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1-11
주님과 동행하는 길
1. 사순절기의 끝자락에 와 닿았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로 지키고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2. 복음서에 보면, 요한복음에서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 다른 복음서에서는 “나뭇가지”로 기록하고 있으니, 종려주일은 요한복음의 전통을 따라서 지키게 된 “절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4. 나뭇가지든, 종려나무 가지든,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마지막 길에 함께 한 것들입니다.
5. 오늘 말씀 이전에 예수님이 주로 활동하셨던 지역은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아마 오늘날로 치면 변방 중의 변방,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소외된 지역의 상징이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6. 대부분의 시간을 거기서 보내셨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실 때는 유월절 명절일 때 매년 가셨을 것입니다. 모든 유대인들, 특히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이 이날을 맞이해서 예루살렘으로 왔을 테니, 예수님도 그리했을 것입니다.
7. 그런데, 오늘 등장하는 본문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은 특별합니다. 만약 이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갈릴리에 머무시고 그 근처에서만 말씀을 전하셨다면, 그렇게 유대교 지도자들을 위협하는 것도 아니었고,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시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8. 그러니,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 개인에게도 큰 변화의 길 위에서 계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숨 막히는 결정적인 사건이 오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지금 가시는 그 길에 끝이 어떤 상황으로 자신을 이끌고 갈지도 잘 아셨을 것입니다.
9. 다른 때와 달리 당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정면승부처럼 느꼈을지 모릅니다. 멀리서 들리던 예수님의 소문이 실제로 유대교 중심인 예루살렘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상황에 예수님은 곧바로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협조자들에 의해 곧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10.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라고 소개된 곳은,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근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다니로 길을 나섰고,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마중 나온 곳이 벳바게 입니다.
11.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셔서 마침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나사로에게는 기적이었지만, 마리아와 마르다에게도 은혜였지만, 이 사건 더욱 예수님을 십자가처형으로 몰고 가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12. 그러니, 이런 정황 속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 도사리고 있는 곳으로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 예수님이 타고 가신 것은 “어린 나귀”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겉옷을 거리에 깔고, 나뭇가지를 흔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며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고 외쳤습니다.
14.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시는 그 길에 겉옷을 깔았습니다. 나뭇가지를 흔들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주님을 향해, 사람들은, 세상은 세상의 왕으로 예수님이 오실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15. 요한복음에 보면, 나사로를 살리신 소식이 마침 예루살렘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크게 소문이 났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계기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이 때문에 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이 예수를 죽여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한 것도 바로 이 사건 이후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16. 사람들이 몰려들 때, 예수님의 말 한마디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밀알처럼 썩어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려는 것은 곧 죽음과 고통의 길을 함께 가야한다”고 말씀하시고 무리들 가운데서 사라지셨습니다.
17. 이렇게 연결해 보면, 작은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은 “세상의 수많은 요구에 대한 거부”라는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18. 제자들 중에서는 실제로 예수님의 인기를 몰아서 세상을 뒤집어 엎을 힘을 기대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몰려든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을 마치 자기들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실마리로 이용하려는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19. 그런데, 그런 자들, 그들의 욕망이 충만할 때,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20. “세상의 욕망의 끝인 세상의 권세 있는 왕”에 대한 기대에 예수님은 “어린 나귀”로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1. 사람들이 몰려들고, 예수님을 세상이 주목할 때, 예수님은 앞으로 가실 “길”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 길을 가면, 십자가로 자신의 삶이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22. 그런데 그 길을 가시는데, 적당히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그 길을 가시면 편안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기대한 모습으로 들어가면 “그 길”을 피할지도 모르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사람들의 요구에 자신의 삶을 맡기지 않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준비된 길”로 가셨습니다.
23. 이 길 위에 우리들이 깊이 읽어야 할 말씀이 또 있습니다.
24.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11절에 보면, 바울이 고백하는 예수님이 가신 길에 대한 고백이 깊게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 고백은 당시 초대교회가 노래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인데,
25. 빌립보서 2장 6절에 보면,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26.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길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음에도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을 당연히 생각지 않으셨다고”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27. 이어지는 말씀에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28. 바울의 이 고백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더 확고해졌을 것입니다.
