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뵐 때에, 내가 그의 발 앞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니, 그가 내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요한계시록 2:17)
연달아 두번, 써놓은 묵상이 컴퓨터 오작동으로 또는 홈페이지 문제로 사라졌습니다. 정말 맘에 들게썼던 문장들이 사라지면, 다시 복원하기에는 힘듭니다. 기억을 더듬지만, 그 때 그 표현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유는 사라진 것에 대한 불만으로 온통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그렇습니다.
다시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데,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는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어려운 것은 요한이 펼쳐놓은 표현방식입니다. 종말론적 의식이 가득하고, 박해에 고통스러워하는 교회에 편지를 써서 그들을 격려하는 방식이 직설적이지 않고, 비유와 은유가 뒤섞이다보니, 원래의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훨씬 시간이 흐른뒤에 독자들에게는 쉽지 않습니다. 만약 이와 비슷한 박해가 진행되는 가운데 읽혀진다면 좀더 와닿게 본문을 읽을 수 있겠죠.
요한은 그리스도예수를 "처음이요 마지막" 즉 알페와 오메가라는 표현과 어제도 계셨도, 오늘도 계시고, 내일고 계시는 삼중선언을 통해 박해받는 교회들이 든든이 그 자리를 지켜나갈 수 있도록 선언합니다. 다른 표현들이 가득한데, 요한의 가장 큰 이야기의 틀은 "지금 주님이 늘 함께하신다. 앞으로 계신다. 전에도 계셨다"는 표현입니다.
요한이 고백하는 교회는 이 삼중고백을 통해 존재합니다. 있고 싶다고 있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계시는 주님이 고난가운데 있는 교회를 든든히 이끌어가신다는 고백입니다.
입당감사예배를 드리고 난 후 이런 저런 후유증(?!)이 있습니다. 큰행사를 치르다 보니, 에너지도 소진되고, 교회를 둘러보니 청소할 것이 가득합니다. 주방에 이제 큰 주방 팬을 설치하면서 앞으로 하면 더 잘할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테이블 셋팅을 이쁘게 꾸민 손길을 생각하면 다음에는 더 잘 할 수 있따(?!) 자신감(?!)이 생깁니다. 후유증이죠.
이렇듯 사람의 마음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향해 움직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신앙은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고, 내일도 계실 주님을 고백하며 존재하는 것입니다. 처음이고 마지막이 되시는 주님을 고백하는게 우리들입니다.
고난이 삶의 끝이라 판달 수 없습니다. 영광스러움이 영원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것은 주님밖에 없다는 것이 요한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고백입니다.
묵상
예전부터 지끔까지 붙들고 또는 간직하고 앞으로도 소중하게 여길것들이 있나요?
중보기도
비가옵니다. 바람도 불고, 겨울입니다. 감기 건강조심하기를 기도해주세요. 어제 빗길에 사고가 났는지 교회에서 청년들 예배하는 버클리까지 40분이상 걸렸습니다. 빗길운전 조심하세요.
교회학교, 유스, 청년, 장년 소망회에 이르기까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가득한 공동체가 되도록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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