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9:8-17
기쁜 소식
잘 아는 것이 더 어렵다.
오늘 읽은 본문은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잘 알려진 것의 함정은 알려진 만큼 그 의미를 이해하는데는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요나의 이야기, 노아 방주 이야기는 교회학교에서부터 자주 듣던 성경 이야기이지만, 그 이해와 의미 만큼은 매우 난해하고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생각보다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는 의미입니다.
마침,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구원에 대한 질문이 함께 들어왔어요. 우리들이 늘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하는데, 구원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기가 막상 입으로 말을 하려고 하면 쉽지 않다는 것이죠.
사순절 첫 주를 보내면서 “구원”을 생각해보는 것이 딱 맞는 주제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성서일과 본문도 구원과 연관되어 있어서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잠깐 나누고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해 더 깊이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의 노력: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의미
오늘날, 기독교에서 고백하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교리”는 “사도 바울”의 노력의 열매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본 적이 없는 사도이지만, 바울이 지닌 장점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아는 바리새인 출신에 가말리엘 랍비의 수제자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구약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예수”를 통해 “복음”으로 선포되어졌다는 것을 바울은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전도 여행을 다니고, “로마서”에서는 스페인, 즉 당시의 땅끝이라고 할 수 있었던 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열정을 담아 편지를 쓰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해하고 고백하고 선포한 “예수님의 복음”은 “예수님이 전한 기쁜 소식”인데 이것이 바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이해 1: 우리는 죄인이다
바울은 먼저 우리가 모두 “죄인”임을 선언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 중에 “죄”의 문제는 빠지질 않죠. 누군가가 스스로 “나는 무 흠하고, 죄가 없는 사람이야”라고 이야기하면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됩니다. 아니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이 “해결할 수 없는 이 죄”의 문제와 씨름을 하면서 살게 마련입니다. 바울은 “보편적인 죄”에 대해서 우선 깨달아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이 모든 죄를 용서하고 의롭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이해 2: 의롭게 되었다. (칭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라는 말은, “칭의” Justification by faith라는 말로, 쉽게 풀어 쓰면, 우리가 죄인인데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바울은 이것을 법률적인 용어로 사용합니다. 로마의 고전법을 보면, 죄를 지은 사람을 대신해서 누군가가 그 죗 값을 치르면 죄지은 사람에게 그 죄를 묻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구원의 첫 번째 의미는 “죄인이지만, 예수님이 그 죄를 대신 맡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을 “의롭게 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구원의 이해3: 예수께서 대신 값을 치르셨다. (속량)
두 번째 의미는 “속량”입니다. Redemption이라 말로 번역하는데, 이 뜻은 원래 노예가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일정의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죄에 사로잡힌 노예 같은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이 대신 값을 지불하셔서 우리들이 “속량”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목사님이 오늘, 잘 아는 이야기를 어렵게 이야기한다고들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런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우리들이 이미 받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립니다.
누군가가, 혹시 여러분들에게 “구원 받은 게 맞어?”라고 물으면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 아는 이야기처럼, 어려운 게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에서 늘 이야기하는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다른 구원의 이야기: 새로운 언약
오늘 읽은 본문 이야기로 들어가면, 잘 아시는 것처럼 노아의 홍수로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심판하셨습니다. 노아의 홍수만큼 강력한 심판의 사건이 없었을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않은 생명은 홍수로 모두 진멸하셨으니, 하나님의 심판이 이렇게 두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은 홍수 이후에 노아와 살아남은 자를 향한 약속의 내용인데, 다시는 이런 심판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터이니, 다시는 이런 심판”을 내리지 않으시겠다는 “새 언약의 표”를 주시며 이런 심판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은 구약성경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고대 근동의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인 길가메쉬에도 비슷한 홍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고대문명은 마르지 않는 강줄기 주위에서 일어났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인류의 4대 문명의 발상지는 큰 강줄기에서 일어났고, 그중에 애굽과 메소포타미아는 구약성경에서 중요한 역사적 배경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강줄기가 범람하면 그것 만큼 무서운 게 없을 정도로 홍수에 대한 공포는 상당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범람하는 홍수에 모든 고대근동의 국가들은 “신의 심판”으로 여겼습니다.
