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훈련받을때 가장 괴로운것은 “나”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벌을 받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때문에 고된 얼차레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공동체, 특히 훈련을 목적으로 하는 곳은 이런 연대의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학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적이 있는데, 생각해보면, 전체 규율을 세우는데는 이만한 방법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성숙하지 못한때는 이런 연대의식 보다도, “누구 때문에”라는 손가락질을 만들어내는 따돌림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그런지, 집단 연대의식은 가끔 폭력으로 드러나지기도 합니다. 만약, 내부고발이라는 모양으로 비춰지면 철저하게 집단따돌림은 물론이고, 이들의 권익을 보호해야할 법이 등장할 정도로, 집단 연대의식은 또 다른 차원에서는 집단 폭력 혹은 이기적인 형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바야의 오늘 본문은 유다의 잘못때문에 주변국가, 심지어 자연과 동물들까지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라면, 당시에 모든 자연과 동물들, 그리고 주변국가들이 심각하게 유다를 손가락질할 만한 상황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어떤 마음으로 스바냐를 통해 이런 메시지를 보내시는지 살펴야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서 유다는 특별하게 분리된 존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늘 선민사상을 그들의 신앙의 중심에 두기도 하지만, 특별히 택하셨다는 것은 그들만 선택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의 모든 일을 하시겠다는 “도구 삼아주심”이라는 의미임을 기억해야합니다. 택함받은 백성이라는 의미는 내가 특별하다는 의미보다는 다른 이들을 위해 내가 책임이 커졌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이어가다보니까, 오늘 본문에서 스바냐는 “유다”의 죄가 곧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한것으로 보입니다. 유다의 지은 죄는 결국 모두의 죄가 되는 것,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르게 세우지 못한 신앙이 이 세상 모두를 고통가운데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스바냐는 고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한사람의 문제로 교회 전체가 흔들리는 경우를 봅니다. 그만큼 우리들은 알게모르게 가깝게 그리고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 한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묵상
여러분도 교회공동체 안에서 단단하게 연결되어 계신가요?
중보기도
박두진 권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여름성경학교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9월 전체 대면예배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