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보면 바다 너머에 있는 고향 생각을 한다는게, 어느 시인의 싯귀인줄만 알았습니다. 느닷없이 안부 전화를 걸어온 목사님은 일년에 한두번 보는 것으로 관계한 분인데, 어떻게 이사는 잘했고, 새로운 교회는 어떤가 하고 안부를 묻습니다. 딱히 이야기할 내용은 없어도, 그 마음으로도 푸근함을 느낍니다.
새벽에 동생이 오랜만에 카톡을 보냈습니다. 일년에 한두번 연락하는 형제지간이라 갑자기 날라 온 문자는 긴장하게 만듭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어.." 한참을 침대에서 못일어 났습니다. 아마 긴 생각의 여정을 통해 외할머니와 대화를 하듯 시간을 보낸것 같습니다.
영상통화로 어머니를 위로하고, 외삼촌을 위로하고, 이모를 위로 하고는 "언제 오니?"라고 물음에, 얼버 무리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저의 집에서, 기독교 가정은 저희 가정 뿐이고, 거기에 목사가 되어서, 미국에 까지 와 있다고 하니, 친척들은 그저 신기해 합니다. 이런 분위기이다 보니, 늘 저의 삶은 조심스럽고, 되도록이면 "좋은 목사"로 보여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깨달은건, "목사"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 분들이 "좋은 목사"를 잘 알리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목사"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려고 늘 노력하려고 생각했던 것같습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목사인 손주는 하나님 이야기, 성경이야기, 신앙이야기를 한번도 들려드리지 못했습니다. 꽤 오래 누워계셨던 지라, 명절때 영상으로 인사를 드린 것이 전부였습니다.
어릴적, 외할머니는 저를 호되게 다루셨습니다. 친할머니는 늘 오냐오냐 하셨었는데, 늘 마음 한구석에 외할머니가 계신 것은 "호되게 다루신"것이 저에게 더 깊은 사랑으로 느껴진듯 합니다.
오늘 본문에, 아마샤에 대해 역대기 사가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지만, 마음을 다하지 않았다"(2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적당히 하나님과 관계 했지만, 전심을 다하지 않았다는 의미인 듯합니다. 아마샤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들이 확인하는 것은 적당함에 대한 애매함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가족들에게 저의 행위는 애매 했던 것 같습니다. 적당히 큰 역정 안낼 만큼만 관계를 한 듯합니다. 그러니, 그때, 이제는 외할머니를 뵐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날이 와서는 이런 저런 생각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가족관계에서 만 그런게 아니라, 교회에서도 우리들의 적당함이라는 애매함에 빠져있을때 있습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적당히 무관심하고, 적당히 관계하는 것을 최고의 관계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샤가가 이런 삶을 살았으니, 에돔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세일자손의 우상에게 번제를 드리는 일들을 했던것 같습니다. 이런 애매함이, 아마샤의 삶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러니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열심의 모양은 있지만, 애매함으로 관계를 가지려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마샤의 삶을 진지하게 살펴야합니다. 사람들이 혹은, 스스로 자신을 괜찮다. 괜찮다. 하지만 그 애매함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함을 결핍하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생각해보기
한참을 연락 안한 분과 오랫만에 안부 연락을 해보시겠어요?
혹시 애매함에 전심을 다해 무언가를 해보지 않은 경험이 있으신가요? 지금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힘쓰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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