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5:15-20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
주님의 뜻을 아시나요?
주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은 생각만큼 우리들에게 쉽게 다가오는 개념이 아닙니다. 가끔 우리들이 “주님의 뜻”이에요 라고 하는 이야기는, 정말로 지금 벌어진 일이 하나님의 뜻이고 고백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늘 일상적으로 교회 안에서 모든 이야기를 나눌 때, “주님의 뜻”이라는 말이 관용어 처럼 쉽게 이야기하는 것인지에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에게는 이런 교회용어들이 어렵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이미 익숙해 있는지 모르지만, 이런 용어들이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이야기하는 것인지 혹은 늘 일상적으로 교회에서 사용하는 말인지 혼란스러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우리들은 “기도해보자”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제 경험은 “기도해보자”라는 말은 늘 “거절”의 표현으로 읽혀질 때가 있습니다. 뭔가 답하기 애매할 때, “기도”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표현들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비슷하게, “주님의 뜻”이 단지 상대를 위로하게 사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모두가, 하나님의 뜻인 것으로 인정하고, 더이상 언급하지 말자는 의도로 이야기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나눌 말씀은 정말 주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 무엇이고, 주님이 정말로 우리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부딪히며 살아가는 이 세상은 우리들에게 많은 결정을 요구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늘 주님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고백하지만, 실제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이고, 그냥, 익숙해진 관용구로 사용하면 어떤 오해가 있고, 어떤 약점이 있는 가를 살펴봐야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이게 무슨 일이야?” “왜 갑자기 이런 어려움이 우리한테 생긴 것이지?”라는 물음에, “주님의 뜻이에요!”라고만 이야기한다면 “진정한 주님의 뜻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될 수 있다”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주님의 뜻 알기 첫번째 발걸음
우선, “주님의 뜻”을 찾기 위해 오늘 읽은 에베소서 말씀을 꼼꼼히 읽어보겠습니다. 15절에 바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살피다라는 동사는 ἀκριβῶς (akribos, ak-ree-boce)라는 말로, 신중하게, 부지런히, 완벽하게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니 “신중하면서도, 신속하게 완벽한 삶을 살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완벽한 삶은 지혜없이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사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지난번에 한번 말씀드린 것 같은데, 삶을 지혜롭게 사는 것에서 사용하는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평행본문인 제 1독서는 열왕기상 3장인데, 여기서 솔로몬이 아버지를 이어서 왕이 된 후에 하나님이 무엇을 주기를 바라냐는 질문에, 아직 나이가 어린 솔로몬이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니, 에베소서 말씀에서 지혜롭게 사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운 마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지식도 아니고, 오랜 숙련으로 생긴 경험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마음에서 오는 지혜라는 것입니다.
세월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으로 만회하기
16절에 바울은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을 때,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악”하다는 것에 사로잡혀서, “세월을 아끼라는”의미에 대해서는 깊게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이 악하니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으로만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세월을 아끼라는 것은 “최선을 다해 시간을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사용하다는 단어는 ἐξαγοράζω (exagorazo, ex-ag-or-ad´-zo;) 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만회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단순히 시간을 아끼라는 의미가 아니라, 시간을 만회하고, 손실된 것을 회복하라는 의미입니다. 시간이 손실되었으니 회복하라는 것인데, 이 말이 재미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때”라고 번역한 것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한 시간의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의 개념은 물리적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적인 시간의 개념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이어지는 시간의 개념을 크로노스적 시간이라고 이야기하고,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시간은 “카이로스”적 개념을 말하는 것으로 어떤 목적의식이 주입되 시간, 적절한때, 결정적 시간, 어떤 기회를 의미하는 시간의 개념입니다. 그러니, 세월 아끼라, 때가 악하다는 의미는 지금 “악한 시간에서 하나님의 시간으로 빼앗아오라는 의미, 만회하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이 생각한 악한 때, 악한 세상은 우리들이 포기하고 멀리해야 할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들이 만회함으로 악한 때를 하나님의 선한 때로 바꾸는 것으로 이해 해야합니다.