29. 사람들은 궁금해합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외치는 시간을 지나왔는데, 예수님은 그 공간을 스치듯 지나고 결국 하나님이 준비할 길로 향해 가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30. 사람들은 쉽게 인정합니다. 힘과 권력이 당연히 삶의 목적일 수 있다고들 생각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오히려 거꾸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 새로운 길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31. 바울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삶을 세상의 정점으로 나아가는 삶을 추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질서가 그랬고, 모두가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그 길을 바르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32. 그런데, 어느 순간, 사도행전에서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그때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33. 예전에 교회학교 선생님 중에 ROTC 장교로 복무하셨던 분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대대장에게 한창 인정받고 있을 때, 대대 야간 행군을 이끄는 책임을 맡았다고 합니다. 미리 답사를 다녀온 후에, 한밤중에 대대를 이끌고 야간 행군을 나섰습니다. 모든 대대가 이 선생님의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밤길을 행군했습니다. 거의 목적지 고지에 이르렀을 때, 이 선생님이 문제가 발생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34.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산을 올라서 거의 정상에 올라온 것입니다.
35. 급한 마음에 대대장에게 보고했습니다. “이 산이 아닌가 봅니다~”
36. 그 때 이후로 대대장의 신뢰는 무너지고 제대할 날만 기다리다 군생활을 마쳤다고 합니다.
37. 잘 못된 길을 가면, 돌아서 다시 가야합니다.
38. 바울은 자신이 바라보는 방향,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잘 못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신 방향으로 삶을 정했습니다.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왕이라고 환호할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몰려들 때 오히려 한 알의 밀알이 죽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씀에 바울도 동참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39.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 방향은 스스로를 죽이셔서 우리를 통해 열매 맺는 것임을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율법에 매몰된 신앙생활에 생명을 일으키는 방법은 세상 모두가 가려는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향,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에 있다는 것을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40.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우리들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에 함께 동행한다는 의미이고, 바울이 결심한 그 길에 동역자로서 함께 한다는 의미입니다.
41. 예수님의 그 길에 바울이 함께한 것처럼 우리들도 함께 그 길 위에 있습니다.
42.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방향에 몸과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과 동떨어져 우리들만 잘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듯, 세상에 몸담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에이전트, 또는 도구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43. 지난 주간, 연회에서 아시안 혐오와 차별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감독님과 몇몇 아시안 목사들이 모여서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 고난 주간, 수요일 저녁 7시에 함께 예배하기로 했습니다.
44. 그때 나눈 대화 중에,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명, 즉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들이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증하고, 그 변화의 노력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서로 권면했습니다.
45. 개인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차별과 혐오의 문제는 세상이 정한 잘못된 방향에서 비롯된 것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집단 이기주의와 모든 문제의 원인과 해결은 자신이 아닌 다른 타자를 통해 해결하려는 심리는 감히 인간이 인간을 가볍게 여기는 악한 마음으로 사람을 끌고 갑니다.
46. 우리는 절대로 이런 삶의 방향을 반대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야 할 길, 바울이 삶의 방향을 바꿔 예수님과 함께 가려고 한 길이 바로 이런 방향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길 위에서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47. 종려 주일입니다. 곧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이 시점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께 환호했던 그때를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가신 길을 되짚어 보며 보내는 시간입니다.
48. 예수님이 가신 길은 우리들의 욕망을 실현하는 길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었습니다. 자신이 목숨을 잃을지라도, 세상의 주목이 사라질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49. 신앙생활은 그리고 이 생활을 통해 우리들이 가야 할 길 그 너머에는 “내 소망과 꿈, 기대가 실현되는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예배하면서 기대하는 그 너머의 길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그 자리에 거룩한 도구”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몸과 영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50.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각자 주어진 그 길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의 자리, 직장이나 생업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의 길로 우리를 부르셨는데,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신앙생활의 길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이 공동체에서 우리들이 가야할 길은 그 너머의 길은 “주님이 마련하신 그 길”입니다. 내 생각, 내 기대 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온 맘과 온 힘을 다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또 다른 신앙생활의 길입니다.
51.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기쁘고 좋은 것을 기억하는 것이 익숙한 시대에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를 낮고 낮은 자리로 몰아놓고 숨죽여 하나님의 뜻, 그리고 준비된 길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52. 거룩한 그 시간에 몸과 마음으로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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