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21:4-9
생명을 얻으려면
1. 교회 창립 35주년 주일입니다. 예전 같으면 좀 특별하게 보냈을 텐데, 아쉽기는 하지만, 이렇게 평범히 보내는 것도 또 다른 뜻이 있는 줄 믿습니다. 교회창립 주일을 기억한다는 것은 “역사적 작업”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가 세워지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인 우리들이 열린교회라는 이름으로 함께 엮어져서 한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매년 창립주일을 기억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 여정을 기억하는 작업과 같다는 이야기겠죠.
3. 작년과 올해는 특히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펜데믹으로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오늘이 3월 둘째 주일이니까, 1년이란 시간을 그렇게 보낸 것 같습니다.
4. 이것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고, 그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곧 우리들의 영적 여정을 세워가는데 또 하나의 특별한 시간이었음을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5. “빨간 머리엔”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걷다 보니 길모퉁이에 이르렀어요. 모퉁이를 돌면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 가장 좋은 게 있다고 믿을래요.”
6. 오늘을 보내면 우리에게 어떤 시간이 기다릴지 우리는 모릅니다. 펜데믹 이후에 어떤 세상이 도래할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게 있다고 믿는 것”에 제 마음도 두고 싶습니다.
7. 요즘, 저의 집 뒤 뜰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란 꽃들이 셀 수 없을 만큼 가득 덥혀 있습니다. 분명히 비가 오기 전까지 뒤 뜰은 평범한 마당이었는데, 발 디딜 틈 없이 피어난 꽃을 보면서 경이로운 생명의 신비에 빠져들곤 합니다.
8. 아무것도 없는 곳에 생명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 질서를 자세히 목격하는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자세히 경험하면서 깊이 고백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생명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도 일으키시는 분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배하는 것, 신앙생활 하는 것 어느 하나 “생명을 일으키는 것”과 관련이 없는 것이 없고, 우리들이 하는 모든 행위의 방향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생명을 살리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10. 오늘 읽은 본문은 출애굽 여정 중에 거의 후반부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기록된 것 같습니다. 민수기 20장에 모세와 함께 출애굽을 위해 노력한 아론의 죽음을 기록하였고, 지리적으로는 신 광야인 가데스바네아에서 요단동쪽 모압평지로 나아가는,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 생활의 막바지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1. 홍해를 건넌 이후에 가나안땅까지 두 달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이지만, 하나님은 40년을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광야에 머물게 합니다.
12. 4절에,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산에서 홍해 길로 따라갔다는 것은 그만큼 길을 돌아서 갔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길을 돌아서 가니,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조급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쓰인 קָצַר qatsar, 라는 단어는 “짧아졌다”라는 뜻으로 “마음이 짧아졌다, 좁아졌다.” 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3. 마음이 좁아진 이유는 그만큼 여유를 잊어버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14. 처음에는 모세를 따라가는 것에 집중했지만, 이제는 모세를 따라가는 것에 의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15. 이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의심이 5절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16.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까? 먹을 것도 없습니다. 마실 것도 없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5절)
17.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자유롭게 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허락하셨는데, 그 여정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만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18. 애굽을 빠져나온 것을 후회하고 있고, 차라리 노예로 살았던 애굽의 삶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19. 그 이유는 첫 번째, 광야의 삶이 예상보다 길어졌고, 두 번째,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20. 이 순간은 모세의 리더쉽이 흔들리는 순간입니다. 모세가 지닌 영적 리더쉽은 물론,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도 무너지려는 순간에 모세 또한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21. 이 시간을 오늘날로 보면, 방향을 알 수 없고, 내가 지금 가는 길이 맞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리더쉽을 발휘해야 할 사람이라면 모세와 같은 기분을 느낄 것이고, 누군가를 따라가야 하는 사람이라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22. 잘 아시겠지만, 불확실성 앞에 평온할 사람 없고, 광야 같은 삶이 끊임없이 지속하면 당연히 광야의 삶이 시작되기 이전에 시간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23. 이런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불뱀”이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백성들을 많이 물어 죽입니다.