노아의 홍수: 새로운 언약에 대한 이야기
이런 고대근동의 경험과 달리 노아의 방주 사건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물로 모든 것을 쓸어낸 심판”은 비슷한 내용이지만, 하나님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언약을 맺으시는 것은 성경만이 가지는 특별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면서 “약속”으로 관계를 만들어 가십니다. 아담과 하와와 처음 나눈 약속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약속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하나님보다는 인간에게 유리 한쪽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하나님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스스로 계약을 갱신하는 분”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아의 홍수는 심판에 무게를 두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지개로 마무리되는 “다시는 이런 심판을 내리시지 않겠다는 약속”에 무게를 두고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홍수로 심판받을 자들도 구원하시는 사랑
평행 본문인 베드로전서 3:18-22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구원을 완성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8절,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간단한 한 문장이지만, 복음의 능력에 대한 기록은 예수님이 의인으로 모든 불의한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에 노아의 홍수를 언급합니다. 홍수의 심판을 받은 불의한 자들, 방주에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이 노아에게 맡기신 예언에 “순종하지 않았던 자들”,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의미는 심판을 받을만한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의롭게 하셨고,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는 “홍수”에 사용된 “물”의 개념을 “특별화”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에서는 “물”은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베드로전서에서는 “물” 은 곧 “세례”를 의미하고 새로운 생명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세례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응답할 때 일어나는 신비로운 사건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평행 본문인, 마가복음 1장 9절에서 15절에서는, 세례요한으로부터 예수님이 물로 세례를 받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성경에서는 “물”은 심판, 기적, 정결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등장합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노아의 홍수에서 심판으로 사용된 물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처럼 더이상 심판의 도구가 아닌, 생명의 도구로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노아의 홍수에서 구원받지 못했던 자들, 즉 순종하지 않았던 자들도 하나님이 구원하시겠다는 계획이 담겨있습니다.
복음을 믿는 다는 것은 변화를 의미하는 것
복음, 즉 기쁜 소식은 지금까지 상징되어진 것들이 새로운 존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옭아메는 것으로 오해한 자들에게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의로우심을 드러내는 것이고, 나의 삶에 상관없을 것 같은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들 삶에 깊숙이 동행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 우리들이 새로운 존재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기쁜 소식은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이야기가 선포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었음이 선언되어지는 소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의 변화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에서 “구원받게 된 존재”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들이 의인이 되었고, 속량 받았다는 것은, 노아의 홍수로 심판받을 만한 존재들을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고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능력이라는 말은 뛰어난 힘을 가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구원의 능력 안에 우리들의 삶이 놓이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을 가져야 하고 이런 확신은 절대로 흔들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이 흔들린다는 것은, 마치 다시 노아의 홍수 때 순종하지 않았던 자들로 돌아가게 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 믿음 있는 자의 행위
펜데믹이 길어지면서 듣는 소식도 많아지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도 많이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다 보니, 생각이 뻗치는 곳이 제한이 없습니다.
지난주에 목회자들이 모임을 하는 줌 미팅에서 “멘탈”상태를 물어보는 질문에, 제가 잠시 머뭇머뭇했습니다. 펜데믹이 길어지니까, 정신건강을 염려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거기까지 고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로서 가장 많이 듣는 걱정은 “교회에 대한 걱정들”입니다. 교회가 성숙하지 못한 이야기, 앞으로 전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 기독교가 기독교답지 못하다는 걱정, 교인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관계할지에 대한 이야기. 그렇게 생각하니까,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약간의 근심은 우리를 긴장하게 하겠지만, 지나친 근심을 우리를 무섭게 다룹니다.
생각해보면, 늘, 만족스러운 교회와 만족스러운 성도, 만족스러운 성직자를 이야기해 본 적이 없습니다. 평안과 기쁨이 가득해야 하는 신앙생활이고, 교회인데, 교회는 늘 근심과 걱정 둘러 쌓여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머리로는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은 큰데, 우리들이 부딪히는 현실은 만만치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좋은 사람 되는 게 생각하는 것만큼 쉬운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랑을 나눈다는 게 어디까지 그 사랑의 한계를 정해야 할지 모릅니다. 주로, 누군가가 좋은 성도의 모습,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었으면 하지, 내가 좋은 성도로, 좋은 목사로, 좋은 교회의 성도로 살아가야겠다는 노력은 더디 하거나 안 하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비대면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생각이 넘친다고 했는데, 넘치는 생각이 이렇게 미치니 긍정적인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생각이 많아지고, 삶이 달라지는 것 같고,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는 걱정들이 가득하지만, 우리에게 이 시간을 통해서 깊이 깨닫는 것은 우리들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선교 이야기”는 책을 읽는 중인데, 로마 교회를 배경으로 1세기 기독교인들이 살아온 삶을 길지 않게 써 내려간 책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들에게 벌어진 놀라운 변화”를 기록했다는 초반의 한 문장이 제 마음을 강하게 움켜잡았습니다.
우리는 변화 받은 사람이고, 그것이 예수 믿는 자의 능력이라고 고백합니다. 능력은 실제로 삶에서 일어날 때 경험되어지는 것이지,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들이 다시 한번 우리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 지속적인 구원의 약속, 그리고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님이 믿었던 믿음 즉 복음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펼쳐진 의로운 삶과, 구원을 우리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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