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지속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위협을 당하며 이동하고 있습니다. 드로아에 다달았을 때는 오래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라는 판단에 밤늦게 까지 말씀을 가르치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 높이에 창틀에 걸터 앉아있다 졸음으로 떨어지고 죽게됩니다. 바울은 이를 살리고 떡을 떼고 성도의 교제를 이어갔다는 것, 그리고 이를 본 성도들이 위로받았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어릴적 전도사님이 이 설교를 하면서 설교시간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죽음(?!)이르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포스러움(?!)을 느꼈던적이 있고, 어느정도 머리가 커서는 드로아라는 지역에 3층 높이나 되는 건물이 있었고 창틀이 존재했다는 것에 건물을 궁금해했던 기억이 있고,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이 본문을 접했을때는 몸이 피곤해도 말씀을 듣기 위해 창틀에 까지 올라선 유두고라는 청년에 관심이 생겼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다시 읽게되는 본문 속에서는 바울은 박해를 피해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했고, 밤늦게까지 강론을 했다는 것은 그 만큼 전하고자 하는 것을 그때가 아니면 언제 올지 모르는 시기에 살았으니 바울의 마음도 이해가 되고, 이런 바울이 왔으니 사람들이 모여서 밤늦게까지 말씀을 듣는 것에 열심을 낸다는 마음도 이해가 가고, 유두고라는 청년은 육신의 피로함보다 말씀을 듣는 것을 선택한 청년으로 보입니다.
시선에 따라 본문은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관심에 따라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본문에 관심이 다를수 있습니다. 그 관심을 성경적 진리라고 이야기하면 성경전체의 맥락을 놓치고 또는 성경본문의 의미를 왜곡하게 됩니다. 설교자 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는 성도들이 주의해야할 성경읽기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분들이 읽는 성경의 내용은 온통 전쟁과 핍박과 험난한 가족사와 잔인한 죽음 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비슷할 것입니다. 남의 삶에 쉽게 말을 얹는 것은 그 사람의 삶에 10%도 이해하지 못하고 이야기하는 것임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삶을 이야기할때 10년의 관계가 아니면 섣불리 이야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아이의 삶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는 늘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확신하고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어떤 삶을 살았건, 어떤 생각을 하건, 어떤 정당을 지지하던, 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교회안에서 실천할 수있는 유일한 일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중보기도
소망회 회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이번주에 교회 음향을 손을 보려고 합니다. 간단하게 정리해서 쉽게 조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첫번째 목적이고, 온라인으로 나오는 사운드에 잡음이 생겨서 제거하는 것이 두번째입니다. 통역을 위한 시스템도 갖춰났습니다. 영어권분들이 생겨나서 통역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혹시 준비된 분들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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