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다투었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던 제자들이 마가라 하는 요한을 함께 전도여행에 동해하는 이유로 다투어서 서로 다른 길을 갔다고 합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해서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향했다고 합니다.
다툼의 이유는 다양합니다. 제자들이 누구를 전도여행에 동행할지에 대해서 이리 다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심각한 문제도 아니고, 복음의 본질의 문제도 아니고, 이방인 사역에 대한 예루살렘 공회에서 인정을 받은 것은 이보다 더 큰 다툼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일은 잘 해결해 놓고 “누구와 함께 전도여행을 갈지”를 두고 바울과 바나가 심하게 다투어 서로 다른 사람을 데리고 다른 곳을 향해 전도여행을 갔다는 것은 큰산을 넘은 이 두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이 정말로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갈등은 큰 문제보다, 작은 것에 더 크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큰 문제는 잘 넘어가도 작은 것들에 서운하면 왠만한 갈등보다도 더 크게 공동체를 흔들때도 있습니다.
교회에 다양한 문제들이 있겠죠. 그중에 제가 경험한것은 주보에 자기 이름이 안나왔다고 의자를 박차고 나간분도 보았고, 부부싸움으로 교회전체가 혼란과 갈등의 소용돌이로 몰로간 사건도 있었습니다. 더 큰 어려움도 이겨냈는데, 결국 가볍다고 생각되는 것에 공동체 전체가 흔들린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은 아마 겉으로는 누구를 데리고 가냐?의 문제였을수 있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이런저런 불편함이 서로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이 불편함이 이 작은 이슈에 갈등하게 된것이지 쌓이고 쌓인 문제들이 이 작은일에 반응한것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것을 숨기지 않고 증거합니다. 교훈을 주려고 전하는 말씀에서 사도행전이 이를 그대로 보고하는 이유는 이 둘이 저지른 일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너머의 일을 위해서 눈앞에 벌어지는 작은일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에서 부터 큰일에 이르기까지 성숙하게 상황을 잘 읽어내라는 뜻인듯합니다.
우리들의 사는 모양은 이렇게 다양하고 좀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단정짓지도 말고, 마음을 열어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진다면 서로가 서로를 좀더 따뜻하게 대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보기도
어제 장승현 형제를 문병을 다녀왔어요.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놀랐습니다. 병원에 들어서는데 젊은 사람을 찾아 볼 수없는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이 지내는 재활병원이었어요. 거의 1년가까이 움직이지 못하고 교회를 그리워하는 젊은이가 저를 보자마자 쉬지않고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좀더 관심을 갖지 못한것에 미안함이 들었어요. 8월에는 집으로가서 두달이 지나면 다른쪽을 수술한다는데 아마 내년초나 되어야 교회에 올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해주시고, 긴 여정 외롭고 힘들지 않게 응원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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