24. 성경에서는 불뱀이라고 번역했지만, 원어 성경에는 불같은 알 수 없는 것, 마술같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마 불뱀에 물리면, 화상을 입은 것 같은 반응이 몸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불뱀이라고 불렀고, 단지 뱀의 한 종류만 그런 게 아니라, 광야에서 만나게 되는 “독을 가진 곤충이나 생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5. 광야에서 독을 가진 생물을 만난다는 것은 익숙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마치, 불평을 늘어놓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심판을 하기 위해 불뱀을 보내신 것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26. 전체적인 원어 성경의 문장 구조는 이스라엘이 불평을 늘어놓았던, 길어진 광야의 삶, 그리고 형편없는 음식과 평행 문장으로 광야에서 마주치는 알 수 없는 독충이나, 뱀 즉, 애굽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골칫거리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27. 하지만, 길어진 광야의 삶과 형편없는 음식은 이스라엘 백성을 “불평”으로 이끌었지만, 알 수 없는 독을 가진 여러 생명들, 대표적인 불뱀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움으로 이끌었습니다. “불평”은 모세를 원망하게 하지만, “두려움”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간절히 “간구”하게 하고 있습니다.
28. 그러니 불평과 두려움의 뿌리는 같다고 볼 수 있고, 원망이 간구가 되도록 바꾸어 놓은 것이 단지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심각한 문제에 만났을 때 이스라엘이 보인 반응을 통해 우리들도 어떻게 반응할지를 살펴보는 것도 이 본문을 읽어내는 또 다른 의미가 될 것 같습니다.
29. 말씀 드린것처럼, 불평하는 삶과 두려움이 가득한 삶의 뿌리는 같습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보면, 불평이 많은 사람의 특징은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득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30. 7절 말씀을 보면,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구하였다. “주님과 어른을 원망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이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였다.”
31. 불평은 원망을, 두려움은 간구로 바뀌었는데, 간구하는 마음은 원망에 대한 뉘우침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뉘우침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일러서 구리로 만든 불뱀을 쳐다보면 살아날 수 있다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32. 이스라엘의 간구에, 하나님은 불뱀을 없애는 것으로 이스라엘을 도운 것이 아니라, 모세로 하여금, 놋뱀을 만들어서 쳐다보면 불뱀에 물렸어도 살아날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33. 불평이 원망으로, 두려움이 간구로 이 간구에 대한 응답은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의 존재는 여전히 그들의 삶을 위협하지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만들어낸 놋뱀을 보는 것으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이 경험하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어떻게 사라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34. 평행분문인 요한복음 3:14-21을 보면,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가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즉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하시니, 니고데모가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 태어나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이 오해를 풀기 위해 예수님이 모세가 만든 놋뱀을 예를 들어 예수님이 무슨 뜻으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는지를 설명하는 본문이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 21절 말씀입니다.
35. 14절에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예수님 자신도 들려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36.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에서 태어난다는 동사는 실제로 헬라어로 “배속에서 태어나는 것”과 같은 동사를 사용합니다.
37.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시 태어남, 거듭남”의 의미는 “불평의 존재”에서 “간구의 존재로”. “불안함의 존재”에서 “돌아섬의 존재”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8.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만드신 놋뱀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는 불뱀의 위협을 이겨낼 수 있다는 생명의 거듭남으로 초대했습니다. 다시 말해, 더이상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상대를 원망하고 절망으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행위를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일으키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것입니다.
39. 여전히 불뱀과 같은 생명을 위협하는 두려움이 밀려올 수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불평과 원망으로부터 시작되고, 이 불평스러운 것이, 두려운 것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평안할 것 같지만, 하나님은 모든 불평과 원망의 이유가 존재하는 가운데, 두려움을 없애는 것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존재하는 고난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들은 든든히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40. 생명을 얻어내는 방법은 모든 문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들이 우리를 여전히 위협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을 생명의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임을 기억해야합니다.
41. 니고데모를 향해 예수님이 소개하는 “다시 태어남, 거듭남”의 의미는 예수님을 통해 변화되는 새로운 존재로서 의미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42. 잘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로 요한복음 3:16-17절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43.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17)
44.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계획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로 계속해서 진행하고 계십니다.
45. 그 계획의 하나로, 우리들을 주님의 제자로 부르셨고, 교회를 세우셨고, 35년 동안 함께 열린 공동체를 세워 오셨습니다. 이 역사의 물줄기는 변함없이 우리 세대를 거쳐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입니다.
46. 코로나바이러스로 우리들은 여전히 불안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기억하는 것 외에는 앞으로 다가올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구원의 계획이 지속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7. 불안과 두려움을 넘어서 간구와 회개를 통해 하나님 생명의 물줄기를 이어감을 통해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인 줄 믿습니다.
48. 여러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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