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할꼬, (에카)로 시작하는 예레미야 애가는 예레미야의 탄식(lamentations)기록 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예레미야서와 달리 예레미야 개인이 유다를 향한 심판에 대한 안타까움을 기록하고 하고 있는데, 탄식(lamentations)이라는 구약성경의 문학적 형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탄식은 우리와 매우 친숙합니다. 일반적인 신세타령 혹은 걱정 정도를 표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경험 사이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성서 기자의 안타까움이 녹아져 있는 것을 "탄식"이라고 구별해서 읽어냅니다. 시편에도 이와 같은 문학적 형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날카롭고, 돌아갈 여백을 허락하지 않지만, 실제로 예레미야가 예언을 하면서 가진 속내는 예레미야 애가에 잘 녹아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하늘을 찌를 무렵 많은 신학자들이 드러내는 글이나 연구는 교회를 냉정하게 하나님과 인간을 이성적인 잣대로 정리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내면에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적인 신앙이 녹아져 있다는 것도 비슷한 모양인 듯합니다.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으로 열광하는 유럽의 대중들의 현상들과 씨름을 하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연구를 토해냅니다. 주어진 현상에 끌려가지 않고, 혹은 주어진 고난과 고통에 쓰러지지 않고 믿음의 선배들은 늘 그에 마땅한 하나님의 방향을 가리키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어찌할꼬~!라는 탄식으로 가득한 예레미야 애가는 지금 우리들이 경험하는 현실에 맞는 탄식을 이해하게 합니다. 걱정이 매일 산더미 처럼 쌓여가지만, 그러므로 우리는 탄식하지만, 이 탄식은 결국 우리들을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이끌어 갈것입니다.
오르는 길이 험란하고, 벅찬 숨을 내쉴때, 육체는 단련되어 지고, 아래에서 볼수 없는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됩니다. 이런것이 고난의 역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한주간 추수감사절이라는 관성적인 이해로 볼때는 전혀 예전같지 않은 시간을 경험하시겠지만, 그 너머에 주어지는 역설적 단련과 내다봄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오늘도 바뀌지 않은 현실에 언제까지 코로나바이러스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깊어집니다. 허덕이는 삶, 가난해져가는 마음에 복되다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에 더욱 집중하게 하시고, 결국 든든함과 보지못했던 것을 바라봄으로 이것이 주님이 이끄신 것이구나! 감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중보기도
코로나바이러스 백신과 치료제에 대한 긍정적인 소식은 들려오지만, 여전히 우리들의 삶은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 세상이 주는 희망에는 겸손하게 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에는 욕심을 내게 하셔서, 이 시간을 지혜롭게 보내도록 이끌어주소서.
박두진 권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질병 가운데 있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교회를 위해서,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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