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6 : 1~12, 2025.03.28 (금)
- 열린교회BKUMC
- 3월 28일
- 2분 분량

5그는, 나실 사람으로 서원하고 헌신하는 그 모든 기간에는, 자기 머리를 삭도로 밀어서는 안 된다. 나 주에게 헌신하는 그 기간이 다 찰 때까지는 거룩한 몸이므로, 머리털이 길게 자라도록 그대로 두어야 한다. (민수기 6:5)
"삼손과 데릴라"라는 영화가 주말의 명화로 안방에서 방영될때, 그리고 성탄절만 되면 특선영화로 방영될때 그시절 성경을 배경으로한 영화는 넘쳐났었습니다. 명작들이라고 불렀었고, 좋은 영화 소재로 인기리에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기독교영화들이 요즘은 오래된 고전일뿐 더이상 리메이크 되거나 제작되지 않고 오히려 기독교의 현실을 비판하는듯한 영화들이 유행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나실"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삼손으로 대표되는 나실인을 머리를 깎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삶의 재미가 없을 만큼 오직 하나님이 맡기신일만 해야하는 삶이니 삼손이 삐뚤어지고 방황했던 그 영화의 장면은 마치 우리들의 삶에 가까이 경험하는 반항(?!)의 모양으로 깊이 기억되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기독교가 모든 문화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교인들을 인정하고 교회를 의지하면 좋겠지만, 역사적으로 늘 교회가 인정받고 존경받던 시대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잘아시는 것처럼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들은 이 고난을 기억하며 사순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혹시 기독교가 세상을 움켜쥘 날을 기대하신다면 절대로 예수님도 그리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종교와 상관없이 정치인이 자신의 당선을 위해 예배를 드립니다. 혹하는 마음에 기독교인이신가? 싶은 그는 교회를 이용해 자신의 당선을 꿈꿀뿐 교인이 아니고 오히려 불교계에 깊이 몸을 담고 있는 분이라는 기사를 보고 망연자실한 교회의 이미지에 가슴이 아픔을 느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는데 (정치적 관심보다 우리들이 기대하는 기독교와 다른듯 해 이야기하는 거에요) 들려오는 소식은 우리모두를 답답함으로 몰고가는 소식에 과연 우리들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세워오고 길러냈는가를 깊이 돌아봐야할것 같습니다.
나실인은 구별됨을 위해 절제와 특별한 선택의 삶을 살았습니다. 내가 나실인이 아니라는 것이 다행일정도로 그 기준은 엄격하고 지켜야할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독교인 교회하면 이정도는 아니어도 지켜야할것, 엄격해야할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우리는 왜 기독교인인가? 라는 물음에 성실한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이 젊은이는 늙고, 늙이는 죽는다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요즘 이 문장에 깊이 되새기고 있습니다. 시간은 절대로 우리의 삶과 동행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그 시간의 주인으로 세워갑니다. 즉 영원히 붙들며 살수 있는 것은 없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영원이 우리들이 붙들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잘기억하고 삶앞에 겸손하면 우리들은 경이로움으로 표현되는 기독교인의 정수를 세상에 드러내 보일 수 있습니다.
세상은 바뀌었고, 이런 세상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거기에 우리의 생명이 담보되지 않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바뀌어도, 우리들에게 변함없이 하나님나라의 소망은 이어질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불들려 살지 말고, 오히려 세상의 중심에 필요한 것들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생각이듭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기독교의 정수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묵상
구별됨에 대한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세요! 세상과 나의 관계는 어떤 관게인가요?
중보기도
박유진 집사님 아버님이 폐혈증으로 ICU에 계십니다. 바이러스를 발견해서 치료중에 있으시지만, 항암치료와 병행중이라 육신이 약해져계십니다. 기도로 든든히 동행해 주세요.
이번주 주일은 탕자에 대한 말씀을 나눕니다. 그리고 예배후 교회대청소가 있어요 함께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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