주님의 뜻을 아는 것: 성령충만함으로
그래서 17절에 바울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어리석다는 말은 지혜로운 자와 댓구적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앞서 질문한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는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인데, 세상의 악한 것을 주님의 지혜로 선한 것으로 바꾸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뜻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은 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함이 따릅니다. 성령이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이 문장은 단순히 술을 먹지 말라는 말로 교회에서 사용되어 집니다. 그런데 문장 구조와 문맥을 따라 읽어보면, 술에 의지하며 살아갈 것이냐는 “때가 악하다”와 평행구조를 이룹니다. 즉 술에 의지하는 것은 어느 힘에 의지하며 살아가냐?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이 구절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술에 의지하며 살아갑니까? 아니면 성령의 충만함을 의지하며 살아갑니까?” 술에 의지하는 것은 “때가 악함”으로 표현되어지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고, “성령 충만함”은 바로 주님의 지혜로 술에 의지하는 행위들을 빼앗아오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술에 취한다는 것은 취함이라는 행위로 다른 힘에 의존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라는 것은 취함이라는 자기 의지적 행위에서 벗어나서 충만이라는 주님이 주시는 것을 의지함으로 악한 때를 하나님의 때로 바꾸어 갈 수 있는 마음을 품으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충만한자: 예배하는자
이어지는 본문 19절에서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시는 시편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찬미는 찬송이고, 신령한 노래는 영가를 말하는 것인데, 우리들은 그냥 쉽게 “찬양”으로 통일합니다. 이 세가지 찬양의 형태는 예배에 사용되어지는 노래의 형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어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영어성경에는 “너희가 함께 만날 때”라는 문장이 들어가 있습니다. 원어성경에는 이와는 좀 다르게 “너희들은 이야기를 나눌 때”라고 등장하지만, 이야기와 만날 때를 함께 연결하면 “예배할 때”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배하는 것” 이 행위는 곧 “성령충만한 자”들이 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술에 취하듯 사람들은 자기들이 기대하는 힘, 행위들이 있습니다. 주말이 되면 우리들은 각자가 원하는 일들을 하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물질을 투자해서 즐길 줄 아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영국에 프리미어리그를 구경하기 위해 비행기표를 끊고 바로 경기장으로 갔다가 경기가 끝난 후 바로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것으로 주말을 사용하는 분들을 봤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축구에 진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약간 이와 비슷한 표현에 걸맞는 무언가에 심취해있거나, 진심이라는 소리를 들을만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는 의미는 바로 이런 견지에서 이해 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지금 주일 이 시간에 함께 예배하기 위해 이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다른 선택의 기회들을 포기하고 예배하는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들은 “성령이 충만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성령충만하지 않은데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우리들이 생각하는 성령충만의 눈높이가 너무 높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지, 예배를 위해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성령 충만함”으로 이 자리에서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하고, 말씀도 듣고, 교제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아는 것: 모든 것에 감사한 삶
20절에, 바울은 마지막으로 “모든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면함으로 오늘 본문을 마무리합니다. “모든 일”을 감사한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이 하는 행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비정상적인 삶의 모양이지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행위”는 결국 악한 때를 선한 하나님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뜻이라는 것은 성령충만함으로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자에게는 모든 것을 감사할 수 있음으로 주님의 뜻을 해석해낼 수 있습니다. 불평 할만한 경험과 사건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성령충만한자들이 할 수 있는 행위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혜롭게 산다는 의미는 세상 똑똑한 것 자랑하며 살아가는 행위가 아니라, 악한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의 때로 만회하기 위해 늘 예배하고, 모든 것에 감사함으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아는 것: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성경은 다윗을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기드온에 있는 산당을 세웠다는 것에 조금 못마땅한 뉘앙스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솔로몬을 주님이 축복하신 이유는 아버지 다윗이 늘 주님을 진실과 공의 그리고 정직한 마음으로 모시고 살았기때문에 주님이 솔로몬에게 큰 축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주님의 뜻에 솔로몬이 “주님이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간구합니다. 솔로몬이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운 마음을 얻을 수 있고, 지혜의 왕으로 지금까지 기억되는 이유는 아버지 다윗이 주님 앞에 늘 공의를 행하고 정직했으며, 진실했기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 2독서인 시편111편에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7절-8절 말씀에, “7. 주님이 바로 손수 하신 일들은 진실하고 공의로우며, 주님이 지시하신 법은 모두 든든하며, 8. 영원토록 흔들리는 일이 없으니, 진실과 정직으로 제정되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주님의 뜻은 “진실과 공의 그리고 정직으로”으로 자세하게 표현되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주님의 뜻”을 말하는 의미는 “공평과 정의로움이 그 자리에 있는지, 그리고 정직하고 진실한지”를 확인한다면 그것이 “주님의 뜻”인지 아닌 지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오늘 읽은 본문에 기록된, 술취하지 말고, 성령충만함을 받으라는 바울의 권면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우리들이 해야할 주님의 뜻은 “공평과 정의 그리고 정직과 진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아는 것: 주님처럼 살아가는 것
마지막 제 4독서는 요한복음 6장51절에서 58절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제4독서 복음서의 말씀은 “생명의 빵”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생명의 빵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 우리도 그 생명 가운데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먹는다는 의미가 정말로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먹거리를 먹는 행위인가? 이에 대해 요한 복음 기자는 “내가 아버지때문에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때문에 살 것이다”라는 표현으로 우리가 예수를 생명의 빵으로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통해 얻은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우리들에게도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이 응답을 “주님의 뜻”으로 보면, “주님의 뜻은 주님 처럼 살아가는 삶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본문의 내용들은 “주님의 뜻”은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드러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솔로몬이 지혜를 갖게 된 것은 “공평과 정의 그리고 정직함”으로 평가되는 하나님 앞에 이런 신실함의 열매 때문이고, 이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런 주님을 찬양하며 에베소서는 이것을 “성령 충만”함으로 악한 때에 있는 것들을 주님의 영역으로 회복시킬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들이 주님의 뜻을 이야기할 때는 “정의로움, 공평함, 그리고 정직과 진실”을 근거하는 성령충만함에 의지하여 이 땅을 살아가는 의미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은 분명히 성령충만함으로 관성과 익숙함으로 물들어가는 악한 때를, 주님의 뜻 가운데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능력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고, 이런 능력은 세상이 의지하는 방향이 아닌 하나님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을 또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삶을 일으켜 주님의 선한일을 위해 힘쓰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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