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20-33, 밀알 하나
우리에게 직면한 과제
요즘 우리들의 온몸을 휘감고 있는 것이 “차별”과 “혐오”라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코로나가 발병한 이후부터 미국 내에서 빈번하게 아시안들이 당한 “혐오”적 범죄는 빈번해졌습니다. 지난주에 애틀랜타에서 일어난 총기 범죄로 6명이 희생당하셨는데, 그 중에 네 분이 한국 사람이라는 소식에 한인들에게는 더 크게 충격으로 다가온 듯합니다.
그중에 한 젊은 엄마의 죽음은 두 아들만 남겨두었다는 슬픔으로 전국적으로 모금 운동이 벌어지고 있고 제가 알기로는 우리 교회 여선교회도 기부를 하기로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많은 한인을, 아시안 인들을 분노케 하는 이유는 혐오 범죄임에도 경찰의 수사 방향은 다른 쪽으로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는데,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계 배우인 대니얼 대 김이 자신의 여동생도 조깅 중에 혐오적 언사를 퍼부으며 차로 상해를 가하는 증오 범죄의 피해자였는데, 경찰은 운전미숙으로 피의자를 수사했다는 영상을 나누면서, 우리들이 공분하는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미국에 사는 한 이민자로서 그리고 여기서 아이들을 키우는 아빠로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목사로서 이 한 주간은 여러 가지 질문과 이 현상에 대한 이해를 위해 시간을 보내고 기도한 것 같습니다.
지난 한 주간 차별과 혐오라는 상처들이 온몸을 휘감아 놓으니 주어인지는 질문과 늘어나는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시간은 가고, 모든 것이 진보할 것이라던 생각은 현실 앞에 더욱 겸손해지고, 단순히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모든 것이 진보하는 것이 아닌, 노력과 헌신 그리고 희생이 있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노출된 혐오
마사 누스바움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시카고대학에서 법철학을 가르치는 분인데 이분이 혐오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배설물같이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전염이나 오염을 꺼리는 원초적 감정으로서의 혐오 감정은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는데, 문제는 실제로 위험하지 않는데도 자신이 열등하다고 믿는 ‘사람’을 오염물의 일부로 확장하고 투사하는 데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분노나 고통의 원인을 자신 스스로나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타인이라고 생각할 때 이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되기 때문에 혐오라는 행위를 정당화 한다는 것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펜데믹이 길어지면서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있죠. 그리고 앞으로 어떤 상황이 우리의 삶에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 불안함은 두려움으로 바뀌는 것 같습니다. 이 두려움이 결국 누군가를 대상화해서 혐오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이 생각에 끝에 제가 아무 생각 없이 저질러온 혐오적 감정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 모형 항공기 대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잘 만들어주셔서 반에서 1등을 했습니다. 반대표로 대회를 나갔는데, 모형 항공기 대회 당일에는 내가 직접 모형 항공기를 만들어서 해야 하는지 모르고 참여했습니다. 그러니 잘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반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기대는 큰데, 쩔쩔매며 당황하다가 모형 항공기를 사온 문방구 집 아이가 같은 반 친구였는데, 그 친구를 향해 비난을 쏟아 내었습니다.
“이렇게 엉망인 것을 어떻게 팔 수 있어~!”
초등학교 3학년 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이유는 아직도 저 스스로 부끄러운 행동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죄, 구원의 은혜
이런 생각 끝에 혐오와 차별에 투사되는 인간의 죄성을 떠올리면서 더욱더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노력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추궁하시자, “저 여자가 따먹자고 했다고” 비겁한 변명을 둘러댄 아담의 자손으로 오늘 저는 더욱 부끄러움 모습으로 이 앞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함께 이 마음을 나누는 이유는, 우리들은 늘 성숙한 신앙생활, 성숙한 지성인으로 살아간다는 자부심을 지녀왔지만, 그냥 시간이 흘러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희생과 노력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또한 그 범죄를 저지른 21살 청년이 독실한 남침례교회 교인이고, 목회자의 아들이라는 현실을 마주한 한 남자로서, 이민자로서, 목회자로서,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제가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서 있는 것은 우리들이 기대하는 기독교인의 삶,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할 우리들이 이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저에게도 넘쳐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간이 가고 잊혀지겠지만, 이 미안함과 부끄러움은 오래 남아서 우리를 단단히 만들어 냈으면 좋겠습니다. 그 단단함을 통해 우리들이 정말 기대하고 소망하는 시간의 열매들이 우리 공동체 안에서 우리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서는 모든 이들에게 맺어지기를 소망해봅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생명
오늘 읽은 본문은 요한복음이 고백하는 희생의 신비로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4절에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요한복음 공동체가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향이 녹아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100년 정도에 기록되었으니, 교회가 거의 한 세기를 통해서 세워지고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세워지는 열매를 증거하는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박해와 복음 전파라는 두 가지 반대적 상황에서도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나름 시스템이라는 것이 만들어졌고, 그렇게 만들어진 시스템을 통해 교회는 운영되었을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명절이라고 한때는 “유월절”을 의미하고 “그리스인”은 헬라인 즉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이 빌립을 찾아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청한 이유는 빌립이라는 이름이 헬라인 즉 이방인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익숙한 사람을 통해 예수님을 뵙기를 청한 것입니다.
