막한 어둠에 빛을 드러내는 것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가 바로 이런 사역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을 시작으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를 가려지게 해서 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다~! 선포하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우리를 단단히 묶어내고는 복음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확인되면 그 가려진 것들을 걷어버리고, 온전한 그리스도인, 온전한 교회로 세워나갈 수 있도록 함께 헌신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는 존재여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들의 삶에서 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가리는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아프게하는 소리는 곧 우리에게 가리워진 것들을 걷어내라는 냉정한 질타임을 기억하시고, 가리워진 것을 벗어냄으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을 살아가고, 든든한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교회일까 함께 꿈을 꾸기 원합니다.
빛 되신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봉헌및 파송기도
오늘을 살아내는 삶은 복잡함에 진리를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전하려고 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는 복음을 전하는 것"에 저희도 집중하게 하셔서, 우리들이 자칫 가려져서 보지 못하는 것 때문에 방황하지 않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끄심에 환하게 드러나는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나아가도록 간절히 구하오니, 그런 삶을 살고자 결심한 이들에게 삶은 주님안에 단순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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