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수르 니느웨의 멸망은 곧 이스라엘에게는 회복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니느웨의 멸망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국의 확장으로 다른 소수 민족들에게 저질렀 던 것을 고스란히 돌려받는 것에 대해서 나훔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앗수르의 전령은 더이상 활동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오히려 이스라엘, 곧 유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는 전령이 활동하고 있음으로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훔의 문학적 기법은 니느웨의 멸망을 생생하게 중계하고 있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긴박성과 함께, 완벽하게 방어를 준비하지만, 소용 없음을 보여줌으로 더 큰 절망으로 니느웨가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심판의 모양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어떤 정예부대나 첨단무기도 무용지물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승승장구하던 앗수르는 그들이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완전히 소명되고 있다는 것을 나훔은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6절에 소멸된다는 의미는 녹아서 살아진 다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마음이 녹아진다"라고 표현할때 함께 쓰여지는 이 단어는 주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말해, 마음이 녹아진다는 표현은 애간장이 타들어 간다는 의미와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소멸의 의미는 이제는 한치앞으로 볼 수 없는 절망속에 마음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맛보는 순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짧은 본문이지만 전쟁의 참혹함이 잘 녹아져 있습니다. 황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간다는 것은 전쟁에서 경험하는 잔혹함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것처럼 앗수르 또한 그들이 점령한 나라의 황후들을 그렇게 다루었고, 전쟁에 가장 큰 피해자는 여인들과 아이들임을 짐작케 하는 끔찍하고 잔인한 장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끔찍한 역사적 경험속에 나훔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원수를 갚는 것으로 니느웨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속에 어떠한 것도 당해낼 수 없음을 고백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되돌릴수 없지만, 역사의 이해는 다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절망으로 치닷던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이 니느웨를 심판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상처를 싸메 시면서 동시에, 회복은 심판이 없어지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경험하고 파괴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것도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하루아침에 소멸시키는 것도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이 나훔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의 결과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심판과 구원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니느웨의 심판이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메시지로 들린 이유는 바로 여기엤습니다.
묵상
전쟁의 참혹함속에서 어떤 것들을 발견하시나요? 지나간 시간중에 절망적인 시간들이 지금은 어떻게 해석되고 있나요?
중보기도
이길웅 집사님과 박두진 권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소망회 회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교회학교와 중고등부, 청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새로운 여정을 준비하는 청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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