이 정황은 당시 요한 공동체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 이르기까지 복음이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복음이 확장됨으로 교회 안에 사람들이 늘어났고,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시스템이라는 것이 초대교회 안에 생기게 된 듯합니다.
이런 시스템은 주로 조직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과 연관이 되어 있고, 그 안에서 역활과 책임을 통해 목소리가 큰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분위기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23절에 “인자는 영광을 받을 때”를 공동체에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고, 심지어 이방인들도 교회에 몰려드는 상황에, 모든 것이 정점에 이르는 순간에 예수님은 “영광을 받을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진 말씀인 24절 말씀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씀으로 “영광을 받을 때”가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24절에,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진정으로 진정으로”로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셨습니다. “ἀμὴν ἀμὴν” (amen, amen)이라는 헬라어를 반복해서 사용하셨는데, 영어성경에는 Truly, Truly 번역했고, 헬라어의 문법상 뒤에 나오는 문장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교회가 부흥하고, 예수님을 찾는 이들이 늘어날 때, 예수님은 그 순간을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영광과 다른 하나님의 영광
그런데, 그 영광을 받는 다는 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영광의 개념하고 다릅니다. 예수님이 강조하시면서 말씀하신 영광의 때는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요한 공동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책임과 의무를 감당해야 할 교회 지도자들이 늘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것을 관리하고 시스템을 최적화하기 위해 교회 안에 사람들은 머리를 모아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았고, 나름의 최적의 시스템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더할 나위 없는 시스템에 교회는 안정되어 보였지만, 교회가 생명력을 잃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책임을 지고 일을 한다는 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내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는 헌신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랑의 공동체라기보다는 늘어난 사람들을 관리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아주 쉽게 교회가 잘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잘 전해지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 공동체의 문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밀알의 가르침을 교회공동체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달려 돌아가신 사건은 스스로 죽으심으로 많은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교회의 방향은 하나님의 방향이어야 한다: 죽어서 열매 맺은 한 알의 밀알
교회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방향에 동의하고 그런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희생공동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는 것,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늘 고난과 고통에 직면하는 것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희생”은 고난을 감수하겠다는 것, 고통을 감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난과 고통이 없음에도 스스로를 희생함으로 많은 생명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릅니다.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정점에, 예수님은 희생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세상의 방향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죽어서 열매 맺은 한 알의 밀알 같은 : 메티 노블
얼마 전에 친구의 추천으로 “매티 노블”이라는 선교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아더 노블 선교사의 부인으로 메티노블은 많은 초기 한국기독교의 자료들을 모아서 기록하고 사진을 남기신 분입니다.
감리교 선교사로서 남편을 따라 조선에 들어와 평양에 머물면서 선교 활동을 하신 분인데, 남편보다는 부인인 메티노블은 역사적 기록을 많이 남기셔서 방대한 자료들을 최근에 한 역사학자가 정리한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름이 낯익어서 살펴보니, 예전에 제가 오클랜드교회 100년사를 썼을 때 언급했던 분입니다. 이분이 평양에서 사역할 때 임정구라는 분을 추천에서 미국에 보내셨는데, 이분이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와서, UC 버클리를 졸업하고 PSR을 졸업하고 감리교 목회자가 되어서 오클랜드교회를 사역하다 위암을 세상을 떠나신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메티 노블”이라는 선교사를 언급했던 것 같습니다.
1884년을 시작으로 1945년까지 한국 땅을 밟은 선교사는 1,529명이고, 그중에 70%인 1,059명이 미국 출신이었고, 영국과 캐나다, 호주 등 영연방이 25% 382명이었습니다. 이 선교사들이 한국의 근현대사에 미친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영향력은 상당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중에 “메티 노블”은 선교사의 아내로 그리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사람이지만, 남편을 대신해서 목회자들을 상담하고, 언어를 배우고 한국을 이해하고 한국을 기록하는 일에 힘쓰고 사람을 키워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평양에서 7남매가 아이들이 태어났는데, 그중에 둘은 영아기 때 죽고 5남매 모두 UC버클리에서 수학고 이 지역에서 모두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왜 매티 노블을 소개하냐면, 42년간 한국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선교사로, 엄마로서, 한 남자의 부인으로 살아온 삶이 철저하게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은 밀알과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미 북 감리교회 출신이었던 남편을 따라 한국에서 42년간을 보내면서 본인들의 사역 이외에 다른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한국의 목회자들을 후원하고, 사람을 키워낸 헌신은 온 종일 이야기해도 부족할 만큼 방대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의 희생으로 열매 맺은 우리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우리들은 이런 선교사의 희생으로 오늘날 이 땅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혹시 기독교의 본질을 궁금해서 물어보는 분들이 있다면
우리들은 밀알과 같은 존재로 이 땅을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자들이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냥 밀알이 아니라 죽어서 많은 생명을 일으키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상황이 정점일 때, 소위 모든 것이 완벽하고 잘나갈 때, 우리들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을 때”를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에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나약한 사람들입니다. 어려움에 노출되면 쉽게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전가하는, 아니 이보다 더한 혐오와 차별로 사람을 대할 수 있는 “죄”라는 것을 가득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를 입고, 어디든지 언제든지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곳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기 위해 헌신했던 많은 선교사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고 헌신함으로 희생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졌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들 삶에 직면한 현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른다고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시간을 보내면 자연스럽게 잊혀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을 우리들의 직면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실천하는 사람이고, 스스로를 희생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희생으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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